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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은 전혀 래디컬하지 않다.”

Written by leejeonghwan

April 18, 2010

대학 거부 선언한 김예슬이 한국 진보에게 던지는 뼈 아픈 충고.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지난달 10일 한 대학생이 학교를 그만뒀다. 그것만으로는 특별한 일도 아니지만 그가 던진 메시지는 충격적이었다. 그는 국가와 대학과 시장을 적으로 규정했다. “일단 대학은 졸업하라”는 주변의 충고를 거부하고 자퇴를 선택한 그는 “작지만 균열이 시작됐다”며 “그래, 누가 더 강한지 두고 보자”고 선전포고까지 했다. 한 젊은이의 감상과 치기로 보기에 그 울림은 컸다.

이른바 ‘김예슬 선언’이 책으로 묶여 나왔다. 짧은 대자보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김예슬의 결기와 분노, 열정, 불안과 진지한 고민을 이 책에서 읽을 수 있다.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학점을 받아 좋은 회사에 취업하는 살아남은 소수를 위한 무한 경쟁에 그는 반기를 들었다. 그렇다고 그에게 현실적인 다른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대학 거부를 “공기처럼 파고드는 두려움과의 투쟁 과정”이라고 말한다.

대학을 나와도 취업이 어렵기 때문에 대학을 그만둔다? 혼자서 대학을 포기하든 거부하든 해 봐야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그러나 그는 “거짓과 더불어 제 정신으로 사느니 진실과 더불어 미친 듯이 사는 쪽을 선택하기로 했다”고 말한다. “그 첫 걸음이 대학 거부였다”는 이야기다. 대안이 뭐냐고 묻는 어른들에게 그는 “저항이 대안”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희망을 잃어버린 것은 헛된 희망에 사로잡혀서”라고 말한다.

그는 “어떻게 직업이 꿈일 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는 “‘되고 싶은 나’는 사실은 주류 사회에서 부추겨진 욕망이고 이미 자본에 의해 제공된 욕망”이라면서 “그 속에서 꾸는 꿈은 오염된 꿈”이라고 지적한다. 김예슬의 대학 거부는 ‘오염된 꿈’에 젊음을 바친 어른들에게 던지는 도발적인 비판이다. 그는 “그래서 나부터 멈춰서고 빠져 나오기로 결심했다”고 말한다. “다른 대안이 없다”고 말하는 어른들에게 그는 “대안이 왜 없느냐”고 감히 반문한다.

김예슬의 대학 거부 선언은 단순히 청년 실업과 비정규직, 이른바 ’88만원 세대’의 문제 차원을 넘어선다. 김예슬은 “우리를 88만원 세대로 부르지 말라”고 말한다. 88만원이 아니라 188만원을 받으면 문제가 해결되나. 실업자 대책을 늘리고 복지를 강화하면 되나. 세계 모든 나라들이 핀란드나 스위덴처럼 될 수 있나. 김예슬은 “그래서 다들 국민소득 3만달러를 목표로 하고 경제성장과 국익추구를 최우선의 가치로 두는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보수는 괴로워하지 않고 아이를 경쟁에 밀어 넣고 진보는 괴로워하면서 아이를 경쟁에 밀어 넣는다. 보수는 아이가 명문대생이기를 바라고 진보는 아이가 의식 있는 명문대생이기를 바란다. 도대체 그게 무슨 차이가 있나. 그래서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고 이건희는 유전무죄로 풀려나고 노동자들은 계속해서 길거리로 내몰리는 것 아닌가. 뭘 해도 성장은 해야 하기 때문에, 취업은 해야 하고 월급은 더 많이 받아야 하고.

김예슬은 “사람들은 나를 보고 극단적 선택을 했다고 말하지만 사실 우리가 당연한 듯 따르는 우리 자본주의의 현실이 정말로 극단적인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김예슬은 진보진영이 88만원 세대를 위해 뭘 했느냐고 뼈 아픈 질문을 던진다. 김예슬은 “그동안 수없이 들어온 ‘신자유주의 반대’나 ‘성찰’이나 ‘연대’ 같은 추상적인 구호들이 나에게는 마치 방언처럼 들렸다”고 말한다. “내 일상과 긴밀히 연계된 삶의 총체적 진보는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김예슬은 “우리 사회의 진보는 충분히 래디컬(급진적)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우리 사회의 진보는 근원적인 가치 투쟁에서 매일매일 패배한 듯이 보였다”면서 “그 결과가 탐욕의 포퓰리즘을 들고 나온 이명박 정부의 집권으로 귀결된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충분히 래디컬하지 못하기 때문에 쓸데없이 과격하고 위험하게 실용주의적이고 민망하게 투박하고 어이없이 분열적이고 놀랍도록 실적경쟁에 매달린다”는 지적도 의미심장하다.

진보진영은 김예슬 같은 학생들에게 아무런 꿈을 주지 못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고 집 없는 서민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 시대를 사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마찬가지였다. 일단 학교는 졸업하고 좋은 직장에 취업하고 최대한 많이 벌고 열심히 저축해서 살아남을 것. 그것 말고 다른 어떤 대안도 없다. 우리가 꿈꾸는 이념과 발을 딛고 있는 현실은 다른 것일까.

그런 의미에서 김예슬은 충분히 래디컬하다. 실체도 모호한 신자유주의를 적당히 말로 비판하기는 쉽지만 김예슬처럼 학벌만능 무한경쟁 시스템에 온몸으로 저항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는 “저항이 곧 대안”이라고 말한다. 탐욕을 공유하는 얼치기 진보가 아니라 지속가능한 삶의 정치, 배움의 정치, 실천의 정치가 필요할 때다. 진보진영은 김예슬 선언을 보면서 깊이 반성해야 한다.

(김예슬 선언 / 김예슬 지음 / 느린걸음 펴냄 / 7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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