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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프’를 보다.

Written by leejeonghwan

April 13, 2005

일요일 저녁, 어설픈 도둑 2인조가 담을 넘어 들어온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 도둑들, 집을 잘못 들어온 것 같다. 할아버지부터 시작해 엄마, 아빠, 삼촌, 딸이 모두 무술깨나 한가닥하는 고수들, 무술 합계가 모두 117단이나 되는 집이다. 아닌 밤중에 신나고 통쾌한 도둑 잡기가 시작되고 도둑들은 한바탕 혼쭐이 난다. 줄거리는 간단하지만 관객들은 한시간 반 동안 조금도 긴장을 놓을 수 없다.

‘점프’는 상업적으로 성공한 몇 안되는 연극 가운데 하나다. 이 연극에서 임○○씨의 배역은 주정뱅이 삼촌이다. 백수에다가 늘 말썽만 일으키는 천덕꾸러기지만 벽을 타고 뛰어올라 공중에서 세바퀴 도는 재주가 있다. 술이 좀 되면 중국 영화에서 본 듯한 취권도 나온다. 이날 밤 도둑 잡기에서도 삼촌은 제대로 실력을 발휘한다.

이 연극이 상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건 배우들의 넘쳐나는 에너지 덕분이다. 물론 그 뒤에는 피나는 고된 훈련이 있다. 동작이 큰 연극이고 그만큼 힘들고 다치기도 많이 다친다고 한다. 하루 무대에 서면 이틀을 쉬어야 할 정도다. 그런데도 배우들은 끝까지 밝은 표정을 잃지 않는다. 이 연극에는 펄쩍펄쩍 살아 생동하는 에너지가 있다. 관객들은 머리털이 솟구치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나라에는 수십억원의 개런티를 주고 무대 장치까지 그대로 수입해다 쓰는 대형 뮤지컬과 파리만 날리고 배우들 급여조차 제대로 못주는 대학로 뒷골목 연극이 공존한다. 빈익빈 부익부의 척박한 문화 토양에서 ‘점프’의 성공은 그만큼 특별했다. 작품성이 떨어진다는 비판도 있지만 관객이 가득 들어차고 몇년씩 장기 공연하는 그런 연극이 결코 흔치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임씨를 비롯해 서른명 남짓의 배우들은 모두 비정규직 노동자다. 교통비 정도의 기본급이 조금 있고 한번 무대에 설 때마다 수당을 받는다. 아프기라도 해서 쉬게 되면 그만큼 수입도 줄어든다. 몇년씩 일한 배우들도 마찬가지다. 국민연금은 물론이고 의료보험이나 고용보험의 혜택도 없다. 다쳐도 산재보험은커녕 그대로 일자리를 잃게 된다.

어느 정도 상업적으로 성공하고 자리잡았다는 연극이 이렇다. 다른 극단의 사정은 훨씬 더 열악하다. 그만큼 이동도 잦고 생계도 늘 불안할 수밖에 없다. 지난해 연극협회 조사 결과에 따르면 연극배우 639명의 월평균 급여가 23만2000원 밖에 안됐다. 연봉으로치면 278만5000원 정도다.

“연습할 때는 수당이 없거나 조금 나오고 정작 무대에 오를 때도 대관료나 무대장치를 비롯해 온갖 비용을 빼고 인건비는 맨 나중에 계산하는 경우가 많죠. 흥행이 안되면 그마저도 못받는 경우도 있고 말이죠. 아무리 연극이 좋아서 무대에 선다지만 다들 생활 걱정이 많습니다.”

임씨는 연극하는 사람들도 노동자라는 인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아야 하고 그러려면 척박한 환경을 탓할 게 아니라 노동 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모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정부의 제도적인 지원도 필요하고 관객들의 변화도 필요하다.

“그래야 좋은 배우가 나오고 좋은 연극도 나올 수 있습니다. 연극협회 등에서 좀더 조직적인 대안을 고민해볼 수도 있겠지요. 이제 배우들을 비롯해 예술인들도 노동의 정당한 가치를 인정받아야 합니다.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찾아야 한다는 겁니다. 월간 ‘말’도 관심을 갖고 나서주시죠.”

(임한창은 동생의 고등학교 연극반 후배다. ‘점프’를 그만두고 ‘난타’로 옮겨갈 계획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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