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학교의 행복찾기’를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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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광야학에는 가끔 여러가지 사정으로 중고등학교 과정을 마치지 못한 아이들이 찾아온다. 야학의 학강들은 대부분 어른들이고 야학의 수업은 성인 재교육의 형태를 띤다. 그래서 사실 아이들은 부담스럽다. 우리는 결코 그 아이들의 중고등학교 시절을 대신해주지 못한다. 우리는 그 아이들을 다른 곳으로 돌려보내고 싶지만 마땅한 곳이 없다. 아이들은 야학의 수업에 적응하지 못한다. 1년에 두번 치르는 검정고시야 왠만하면 뚝딱 합격할 수 있지만 이 아이들에게 필요한건 그것만이 아니다.

야학 운동은 학습을 통해 현실의 문제를 넘어서려는 움직임이다. 우리는 먼저 우리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학습하는데 목표를 둔다. 현실을 넘어서려면 현실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안 이데올로기를 찾는 공동학습은 그 다음 단계다. 그래서 야학 수업의 상당시간은 주입식 교육으로 진행된다. 우리는 교육이 때로 주입식일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수업이 철저하게 효율적이고 과학적인 방식으로 진행되길 바란다. 학강들은 가능하면 빠른 시간 안에 정확하고 능숙하게 이차방정식을 푸는 방법을 배워야 하고 동사의 수동태를 이해해야 한다. 삼국시대 한강유역을 점령한 나라의 순서를 외워야 하고 그걸 중심으로 그때 역사를 다시 구성할 수 있어야 한다. 이해가 앞서야 하겠지만 가끔은 공식을 외워서 물체의 낙하속도와 낙하 시간을 계산할 수 있어야 한다. 오랜 시간을 들여 글과 문장에 익숙해져야 하겠지만 자음동화와 구개음화 따위도 가끔은 외워야 한다. 우리는 이런 공부들이 검정고시를 합격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하는 과정이 아니라 더 큰 공부를 하기 위해 반드시 밟아야 할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단계를 건너뛰고 해답만 던져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수업은 설익은 자아와 가치관을 명확히 하기 위한 기초 지식과 논리를 확립해 나가는 과정이다. 해석과 암기가 학습의 근간이고 그렇게 구체화한 개념들이 곧 사고와 인식의 기본이 된다. 야학에서 우리는 아래로부터의 변혁을 꿈꾼다. 민중은 현상에 대해 학습하고 판단을 내리고 서로와 의견을 교환하는 것만으로 사회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은 모두가 옳다고 생각하는대로 모두가 희망하는 대로 사회는 변화하게 될 것이다. 그 첫번째 작업이 우리에게는 수업이다. 수업이 바로 서야 학습 공동체도 가능하고 학습을 통한 사회변혁도 가능하다.

나는 야학의 강학들에게 쇼맨십을 버리라고 주문한다. 강학들은 종종 학강들이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신경쓰기보다 자신이 이 문제를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과시하려고 한다. 학강들은 마법처럼 문제가 풀리는 걸 지켜보고 강학에게 경외감 또는 열등감을 느끼지만 정작 문제의 해법은 이해하지 못한다. 강학들은 수업에서 종종 다분히 자기만족적인 이벤트를 벌인다. 영어 수업 시간에 팝송을 함께 따라부르거나 국어 시간에 난데없이 김지하의 ‘오적’을 가져다 읽거나 사회 시간에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토론을 벌이거나 하는 식이다. 문제의식도 좋고 변화의 모색도 좋지만 이런 이벤트들이 그야말로 이벤트에 그친다는게 문제다. 수업은 이벤트가 아니다. 잠깐의 이벤트도 좋지만 이벤트가 장기적으로 착실히 밟아 나가야 할 학습의 단계를 대체해서는 곤란하다.

그래서 나는 간디학교를 비롯한 이른바 대안학교들의 무모한 실험이 걱정스럽다. 간디학교에는 이벤트가 넘쳐난다. 넘쳐날뿐만 아니라 제도화돼 있기도 하다. 학생들은 마음에 드는 수업을 골라서 들을 수 있고 수업에서는 교과서를 덮어놓고 여러 사회 문제를 주제로 열띤 토론을 벌인다. 학생들은 오후 2시면 교과 수업을 끝내고 텃밭 가꾸기나 집 만들기, 디자인 공예, 표현 예술 등 감성교과와 노작수업을 한다. 오후 4시 방과후에는 뿔뿔이 흩어져 동아리 활동을 즐긴다. 교사들을 쌤이라고 부르면서 한 가족처럼 허물없이 지낸다. 수업시간이면 책상에 엎드려 있는 학생도 많다. 학생들은 불만을 숨기지 않는다. “아, 쌤! 그런게 어딨어요?” “참 피곤하게 만드네.”

과연 이런 수업이 자유롭고 주체적이며 전인적인 대안 교육의 과정일까. 간디학교의 학생들은 입시 교육의 억압에서 벗어나 있지만 동시에 체계적인 학습에서도 멀어져 있다. 교사들의 욕심은 학생들의 방종을 부추기고 현실을 애써 무시하도록 만든다. 학생들은 주체적이고 자유로워 보이지만 그건 간디학교 안에서만 그럴 수도 있다.

진학을 앞둔 3학년 학생들의 불안감을 교사들은 애써 무시한다. 일부 학생들과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방과후에 학원을 다녀야겠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시험이 다가오면 간디학교도 수업시간에 문제집을 푼다. 간디학교의 한계가 여기서 드러난다. 어떤 교사도 아이들의 일생을 책임질 수는 없지만 간디학교에서는 아이들의 일생을 걸고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실험의 심각성에 비춰볼 때 간디학교 교사들은 너무 감상적이다. 간디학교의 교육 목표는 “전인적인 인간, 공동체적인 인간, 자연과 조화된 인간”이다. 거창한 목표와 달리 실험은 중구난방이고 시행착오의 연속이다. 양희창 교장은 “행복한 학교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행복은 교사들의 행복일까, 학생들의 행복일까.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지만 교사들이 생각한 행복의 기준을 학생들에게 강요하고 있는 건 아닐까.

간디학교는 제도권 교육에 대한 반발일 수는 있지만 근본적인 대안은 아직 아니다. 간디학교가 모색하고 있는 대안은 우리 교육 현실이 안고 있는 구조적인 모순에 대한 정공법이 아니다. 막연한 이상에 기대어 다만 문제를 회피하고 무시하고 있을뿐이다. 간디학교의 문제인식은 지극히 감상적이고 철저하지 못하다. 시행착오가 필요하겠지만 수많은 학생들의 일생이 걸린만큼 그 대가는 너무 크다. 이 실험은 충분히 의미가 있지만 신중해야 하고 과학적이고 계획적이어야 한다. 교육은 이벤트가 아니다.

간디학교의 행복 찾기 / 여태전 지음 / 우리교육 펴냄 / 1만3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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