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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저격수의 고백’을 읽다.

Written by leejeonghwan

April 25, 2005

가난을 벗어나는데도 돈이 필요하다. 뭘 좀 해보려고 해도 밑천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럴 때 누가 선뜻 돈을 빌려주겠다고 나서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돈이 어떤 돈이냐는 거다. 그 돈을 왜 빌려주겠다고 나서냐는 거다. 물론 우리나라는 그렇게 빌린 돈으로 공장도 짓고 도로도 깔고 경제를 발전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많은 나라들이 그렇지 못했다.

여기에는 무시무시한 음모가 숨어있다. 컨설팅 회사 메인에서 수석 경제분석가로 일했던 존 퍼킨스가 그 음모를 폭로한다. 퍼킨스는 가난한 나라들이 돈을 빌려쓸 수 있도록 이 나라의 경제 전망을 뻥튀기하는 일을 맡았다. 그렇게 돈이 들어가면 그 돈은 고스란히 미국 기업들에게 다시 돌아온다. 빚은 갚을 수 없을만큼 불어나고 이 나라는 미국의 경제 식민지로 전락한다.

이를테면 인도네시아에 전기를 들여놓는 공사를 하려고 한다. 퍼킨스의 회사는 이 나라의 예상 경제 성장률과 전력 수요량을 계산하고 이를 근거로 미국은 이 나라에 돈을 빌려준다. 돈을 빌려줬기 때문에 발전소나 전력 설비를 짓는 일은 모두 미국 기업들의 몫으로 떨어진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전기를 얻은 대신 빚을 떠안게 됐고 미국 기업들은 엄청난 이익을 챙겼다.

빚을 갚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빚을 못 갚게 만드는게 관건이다. 빚을 못 갚게 되면 그만큼 미국 의존도가 높아진다. 미국이 시키는대로 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이야기다. 돈이 없어? 그럼 일단 석유를 캐고 그걸 우리나라에 팔아봐. 기술이 안돼? 그럼 우리가 해줄 테니까 돈만 줘.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다.

에콰도르에서는 100달러어치 원유를 캐면 75달러를 미국의 석유회사가 가져간다. 그리고 나머지 25달러 가운데 15달러 이상이 빚을 갚는데 들어간다. 정작 이 나라 경제에 들어가는 돈은 10달러 미만에 그친다. 엄청나게 많은 석유를 캐내지만 빚은 갈수록 늘어나고 빈부 격차도 더 커진다. 에콰도르의 석유로 미국이 이익을 챙긴다는 이야기다. 놀랍지 않은가.

과거와 비교하면 세계는 언뜻 더 평화로운 것처럼 보인다. 무턱대고 무력으로 다른 나라를 집어삼키는 일은 이제 거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동안 군대가 했던 일을 이제 기업이 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른바 기업정치(corporatocracy)다. 기업은 미국을 업고 가난한 나라들을 마음껏 약탈한다. 그게 미국이 성장하는 방식이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미국이 얼마든지 달러를 새로 찍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돈이 없으면 찍어내서 주면 된다. 다른 나라 같으면 화폐 가치가 떨어지겠지만 미국은 다르다. 달러 가치가 떨어지면 미국에 수출하는 나라들은 그만큼 부담이 늘어난다. 우리나라는 그래서 미국 국채를 사들여 환율을 억지로 끌어올린다. 미국의 빚을 우리가 떠안고 있다는 이야기다.

미국은 그렇게 만든 돈으로 다른 나라를 약탈한다. 이를 테면 빌려줄 때는 돈을 새로 찍어내서 빌려주고 그 돈은 고스란히 미국 기업들에게 다시 돌아온다. 빚은 빚으로 남고 그 빚은 결국 그 나라의 석유를 비롯해 천연자원과 값싼 인건비를 팔아 받아낸다. 이게 현대판 제국주의의 작동원리다. 미국의 실체는 곧 기업이다. 이들의 돈을 빌린 나라는 결코 가난을 벗어날 수 없다.

