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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실 벤처 에스엔유 프리시젼의 성공 이야기.

Written by leejeonghwan

February 4, 2006

에스엔유 프리시젼은 특별한 회사다. 대학교 실험실 벤처로 출발한 이 작은 회사는 국내는 물론이고 미국과 일본, 대만 등 세계 굴지의 대기업들에 초정밀 계측장비를 납품하고 있는데 해마다 매출과 이익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세계시장 점유율이 73%에 이르고 매출액 대비 영업이익률이 32.6%, 1인당 순이익도 1억2500만원이나 된다. 대학 교수가 사업에 뛰어들어 세계시장을 무대로 성공하기까지의 과정과 그 성공 비결을 들어보고 대학과 기업의 연계, 산학협력의 현실과 과제를 고민해 본다.

다른 실험실 벤처들처럼 에스엔유 프리시젼도 처음에는 숱한 시행착오를 겪었다. 기술력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기술력만 갖고는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기도 했다. 1998년 창업한 이래 2001년까지는 매출도 거의 없었고 당연히 해마다 엄청난 적자를 냈다. 2002년에도 겨우 5천만원 정도 흑자를 냈을 뿐이다. 지금이야 추억일 뿐이지만 그 무렵이 박희재 사장에게는 가장 힘들었던 때였다.

“버는 건 없는데 월급날은 달마다 어김없이 돌아왔죠. 정말 피를 말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는 여기저기 돈 꾸러 다니는 게 일이었어요.” 에스엔유는 서울대 실험실 벤처 1호다. 기계항공공학부 교수인 박 사장이 학교 안 5평짜리 실험실에 간판을 내건 것이 그 시작이었다. (박 사장은 지금도 교수로 재직 중이다.) “돈 되는 연구를 해야 한다”던 박 사장 평소의 지론을 실천에 옮긴 셈이었는데 막상 현실의 벽은 결코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박 사장은 서울대 기계설계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맨체스터대학에서 광학 측정과 초정밀 설계 등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교수가 돼서 서울대에 돌아온 그는 창업 이전부터 산학협동 연구를 통해 기업과 연계를 꾸준히 모색해왔다. 수업에 들어가면 학생들에게도 “팔리지 않는 기술은 의미가 없다”고 설파해왔다. 그런 그가 창업 이후 처음 손을 댄 것은 광통신 부품인 ‘피그 테일’을 검사하는 계측장비였다.

물론 시장의 평가는 좋았다. 국내 대기업은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관심을 보였다. 그런데 제대로 판을 벌여보기도 전에 2000년 들어 정보기술 거품이 꺼지면서 광통신 산업 자체가 송두리째 무너져버렸다. 창업 이래 최대의 위기가 닥친 것이다. “정말 사업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했죠. 학교에서 학생들이나 잘 가르칠 걸 이게 웬 사서 고생이냐 싶었어요.” 그러나 박 사장은 물러설 수 없었다.

박 사장은 그때부터 학교 수업이 없는 날이면 출장 가방을 싸들고 해외 정보기술 전시회에 부지런히 얼굴을 내밀었다. 그 무렵 박 사장은 이미 기술자가 아니라 세일즈맨으로 변신해 있었다. 다행히 2002년 산업은행과 산은캐피탈, KTB네트워크 등에서 40억원을 투자받아 급한 불을 끌 수 있었다. 그러다가 그해 여름 대만에서 열렸던 한 광학기술 전시회에서 LG필립스LCD 관계자를 만났다. 그 만남이 결국 에스엔유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LG필립스LCD는 그때나 지금이나 초박막액정표시장치(TFT-LCD) 업계에서 삼성전자와 함께 세계 시장 점유율 1위를 놓고 다투는 기업이다. 박 사장이 LG와 손을 잡았을 때는 5세대 라인의 신규 설비투자가 막 시작되던 무렵이었다. TFT-LCD 산업에서는 유리기판의 크기로 세대 구분을 하는데 결국 얼마나 비용을 덜 들이고 더 넓은 유리기판을 더 빨리 더 많이 뽑아내느냐가 경쟁의 관건이다.

