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치도 양보하지 않는 꿈의 오디오, 뱅앤올룹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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뱅앤올룹슨의 CEO와 수석 디자이너가 신제품 TV의 두께 1인치를 놓고 신경전을 벌였던 일화는 이 회사의 고집스러운 디자인 철학을 단적으로 설명해준다. 베오비전 MX8000의 출시를 앞두고 있던 2003년 10월의 일이다. CEO인 톨번 소렌슨은 디자인에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지만 그때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그는 TV의 두께를 1인치만 늘려달라고 요구했다.

그는 HDTV와 호환을 위해 몇 가지 부품을 추가로 집어넣기 원했는데 두께를 조금 늘리면 제품의 수명도 늘어나고 무엇보다도 연간 1천만달러 정도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수석 디자이너 데이비드 루이스에게 비용 절감을 위해 디자인을 바꾸라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소렌슨과 루이스는 한 달 가까이 이 1인치를 놓고 논쟁을 계속했다.

결과는 어땠을까. 소렌슨이 결국 손을 들었다. “그래봐야 겨우 1천만달런데, 없었던 일로 합시다.” 대부분 다른 회사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결국 이 TV는 처음 루이스가 설계한대로 제작됐고 소렌슨은 늘어난 부담을 기꺼이 떠안았다. 뱅앤올룹슨의 디자인 순수주의 또는 결벽주의를 엿볼 수 있는 일화다.

소렌슨은 나중에 “1인치도 양보하지 않는 루이스의 고집이 오늘날 뱅앤올룹슨을 만들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내가 그때 고집을 꺾지 않았으면 우리의 디자인 철학은 무너졌겠죠. 소비자들이 뱅앤올룹슨 제품에 기꺼이 최고의 가격을 지불하는 것은 루이스가 1인치 더 두꺼운 TV를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천만달러를 날린 디자인 결벽주의.

뱅앤올룹슨은 덴마크의 명품 오디오 브랜드다. 전원이 들어와 작동할 때만 눈길을 끄는 다른 오디오나 비디오 기기와 달리 뱅앤올룹슨의 제품은 공간과 어우러져 독특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고정관념의 파괴, 감각적인 색상, 모던하고 세련된 디자인, 깊으면서도 투명한 음질이 꿈의 오디오라는 명성을 만든 경쟁력이다.

혁신적인 디자인으로 승부하는 뱅앤올룹슨에 단 한 명의 전속 디자이너도 없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모든 디자이너는 철저하게 아웃소싱을 한다. 1965년부터 뱅앤올룹슨의 디자인 작업에 참여해왔던 루이스 역시 코펜하겐에 별도의 사무실을 두고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다. 덴마크의 북쪽 스트루어에 위치한 뱅앤올룹슨 본사와는 350km나 떨어진 거리다.

루이스는 회의를 위해 매주 금요일에만 뱅앤올룹슨 본사에 들른다. “가능하면 회사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좋습니다. 그래야 마케팅이나 제작관련 부서의 압력을 무시하고 우스꽝스러운 아이디어들을 마음껏 만들어낼 수 있을 테니까요. 내가 맡은 역할은 이곳 사람들이 불가능한 도전을 할 수 있도록 바닥에 불을 지피는 것입니다.”

루이스의 도전적인 아이디어가 상업적인 성공으로 이어진 사례는 숱하게 많다. 1991년에 처음 출시돼 뱅앤올룹스의 최고 히트상품으로 떠오른 베오랩 8000의 경우도 그렇다. 콩깍지 안에 든 완두콩처럼 기다란 통에 10cm 직경의 작은 스피커들을 나란히 배치해 출력을 높이면서도 파격적이고 세련된 디자인을 선보였다.

그때도 제작부서에서는 모서리를 조금만 더 둥글게 설계해줄 것을 제안했지만 루이스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결국 뱅앤올룹슨의 연구부서는 오랜 연구 끝에 자연산 다이아몬드를 활용해 알루미늄을 날카롭게 접을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고 이 기술은 최근까지도 BMW나 아우디 등에서 자동차 부품을 만드는데 활용되고 있다. 디자인이 기술을 선도하는 경우다.