부패한 정부가 들어선 나라는 약탈하기가 더 쉽다. 돈을 왕창 끌어다 뿌리면 언뜻 발전하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갚을 걱정은 나중에 하더라도 당장은 모두가 행복해진다. 그만큼 국민들 지지도 얻을 수 있다. 그는 나라의 미래를 저당잡히고 부와 권력을 얻는다. 그런 권력은 오래가지 못하겠지만 그 나라에 미치는 미국의 힘은 갈수록 커진다.

부패하지 않거나 미국에 저항하는 정부는 골치덩어리다. 그런 나라들에는 ‘자칼’이 들어간다. 미국 석유회사들을 내쫓겠다고 공언했던 에콰도르의 대통령 하이메 롤도스는 헬리콥터 폭발사고로 숨졌다. 파나마 운하의 운영권을 미국에서 되찾아왔던 파나마의 대통령 오마르 토리호스 역시 비행기 사고로 숨졌다. 퍼킨스는 이들의 죽음에 미국 중앙정보국이 개입돼 있다고 주장한다.

‘자칼’마저도 실패하면 그때는 군대가 들어간다. 미국은 결국 1989년 파나마 침공을 감행한다. 사망자수는 미국 통계에 따르면 600명, 인권단체 통계에 따르면 5천명에 이른다. 마누엘 노리에가 대통령은 미국으로 끌려와 45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뒤 미국은 말 잘 듣는 꼭두각시 대통령을 앉혀놓고 파나마 운하를 지배하고 있다.

이라크 전쟁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라크는 사우디아라비아와 다른 길을 걸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넘쳐나는 돈으로 산업화를 계획했고 그 사업을 모두 미국 기업에게 맡겼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석유를 많이 팔면 팔수록 미국도 함께 돈을 벌었다. 그런데 이라크는 달랐다. 사담 후세인은 미국 정부와 거래하기를 거부했다.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버려두기에 이라크의 석유는 너무 엄청난 규모다. 미국은 9·11 테러를 전쟁의 구실로 삼았지만 정작 오사마 빈라덴을 배후지원한 사우디아라비아나 그가 숨어있는 아프가니스탄은 내버려뒀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재선사업이라는 구실로 기업들의 약탈이 시작됐다. 세계 최대 규모라는 이라크의 석유는 그렇게 미국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퍼킨스는 이라크 다음의 희생양이 베네수엘라가 될 거라고 전망한다. 베네수엘라는 세계 5위의 산유국이다. 미국은 그동안 해왔던 것처럼 이 나라에 엄청난 빚을 떠 안기고 약탈을 시작했다. 말 안듣는 대통령을 몰아내려고 반정부 시위를 배후 지원하거나 군대를 매수해 쿠데타를 계획하기도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이라크처럼 자칫 전쟁으로 치닫을 위험도 얼마든지 있다.

9·11 테러 때는 3천명이 죽었지만 세계적으로 날마다 2만4천명이 굶어서 죽는다. 가난은 더욱 확산된다. 30년 전에는 굶지 않았던 사람들이 이제는 굶는다. 퍼킨스는 그들의 죽음에 미국이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그의 딸과 그 딸의 아이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이 책을 썼다고 한다. 그들에게 지금보다 더 잔인하고 끔찍한 미래를 물려줄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나라도 미국 제국주의의 영향력 아래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엄청난 빚을 떠안았다가 모두 갚았다. 그러나 그 빚을 갚는 동안 우리 경제는 미국의 요구에 따라 신자유주의와 금융 세계화 구조를 받아들였다. 기업은 돈을 벌지만 일자리는 줄어들고 개인은 가난해지고 빈부격차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우리 사회의 부는 어디에서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이걸 성장이라고 부른다면 과연 누구를 위한 성장인가.

신자유주의가 추구하는 자유는 결국 기업의 자유다. 흔히 신자유주의를 시장의 새로운 질서라고 착각하지만 그 이면에는 자본의 식민 지배 음모가 숨어있다. 더 늦기 전에 그 음모를 꿰뚫어봐야 한다. 미국에 의존하는 성장 모델을 버리고 이제 미국 이후의 대안을 고민해야 한다. 2005년의 세계는 결코 간단하지 않다.

경제 저격수의 고백 / 존 퍼킨스 지음 / 김현정 옮김 / 황금가지 펴냄 / 1만5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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