그때 LG필립스LCD의 고민은 유리기판이 커지면서 균일도를 맞추기가 갈수록 어렵게 된다는 것이었다. 불량률이 높아진다는 이야기다. 간단히 설명하면 TFT-LCD는 TFT유리기판과 컬러필터기판을 붙여서 만드는데 포토 스페이서라는 부품이 그 두 기판 사이에 들어가 일정한 간격을 만들게 된다. 높이가 10억분의 1미터 수준인데 이 높이가 일정해야 액정을 정확히 주입할 수 있고 그래야 균일도를 적정 수준으로 맞출 수 있다.

LG필립스LCD 입장에서는 최적의 사업 파트너를 만난 것이다. 에스엔유처럼 나노미터 수준의 측정과 설계 기술력을 갖춘 회사는 세계를 통틀어도 그리 많지 않다. 그동안에는 표본 조사로 불량품을 골라내는 정도가 최선이었는데 이제는 포토 스페이서의 높이를 실시간으로 측정해 최적의 액정 주입량을 산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장비를 포토 스페이서 측정 시스템, 줄여서 PSIS라고 한다. 이 PSIS가 에스엔유를 위기에서 건져낸 것이다.

LG필립스LCD는 에스엔유와 손을 잡으면서 생산수율이 80%까지 올라갔다. 수율이 1%만 올라가도 실적이 크게 개선된다. LG와 경쟁하던 다른 회사들도 앞다퉈 에스엔유와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PSIS는 생산라인마다 1대씩 들어가는데 지난해 기준으로 1대 가격은 평균 11억원 정도다. 에스엔유는 2003년 PSIS 하나만으로 78억6천만원의 매출을 올렸다. 매출은 2004년에 410억6천만원, 지난해에는 600억원(추정)으로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매출액보다 더 놀라운 것은 영업이익이다. 2004년 영업이익은 165억원으로 매출액 대비 영업이익률은 무려 40.2%에 이른다. 지난해 실적은 아직 정확히 집계되지 않았지만 3분기까지만 놓고 봐도 영업이익률이 여전히 32.6%나 된다. 유가증권시장과 코스닥을 통틀어도 이만큼 영업이익률이 높은 회사는 거의 없다. 지난해 당기순이익은 176억원으로 추정된다. 직원이 140명이니까 1년으로 치면 직원 1인당 1억2500만원 가까이 이익을 낸 셈이다.

“PSIS는 이제 세계적으로 TFT-LCD 생산라인의 표준 공정이 됐습니다. 5세대 이상 생산라인에서는 이 장비를 쓰지 않는 데가 없습니다. 물론 에스엔유가 아니었어도 다른 대안을 찾았겠지만 그만큼 시행착오와 오랜 시간이 필요했겠죠.” 박 사장의 설명에는 자신감이 묻어났다. 그도 그럴 것이 실험실 벤처에서 출발한 중소기업이 세계 TFT-LCD 산업을 평정한 것이다. 2004년 기준으로 에스엔유의 세계시장 점유율은 70%를 크게 웃돈다.

에스엔유가 시장을 개척한 이래 미국의 자이고나 일본의 다카노 같은 후발 경쟁업체들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아직은 에스엔유의 기술력을 따라오지 못한다. 특히 측정 범위나 수직해상도에서 에스엔유가 월등히 앞서 있고 측정에 걸리는 시간도 에스엔유가 훨씬 짧다. 일본의 TFT-LCD 회사들이 다카노를 제쳐놓고 우리나라의 에스엔유를 선택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에스엔유는 지난해 일본시장을 100% 석권했다.

에스엔유가 일본시장에 진입하기까지의 과정은 드라마틱하다. 박 사장이 일본의 모 업체를 찾아갔을 때다. “우리 식으로 치면 과장 정도 직급의 담당자가 설명을 듣더니 자신은 이해하겠는데 상급자인 부장이 반대를 할 거라는 거예요. 그래서 부장에게 설명을 다시 해달랍니다. 학교 수업 때문에 일단 들어왔다가 이틀 뒤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서 부장을 만났죠. 부장 역시 설명을 듣더니 자기네 이사에게 한번 더 설명을 해달라고 하더라고요.”