소렌슨을 비롯해 뱅앤올룹슨의 경영진은 아이디어를 채택하거나 거부하는데 의견을 제시할 수는 있지만 디자인에 개입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소렌슨은 오히려 디자인이 마케팅이나 제작관련 부서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데 최선을 다한다. 이 회사의 경쟁력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프리랜서 디자이너들과 뱅앤올룹슨의 기술자들이 만나 아이디어를 교환하는 아이디어랜드 역시 뱅앤올룹슨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조직이다. 디자이너들과 기술자들의 수평적인 의사소통을 돕는 컨셉 디벨로퍼라는 직책도 있다. 이곳에서는 수많은 아이디어들이 쏟아져 나오고 그 아이디어들이 결합돼 전혀 다른 아이디어들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예를 들어볼까요? 이동형 스피커를 만들고 거기에 라디오와 CD플레이어를 집어넣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완벽한 디자인의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 안테나를 숨기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작은 모터를 이용해 안테나를 집어넣었다가 필요할 때만 빼낼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제품이 바로 베오사운드 1입니다.”

디자이너들이 아이디어 개발과정에 참여하는 독특한 시스템, 이곳에서는 디자인이 아이디어를 낳고 아이디어가 디자인을 낳는다. 아이디어랜드 디렉터인 에이길 톰센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거의 없다”고 말한다. “꿈을 현실로 만드는데 필요한 기술을 개발하는 것, 그게 뱅앤올룹슨 아이디어랜드가 하는 일입니다.”

꿈을 현실로 만드는 기술.

고문실이라고 불리는 뱅앤올룹슨의 혹독한 품질 테스트도 주목할 만하다. 리모트 콘트롤 시스템인 베오 4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뱅앤올룹슨의 기술자들은 10년의 수명을 감안해 수십만번 이상 버튼을 누르는 실험을 통해 프린트가 벗겨지지 않는지 확인했다. 뜨거운 물은 물론이고 코카콜라와 세척제와 핸드로션, 휘발유를 끼얹는 실험도 거쳤다.

뱅앤올룹슨의 최고 히트 상품으로 꼽히는 베오랩 5는 스피커가 설치된 공간을 자동으로 분석해 최적의 저음을 찾아준다. 원뿔 모양의 디자인도 돋보인다. 풍뎅이 모양의 베오센터 2 역시 뱅앤올룹슨의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묻어나는 제품이다. 버튼을 누르면 날개 모양의 뚜껑이 양쪽으로 열리면서 CD 트레이가 올라온다. 벽에 걸어둘 수도 있고 스탠드 위에 세울 수도 있다.

6개의 CD를 한꺼번에 집어넣을 수 있는 베오사운드 9000은 뱅앤올룹슨의 대표적인 CD플레이어다. CD와 CD를 오가는 속도가 한 CD의 트랙 사이를 오가는 정도로 짧고 투명한 덮개로 CD를 전면에 드러내 어느 CD가 돌아가고 있는지 한눈에 살필 수 있다. 책장 위에 눕힐 수도 있고 수직이나 수평으로 세울 수도 있다.

이밖에도 CD 400장 분량의 대용량의 음악 파일을 저장할 수 있는 베오사운드 3200이나 파이프 오르간에서 영감을 받아 디자인된 베오랩 8000, 주사위 모양의 베오랩 3나 피라미드 모양의 베오랩 4 등도 뱅앤올룹슨에서만 볼 수 있는 파격적인 디자인과 기능의 제품들이다. 손을 가져가면 미끄러지듯 열리는 유리 덮개는 감탄이 터져 나올 정도다.

아우디와 손잡고 만든 카오디오 시스템은 자동차의 주행속도와 외부 바람소리, 노면 마찰음까지 고려해 14개의 스피커로 최상의 음질을 구현한다. 지난해에는 삼성전자와 손잡고 명품 휴대폰 세렌을 선보이기도 했다. 다이얼 전화기를 연상시키는 원형 키패드와 LCD 화면을 폴더 아래쪽에 배치한 파격적인 디자인이 돋보였다.

물론 최고의 디자인과 기능을 자랑하는만큼 가격도 만만치 않다. 지난해 8월 출시된 벽걸이형 PDP TV 베오비전 4의 경우 65인치 제품이 3800만원, 여기에 베오사운드 9000과 베오랩 시리즈 등을 제대로 갖추려면 9천만원에 이른다. 세계 최고의 가격이지만 안목있는 소비자들은 그 독특한 상상력과 군더더기 없는 디자인에 비용을 아끼지 않는다.

이정환 기자 top@leejeonghw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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