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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는 일본 경제, 이렇게 달라졌다’를 읽다.

Written by leejeonghwan

August 5, 2004

일본 경제는 과연 살아나고 있는가. 극단적인 비관론이 수그러드는가 싶더니 낙관론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고 있다. 일본의 올해 1분기 성장률은 무려 6.1%에 이른다. 일본 정부는 보란듯이 올해 성장률 전망을 1.8%에서 3.5%로 크게 높여 잡았다. 섣불리 장담하기는 이르지만 일본 경제의 분위기는 분명히 달라졌다. 수출과 설비투자, 소비가 모두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다. 낙관론은 이제 기대를 넘어 확신으로 자리잡는 분위기다. 주식시장에 돈이 몰려들고 당연히 주가도 가파르게 뛰어 오르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달라진 것일까. 반년 전만해도 일본 경제는 도저히 가망이 없어 보였다. 주식과 부동산 시장의 거품이 꺼지면서 10년째 최악의 경기 침체가 계속됐다. 금리를 낮춰도 소비가 살아나지 않았고 은행은 누적된 부실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정부가 국채를 발행하면서 재정 지출을 크게 늘렸지만 효과가 없었다. 오히려 눈덩이처럼 불어난 재정 적자가 경제 회복의 발목을 잡는 지경에 이르렀다. 일본 경제는 자칫 장기 디플레이션의 수렁으로 빠져들 것처럼 보였다.

다나카 나오키는 변화의 가장 큰 동력을 기업의 설비투자 회복에서 찾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설비투자 순환이다. 매출이 줄어들고 상품 가격이 떨어지는 심각한 경영 상황에서는 구조조정과 경영수지 개선이 해답이다. 그러나 구조조정의 결과 기업의 수익성이 어느 정도 회복되면 그때 비로소 설비투자에 눈을 돌리게 된다는 이야기다. 지난해가 바로 그랬다. 미래에 대한 투자를 더이상 미룰 수 없는 상황이었고 조금씩 설비투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주목할 부분은 특히 중소기업의 투자 확대다. 자본금 10억엔 이상의 기업들이 아직 주춤하고 있는 가운데 자본금 1억~10억엔 규모의 기업들은 지난해부터 차입금을 꾸준히 늘리고 있다. 10년의 불황을 겪으면서 생산 설비는 낙후될대로 낙후됐고 설비 투자를 하지 않고서는 더이상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물론 경제회복에 대한 기대감이 뒷받침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들은 이제 몸을 사리지 않는다. 설비투자는 적어도 앞으로 2년 가까이 계속될 전망이다.

문제는 중소기업에서 시작된 이런 설비투자 바람이 대기업까지 옮겨갈 수 있을 것인가다. 이 책의 전망은 여전히 긍정적이다. 동아시아 국가 대부분이 1997년의 통화위기에서 회복됐고 무엇보다도 중국의 놀라운 성장이 돋보인다. 일본 제조업 기업들이 새로운 시장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다. 이른바 동아시아와 일본의 공존 모델이다.

이 책은 중국의 성장이 더이상 일본 경제에 걸림돌이 안된다고 주장한다. 일본이 이미 차별화 전략에 성공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다. 값싼 노동력을 찾아 중국으로 떠났던 기업들은 결국 한계를 맞았다. 이제는 값싼 노동력이 아니라 기술력으로 승부해야 할 때다. 첨단 자동화 설비를 증설하는 기업이 늘어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일본 기업들은 이제 철저하게 고도의 기술집약 제품이나 공산품이지만 생산 사양이 간단한 것, 두 분야에 집중하고 나머지는 단계적으로 중국으로 돌리고 있다. 중국을 생산 거점이 아니라 수출 시장으로 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다.

더 긍정적인 전망은 정보기술 부문에서 나온다. 가계 소비가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다. 일본에서는 지난해 처음으로 액정 TV의 생산이 브라운관 방식 TV를 앞질렀다. 액정 TV의 판매 규모는 해마다 2배 이상 늘어나고 있다. 소니나 마쓰시타, 도시바는 잇따라 브라운관 방식 TV 생산을 철수하기로 했다. DVD나 디지털카메라의 판매도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이같은 소비 변화는 세계를 통털어 일본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가계 부문에서 변화를 선도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미국만 해도 아직까지 정보기술 거품의 후유증을 겪고 있는 상황이다.

은행이 자금을 풀고 있는 것도 주목된다. 지난 10년 동안 일본의 은행들은 대출을 줄이고 자기자본을 늘리는데 목을 매왔다. 그런 은행들이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돈을 풀기 시작했다. 경기가 회복되면서 부실채권은 우량자산이 되고 대손충당금은 특별이익이 됐다. 일본 경제를 억눌렀던 금융시장의 불안이 한꺼번에 사라진 셈이다.

이 책은 ‘잃어버린 10년’에 대한 일본 정부의 정책이 철저하게 실패했다고 지적한다. 자산 거품이 꺼지고 금융권이 천문학적인 부실을 떠안으면서 여신이 급격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기업은 유동성 확보에 목을 맸고 설비투자는 당연히 뒷전으로 물러났다. 그 과정에서 엔화 가치는 하락했고 자금은 해외로 빠져나갔다.

다나카 나오키는 1997년 이후의 경제 불안을 단순한 불황이 아니라 시스템 리스크라고 본다. 일본의 은행들은 그동안 기업의 사업전망이나 자금흐름을 보기 보다는 기업이 소유한 부동산의 가격을 봤다. 부동산 가격 하락이 필연적으로 은행의 부실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일본 정부는 그 부실을 공적자금으로 메우려고 했다.

결정적인 실수는 무작정 재정 지출을 확대해 인플레이션의 우려를 확산시킨데 있다. 올해 일본의 재정 세수는 42조엔, 국채 발행도 역시 42조엔이다. 세출을 조달하기 위해 세금이 절반, 국채 발행이 절반에 이른다는 이야기다. 결국 이러한 정부의 과도한 재정 지출이 화폐가치를 떨어뜨리고 물가 상승의 불안과 함께 투자 위축을 불러왔다고 볼 수 있다.

다나카 나오키의 주장에 따르면 변동환율제 아래서는 정부의 지출로 내수를 끌어올릴 수 없다. 그만큼 금리가 올라가고 해외 금융자본의 유입과 함께 통화 가치가 올라가면서 결국 수출이 줄어들게 된다.

만약 일본이 잃어버린 10년을 벗어난다면 그것은 결국 기업의 경쟁력에서 비롯한다고 볼 수 있다. 기업이 새로운 시장을 찾고 적극적으로 설비투자에 나서면서 내수가 늘어나고 부실이 줄어들면서 금융시장의 문제도 쉽게 해결되는 분위기다. 재고가 줄어들면 가격이 오르는 것처럼 구조조정이 끝나면 투자가 시작되고 경기가 회복된다.

물론 우리나라는 일본과 다르다. 금리도 아직 충분히 높고 물가도 상대적으로 안정적이다. 내수를 끌어올릴만한 수단이 충분히 남아있다는 이야기다. 주식과 부동산 시장의 거품도 우려할만한 수준은 아니다. 다만 문제는 IMF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구조조정이 충분히 진행됐는데도 여전히 투자가 살아나지 않고 있다는데 있다. 이 상황에서 구조조정을 강요하는 것은 위기를 조장하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하다. 일본에게는 있고 우리에게는 없는 것은 바로 경제주체들의 자신감과 미래에 대한 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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