이들이 망설였던 이유는 단 하나, 에스엔유가 한국기업이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초정밀 측정장비를 한국기업에게 맡기느냐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에 대한 불신도 있었겠지만 기술대국 일본의 자존심도 한몫을 했다. 그러나 박 사장의 설명을 듣고는 다들 고개를 끄덕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부장과 이사, 부사장, 사장에게 몇차례 같은 설명을 되풀이하고 서울에 건너와 제품 검수까지 받고 난 뒤에야 겨우 계약이 이뤄졌다.

그때 그 일본회사 사장이 내뱉은 탄식이 이랬다. “한국의 대학이 여기까지 왔는데 도대체 일본의 대학은 어디서 뭘하고 있는가.” 박 사장은 일주일에 두 번, 수업할 때만 잠깐 서울에 건너왔다가 내내 일본에 머무르다시피 하면서 일본시장을 개척했다. 국내시장에 머무르기 보다는 세계시장을 한꺼번에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박 사장은 기술력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네트워크와 영업능력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절감했다.

그렇게 한군데가 뚫리고 나니 나머지는 일사천리로 계약이 이뤄졌다. 일본에서는 히다치와 NEC를 비롯해 DNP, ACTI 등 일본의 쟁쟁한 TFT-LCD 기업들이 잇따라 에스엔유의 PSIS를 도입했다. 우리나라에서는 LG필립스LCD와 S-LCD(삼성과 소니의 합작 기업), 동우STI, 하이디스, 대만에서는 AUO와 CPT, CMO, 한스타, 토폴리, 중국에서는 BOE-OT와 SVA-NEC 등이 모두 에스엔유의 고객이 됐다. PSIS 사업 개시 2년 만에 이룬 성과였다.

만약 박 사장이 대학의 실험실에 계속 머물러 있었으면 에스엔유의 성공 신화는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창업 이래 사업의 발판을 다지기까지 고통스러웠던 5년을 견디지 못했으면 지난해 600억원의 매출과 176억원의 당기순이익도 없었을 것이다. 박 사장의 신념은 분명하다. “아무리 훌륭한 기술력을 갖추고 있으면 뭘 합니까. 상품화하지 못하면 아무런 쓸모가 없어요. 팔리지 않는 기술, 기업이 원하지 않는 그런 기술을 뭐하러 배웁니까.”

박 사장은 서울대 학부와 대학원에서 각각 메카트로닉스와 정밀측정이라는 과목을 가르친다. 한 과목에 일주일에 세 시간씩, 다 해서 여섯 시간 밖에 안 되지만 박 사장의 강의는 늘 학생들에게 인기가 좋다. 다른 교수들에게 들을 수 없는 현장의 이야기가 많기 때문이다. 박 사장은 실험실의 대학원생들에게도 5년 뒤, 10년 뒤를 내다보고 실용화할 수 있는 연구를 하라고 주문한다.

에스엔유는 실험실 벤처가 갖는 장점을 최대한 활용한다. 대학의 실험실에서는 좀 더 장기적인 안목에서 원천기술을 개발하고 에스엔유의 연구실에서는 당장 기업에서 요구하는 실용적인 기술개발에 매달린다. 덕분에 박 사장을 지도교수로 둔 대학원생들은 취업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에스엔유에 취업할 수도 있고 대기업에서도 서로 모셔가려고 안달을 할 정도다. 에스엔유는 연구원들에게 국내 최고 수준의 연봉을 보장한다.

에스엔유는 산학협동의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꼽을 수 있다. 박 사장은 창업 이전에 한때 몇몇 중소기업에 기술이전을 추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중소기업이 직접 원천기술을 개발하고 상품화하는 데는 한계가 분명했다. 무엇보다도 낮은 인건비로는 실력 있는 연구 인력을 오래 잡아둘 수 없었고 기술개발도 번번이 벽에 부딪혔다. 박 사장이 나서서 직접 영업 매뉴얼까지 만들어 주기도 했지만 중소기업의 영세성을 넘어서는 데는 매번 실패했다.

