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세상은 가능하다, 이정환닷컴!

‘빈 집’을 보다.

Written by leejeonghwan

September 29, 2004

김기덕의 영화는 대개 끔찍하다. 이를테면 살인의 예감 같은 것이다. 의도하지 않게 누군가를 죽여야 하는 상황, 또는 죽이는 상황, 그리고 파국. 강간을 하거나 강간을 당하고 미치거나 낚시 바늘을 집어삼키기도 한다. 김기덕의 영화가 끔찍한 것은 그런 파국이 일상적인 것처럼 비춰지기 때문이다. 터무니없는 상상이지만 김기덕은 그런 상상을 그대로 영화에 담아낸다.

‘빈 집’의 끔찍함은 좀더 교묘하다. (아래는 스포일러는 아니지만 줄거리를 전혀 모르고 보는게 더 좋을 수도 있다.)

주인공 남자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당연히 이름도 없다. 그는 말쑥한데다 꽤나 비싸보이는 BMW 모터싸이클을 몰고 다니지만 집이 없다. 그는 여기저기 다른 사람들의 빈 집에 들어가 산다.

중국집이나 통닭집 따위 홍보 전단을 집집마다 대문에 붙여놓고 몇일 뒤까지 그대로 붙어 있는 집을 찾아 문을 따고 들어간다. 그는 그 빈 집에서 샤워를 하고 밥을 차려 먹고 잠옷을 꺼내 입고 아무 칫솔이나 골라 이빨도 닦는다. 그가 찾는 집 가운데는 부자의 집도 있고 가난한 집도 있다.

물론 언제든지 갑자기 집 주인이 들이닥칠 수 있다. 주인공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어슬렁거리지만 지켜보는 관객은 불편하다. 관객들은 이 남자가 물건을 훔치거나 강간을 하거나 죽이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다. 불편함의 정체는 파국의 예감이다. 집주인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무슨 일이든 벌어진다. 그럴 가능성은 굉장히 크다. 관객들에게 그것은 여전히 낯설고 끔찍한 경험이다.

김기덕은 노골적으로 이 남자가 많이 배웠고 전과도 없다는 사실을 관객들에게 알려준다. 이 남자는 성적으로 무관심하고 주인공 남녀는 심지어 잘 때도 손만 잡고 잔다. 이를테면 이 남자는 도덕적이거나 위선적인 당신일 수도 있다는 암시다. 김기덕의 다른 영화들보다 이 영화는 일상의 영역에 좀더 깊숙히 파고들고 있다.

주인공 여자의 이름은 선화다. 남편에게 늘 두둘겨 맞는 선화는 주인공 남자를 따라 나서고 둘의 기묘한 여행이 시작된다. 영화의 나머지 절반은 참신하기는 하지만 대부분 시시하고 꽤나 유치하다. 상징은 어설프고 작위적이다. 김기덕 특유의 유머가 그나마 돋보인다.

궁금하고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외국 영화 평론가들의 눈부신 찬사다. 이 영화는 9월 12일 베니스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다. 10월 15일 개봉할 예정이다.

.

www.leejeonghwan.com

Related Articles

Related

영화 ‘죽는 자를 위한 기도’.

영화 ‘죽는 자를 위한 기도’.

10년도 훨씬 전에 '주말의 명화'에서 봤던 영화다. 기억을 더듬어 한참을 찾았는데 DVD 따위는 아예 없고 어렵사리 토런트에서 내려 받아 영어 자막으로 다시 봤다. 미키 루크가 권투에 다시 빠져들기 전, 살인 미소를 흘리고 다니던 무렵의 영화다. 마틴은 아일랜드 해방군의 테러리스트다. 경찰에 쫓기다가 원치 않은 살인 청부를 떠맡은 마틴은 살인 현장을 한 신부에게 들키고 만다. 그는 신부에게 총을 겨눴다가 그냥 돌려 보낸다. 그 뒤 마틴은 성당으로 숨어들어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액스, 취업에 관한 위험한 안내서.

액스, 취업에 관한 위험한 안내서.

(줄거리를 미리 알고 보면 재미없을 수도 있습니다.) 브뤼노 다베르는 어느날 갑자기 직장에서 쫓겨난다. 그리고 2년 반이 흘렀다. 어느날 온 가족이 모여 TV를 보는데 아들이 말한다. "우리 아빠도 저런데서 일해야 되는데." 브뤼노는 중얼거린다. 저 친구가 내가 할 일을 대신하고 있군. 그날 저녁 브뤼노는 위험한 계획을 떠올린다. 내 경쟁자가 과연 몇명이나 되는지 알아야겠어. 브뤼노는 다음날 잡지에 가짜 구인 광고를 낸다. 사서함에 경쟁자들의 이력서가 가득 쌓인다. 브뤼노는...

영화 ‘디바’.

영화 ‘디바’.

장 자끄 베넥스의 1981년 영화로 이른바 누벨 이마쥬의 대표 작품으로 꼽힌다. 이미지만 강조한 현실 도피적인 영화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사실 그렇지 않은 영화가 또 얼마나 되나. 나는 이 영화를 10번쯤 봤다. 여기 두 개의 테이프가 있다. 하나는 소프라노 신시아 호킨스의 공연 실황을 몰래 녹음한 테이프고 다른 하나는 인신매매 조직에 개입한 장 사포르타 경감의 비리를 폭로하는 내용의 테이프다. 영화가 시작되면 알프레도 카탈리니의 오페라 '라 왈리' 가운데 '나는 멀리 떠나야...

더 나은 세상은 가능하다, 이정환닷컴!

Join

Subscribe For Updates.

이정환닷컴 뉴스레터를 구독하세요.

.

www.leejeonghw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