박 사장이 직접 창업을 하고 사업에 뛰어든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차라리 직접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했던 거죠. 기술도 주고 영업도 도와주고 나중에 AS까지 떠맡아야 하는 상황인데다 그러고도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으니까요. 중소기업이 특정 대기업에 의존하지 않고 살아남기가 정말 어렵다는 걸 그때 절감했습니다. 가장 큰 걸림돌은 우수인력의 확보였고 대학의 지원으로 그 문제를 풀자고 생각했던 겁니다.”

에스엔유의 성공사례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관계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에스엔유는 특정 대기업에 매출의 대부분을 의존하는 여느 중소기업과 다르다. 기술력을 앞세워 압도적인 시장 점유율을 확보했고 이제는 세계적인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후발업체들과 저가 출혈경쟁을 할 이유도 없다. 경쟁력의 핵심은 누가 원천기술을 확보하고 있느냐, 그리고 누가 기업의 다양한 수요를 제대로 맞춰줄 수 있느냐였다.

에스엔유는 TFT-LCD 사업에 만족하지 않고 올해부터는 반도체 계측장비 등으로 사업영역을 다변화할 계획이다. 이미 지난해부터 매출이 일부 발생하기 시작했고 올해부터는 본 궤도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나노기술이 발전하면서 광학 측정과 초정밀 설계 분야에서 에스엔유의 사업영역도 무궁무진하게 넓어졌다. 박 사장은 2010년까지 매출액을 1조원으로 끌어올려 반도체장비 분야에서 세계 시장점유율 10위에 든다는 목표를 내걸었다.

에스엔유는 지난해 1월 코스닥 시장에 등록하면서 본격적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리게 됐다. ‘서울대 벤처 1호’라는 화려한 간판과 함께 놀라운 실적, 게다가 이른바 나노 테마까지 겹쳐 1조2천억원에 이르는 공모자금이 몰리기도 했다. 청약 경쟁률은 무려 938 대 1에 이르렀다. 이런 열기를 반영하듯 주가 또한 거래 첫날 공모가 2만7천원의 두 배인 5만4천원까지 뛰어올랐다. 그 뒤 사흘 연속 상한가를 기록하면서 8만2천원까지 치솟기도 했다.

에스엔유의 주가는 올해 들어 2월 3일 기준으로 3만7950원까지 빠져있는 상태다. 그러나 한국투자증권은 에스엔유의 6개월 목표주가를 여전히 7만3천원으로 잡고 있다. 민후식 연구원은 “올해 매출액을 831억원, 당기순이익을 253억원 정도로 보고 있는데 이 정도면 주가수익비율(PER)을 12.5배로 잡아도 대략 7만3천원은 충분히 된다”고 말했다. 성장성은 여전히 유효하고 지금 주가에서 두배 가까이 더 오를 수 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지난해부터 세계적으로 TFT-LCD의 설비투자는 크게 둔화되는 추세다. 그러나 민 연구원은 에스엔유의 경우 지난해 수준의 매출이 가능할 것으로 전망했다. 게다가 올해부터는 신규 사업부문의 매출도 기대된다. 민 연구원은 “지난해까지는 TFT-LCD가 매출의 99% 이상을 차지했지만 올해는 반도체 계측장비 쪽으로 매출이 다변화되면서 실적이 또 한 차례 업그레이드될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실험실을 박차고 나와 창립 8년째를 맞는 에스엔유는 올해 새로운 도전을 앞두고 있다. 3년 전 TFT-LCD 쪽에서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았던 것처럼 다시 새로운 사업영역을 발굴해야 하는 절박한 과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운이 따르기도 했지만 에스엔유의 성공은 무엇보다도 우수한 인력과 탄탄한 기술력 덕분이었다. 박 사장의 “팔리지 않는 기술은 의미가 없다”는 지론을 에스엔유의 지난 8년은 충분히 증명해 줬다.

박 사장은 “더 많은 대학 교수들이 사업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LG필립스LCD가 자체적으로 에스엔유의 기술력을 확보할 수 있을까요? LG 역시 훌륭한 기업이지만 쉽지는 않을 겁니다. 대학이 상아탑에 갇혀 안주할 게 아니라 산업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기업 역시 대학의 연구인력을 최대한 활용하는 게 좋을 겁니다. 여기에서 기술 혁신이 나오는 것이죠.”

이정환 기자 top@leejeonghwan.com


서울대 실험실 벤처 1호.

에스엔유프리시젼은 서울대 실험실 벤처 1호 기업이다. 회사 이름에서 ‘에스엔유(SNU)’는 당연히 ‘서울대(Seoul National Univercity’의 약자다. 굳이 회사 이름에 노골적으로 학교 이름을 집어넣은 것은 이 회사가 창업하던 무렵 함께 창업했던 서울대 실험실 벤처들이 모두 에스엔유를 회사 이름 앞에 집어넣은 관례를 따랐기 때문이다. ‘에스엔유 ○○○’ 하는 식으로 말이다.

직원들을 에스엔유를 농담삼아 ‘스마트(smart)와 뉴(new), 유니크(unique)’로 해석하기도 한다. ‘프리시젼(precision)’은 ‘정확함’ 또는 ‘정밀도’ 등의 뜻이다. 코스닥 시장에서는 줄여서 ‘에스엔유’라고 부르는 게 일반적이다. 그야말로 서울대를 대표하는 기업이 된 셈이다.

에스엔유는 1998년 2월 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 박희재 교수와 5명의 대학원생이 5평 규모의 실험실에 간판을 내걸면서 창업했다. 창업 자금은 5천만원, 그것도 박 교수와 서울대 동문들, 주변의 친척들이 십시일반해서 모았다. 에스엔유는 창업 이후 2001년까지 내내 적자를 내다가 2002년부터 흑자로 돌아섰다. 사업을 수주하고도 운전자금이 없어 공장을 못 돌리던 암담한 상황도 있었다.

그러다가 2002년 산업은행과 KTB네트워크에서 각각 10억원씩, 산은캐피털에서 20억원, 모두 40억원을 투자받으면서 겨우 숨통이 트였다. 이들은 모두 지난해 1월 코스닥 등록 이후 20여배에 이르는 시세차익을 챙겼다. 에스엔유의 시가총액은 한때 4500억원까지 늘어났고 박 교수의 지분도 한때 1천억원에 이르기도 했다. 박 교수는 이 가운데 80억원 상당을 서울대에 기증했고 서울대는 이 주식을 신탁해 박희재 연구기금을 설립했다.

에스엔유는 2003년 LG필립스LCD와 손잡고 TFT-LCD 생산라인에 들어갈 초정밀 계측장비를 개발해 본격적인 전성기를 맞게 된다. 2004년을 기준으로 세계시장 점유율이 73%에 이를 정도다. 지난해 600억원 매출에 176억원의 당기순이익을 기록했다. 지난해 12월 열렸던 이사회에서는 3%의 주식배당을 결의하기도 했다.

서울대 실험실 벤처는 에스엔유 말고도 마크로젠이나 바이오메드 등이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꼽힌다. 서울대 의대 서정선 교수가 세운 마크로젠은 유전자 이식 생쥐를 활용해 유전자 치료 등을 연구하고 있다. 서울대 생명과학부 김선영 교수가 1996년에 세운 바이오메드는 엄밀하게 말하면 에스엔유보다 더 원조라고 할 수 있다. 이 회사는 항암 치료제와 만성 육아종 치료제 등을 개발하고 있다.


인터뷰 / 박희재 에스엔유프리시젼 사장.

“팔리지 않는 기술은 죄악이다. / 대학이여, 현장에 뛰어들어라.”

박희재.
1961년 1월 27일 경기 김포 출생.
1983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기계설계학과 졸업.
1985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기계설계학과 공학석사.
1990년 영국 맨채스터대학 기계공학과 공학 박사.
1991년 3월~1993년 8월 포항공과대학 산업공학과 조교수.
1993년 9월~1997년 9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기계설계학과 조교수.
1997년 10월~현재 서울대학교 기계항공공학부 정교수.

1996년 5월 통상산업부 장관상.
2004년 9월 대한민국 은탑산업훈장.
2005년 5월 과학진흥유공자 표창.

박희재 사장이 1998년 2월 관악세무서에 사업자등록을 하러 갔을 때였다. 사업장 주소가 관악구 신림동 산 50-1번지로 돼 있는 걸 보고 세무서 직원이 서류를 퇴짜 놓았다. 상업용지가 아니라 학교 안에는 사업자등록을 내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박 사장은 세무서장에게 면담을 요청해 상황설명을 했다. 앞으로 우리 학교에서 수많은 벤처기업이 나올 거다. 그리고 그 가운데 세금을 왕창 내는 기업들도 있을 것이다. 사업자등록을 내달라.

박 사장의 설명이 먹혀들었던지 다행히 사업자등록은 금방 나왔다. 5평짜리 실험실 출입문에 조그맣게 간판을 내걸었고 직원은 박 사장과 대학원생 5명이 전부였다. 서울대 실험실 벤처 1호는 그렇게 탄생했다. 그리고 8년 뒤 에스엔유프리시젼은 실제로 관악세무서 관할구역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을 만큼 세금을 많이 내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지난해에는 모범납세 기업으로 표창을 받기도 했다. 그 사이에 직원수는 140명으로 늘었고 지난해 순이익은 176억원에 이른다.

박 사장은 에스엔유를 창업하기 전에도 100여건에 이르는 산학협동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다. 반도체는 물론이고 자동차와 중공업, 기계, 철강 등 거의 모든 산업분야에 걸쳐 수많은 기업과 손을 잡았다. 그러다가 1998년 IMF 외환위기를 맞으면서 생각을 달리하게 됐다. “공과대학 교수들 책임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외환위기의 원인은 사실 엄청난 규모의 무역역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부품소재산업에서 비롯했죠. 부품소재산업의 대일 무역적자만 200억원에 이를 정도였으니까요.”

박 사장은 논문이나 발표하고 후학이나 양성하면서 태평하게 지낼 때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부품소재산업의 수입 의존도를 줄이고 더 나아가서 해외 수출도 하자. 그게 외환위기를 이겨내기 위해 공대 교수들이 해야할 일이다. 그래서 교수와 사장의 험난한 투잡스가 시작됐다.

– 실험실 벤처가 갖는 장점은 무엇인가.
= 무엇보다도 대학에서 우수인력을 지속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다. 대학은 기업에서 현장정보를 얻을 수 있어서 좋다. 기업들이 뭘 원하는지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상호 윈윈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틈새 아이템을 찾아내고 연구의 방향을 정하는데도 도움이 된다. 또한 기업의 재정적 지원은 물론이고 고가 연구장비를 서로 공유할 수 있다. 우리처럼 중장기적 연구를 대학이 맡고 단기적 연구를 기업이 맡는 업무분담도 가능하게 된다. 물론 학부나 대학원생들의 취업에도 큰 도움이 된다. 우리 회사의 경우 직원 140명에다 70여개의 협력업체까지 하면 2천여명의 고용을 신규 창출한 셈이다.

– 국내 대학의 경쟁력은 어떤가. 에스엔유 같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기업이 또 나올 수 있다고 보나.
= 물론이다. 서울대뿐만 아니라 국내 유수 대학의 맨 파워는 매우 훌륭하다. 중요한 것은 이들의 맨 파워를 어떻게 개발하고 어떻게 상품화하느냐다. 수많은 우수인력이 상아탑에 갇혀서 그냥 썩어가고 있다. 거듭 강조하지만 팔리지 않는 기술은 의미가 없다. 이공계 위기라고들 하지만 이 인력들을 어떻게 잘 활용하느냐가 이공계 위기의 해법이 될 수 있다. 대학은 지금 시장의 수요에 대한 정보가 없고 정보가 있더라도 기업과 연계할 채널이 없다. 이게 진짜 위기다.

– 가장 어려웠던 때가 언제인가.
= 시장 예측에 실패하고 자금이 바닥났던 2002년이다. 정말 어려운 시절을 보냈고 구조조정도 했다. 만약 벤처캐피털에서 출자를 받지 못했으면 결국 문을 닫았을지도 모른다. 그때 투자한 벤처캐피털은 모두 20배 이상의 수익을 올렸는데 충분히 그만큼 받을 만했다고 본다.

– 교수직을 그만두지 않는 건 무슨 이유인가.
= 수업에 소홀할 것을 염려하는데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현장경험을 살려 더 충실한 수업을 할 수 있다. 대학과 회사 양쪽에서 시너지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본다. 무엇보다도 우리 회사 입장에서는 대학이 우수인력을 확보하는 통로가 된다.

– 기술력만 갖고는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그때 얻은 교훈이 뭔가.
= 이론은 실제와 다르다. 현장에서 원하는 이론과 원천기술을 만들어 내야 한다. 아무리 많은 논문을 쓴들 그게 현장에서 필요가 없으면 어디에 쓰겠는가. 감히 말하지만 팔리지 않는 기술은 죄악이다. 기술력뿐만 아니라 영업력과 정보,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우리나라 중소기업은 이게 너무 약하다.

– 에스엔유는 해외에서 열린 기술 전시회에서 기회를 잡았다고 했다. 그런데 국내 전시회는 그야말로 유명무실한 경우가 많은 것 같다.
= 맞다. 기업들이 뭐든 개발을 하면 요즘은 무조건 일본으로 들고 간다. 일본이 아니면 대만이나 LA, 샌프랜시스코로 간다. 국내 전시회에는 중요한 고객들이 안 오기 때문이다. 코엑스 같은 데 가보면 안다. 겨우 중고등학생들이나 견학 오는 수준이다. 그야말로 전시성 전시회다. 비즈니스 미팅이 전혀 이뤄지지 않는다. 오죽하면 국내 기업을 해외 전시회에서 만났겠는가. 중소기업을 육성시키려면 전시산업부터 전면 재정비해야 한다.

– LG필립스LCD와 손을 잡은 뒤 가장 먼저 일본을 공략했다. 이유가 뭔가.
= 일본 시장을 잡아야 세계 시장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떤 전시회에서 만난 일본 업체 관계자가 그러더라. 한국 기업은 기술력이 아무리 좋아도 품의롤 올려봐야 퇴짜 맞을 게 뻔하다고. 일본 기업들이 한국의 중소기업을 어떻게 보겠는가. 우리가 중국이나 방글라데시를 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래서 일본의 선발업체를 공략한 거다. 일단 한군데를 뚫고 나자 그 뒤에는 너무 쉬웠다.

– 국내 중소기업이 세계시장에서 성공하려면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 국내 시장이 이미 세계시장이다.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춰야 국내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 경쟁력이 없으면 국산을 써달라고 졸라봐야 먹히지 않는 시대가 됐다. 거꾸로 말하면 국내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면 세계 시장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스스로 한계를 지울 필요가 없다. 삼성이나 LG에 팔 수 있으면 세계 어디에도 팔 수 있다. 기술력이 없으면 영업력이라도 갖춰라. 세계 시장에서 승부를 걸어라.

– 지난해부터 TFT-LCD 산업의 설비투자가 주춤하는 추세다. 에스엔유의 올해 전망은 어떤가.
= 앞으로도 4~5년은 좋다고 본다. TFT-LCD만으로도 지난해 수준은 유지할 수 있다. 문제는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는 것이다. PDP나 유기EL, 반도체 쪽에서도 나노미터 수준의 계측장비에 대한 수요가 생길 거라고 본다. 반도체 쪽에서는 이미 지난해 말부터 매출이 발생했다. TFT-LCD 수준의 사업부문이 두세개 더 생긴다고 생각해 봐라. 사업전망은 매우 좋다. 2010년까지 매출 1조원, 반도체장비 업계 톱 10에 드는 게 목표다.

이정환 기자 top@leejeonghw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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