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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나이 견문록.

Written by leejeonghwan

February 6, 2008

브루나이(Negara Brunei Darussalam, برني دارالسلام)는 동남아시아 보르네오 섬 북서 해안에 있는 작은 나라다. 말레이시아에 둘러 싸여 있으면서 나라가 동서로 나뉘어 있다. 서쪽에 수도 반다르세르베가완이 있고 동쪽은 산악과 정글 지대다. 1888년부터 영국의 식민지로 있다가 1984년에 독립했다.

브루나이의 인구는 34만명. 면적은 5765㎢으로 제주도의 3배 정도 밖에 안 된다. 대부분의 공산품은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말레이시아어가 공용어지만 영어와 중국어가 모두 통한다.


브루나이가 싱가포르에 이어 동남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잘 사는 나라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원유와 천연가스 덕분인데 구매력 평가 기준 1인당 국민소득이 2만4143달러로 세계 28위에 이른다. 참고로 우리나라는 2만590달러로 33위다. 그러나 2%도 안 되는 왕족이 부를 독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빈부격차가 매우 크다. 반다르세르베가완 인구의 절반이 캄퐁 아예르(Kampong Ayer)라고 부르는 수상가옥에 살고 있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세계 석유 매장량의 1.8%가 브루나이 앞 바다에 매장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 나라 사람들은 세금을 전혀 내지 않는다. 학교도 전액 무료, 병원도 1브루나이달러의 등록비만 내면 무료다. 60세부터는 연금이 지급되는데 역시 전액 나라에서 지원된다. 국민의 80%가 왕이 주는 월급을 받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물론 최근에는 자원 고갈을 대비해 복지 규모를 축소해야 한다는 위기의식이 확산되는 분위기다. 복지 규모를 축소하기에 앞서 왕족의 사치를 줄이는 게 우선이겠지만 그런 문제의식은 아직 찾아보기 어렵다. 황금을 발라 만든(금 도금이 아니다!!) 거대한 이슬람 사원 키아롱(Kiaron)과 방이 1788개에 이르는(기네스북에 올랐다고 한다) 왕궁 누룰 이만(Istana Nurul Iman) 등은 이 나라의 후진적인 지배구조를 엿볼 수 있는 한 단면이다. 국왕 소유의 자동차만 5천대에 이른다고 한다.

수상가옥은 태국이나 베트남, 캄보디아에서도 봤지만 이 나라의 캄퐁 아예르는 단연 세계 최대 규모다. 선착장 주변에 고급 승용차들이 늘어서 있는 것도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이었다. 이 사람들은 모터보트를 타고 선착장까지 나와서 자가용을 타고 출근한다. 자가용을 살 돈으로 왜 뭍으로 나가지 않는 것일까.

모든 집들은 다리로 서로 연결돼 있다. 병원과 학교, 관공서도 모두 물위에 있다. 흔들거리는 다리를 아슬아슬 건너는데 하얀 교복을 입은 어린애들이 손을 흔들면서 영어로 말을 걸어오기도 했다. 집집마다 전기와 상하수도는 물론이고 에어컨과 TV 시청을 위한 위성 안테나까지 달려 있었다. 정화시설을 갖춘 곳은 많지 않아서 용변을 보면 그대로 바다에 흘러 들어간다.

캄퐁 아예르는 수천년을 이어 내려온 이 나라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다. 자기 소유의 땅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바다에 말뚝을 박고 길을 내가면서 마을을 넓혀 왔을 것이다. 세계에서 28번째로 잘 사는 나라가 된 아직까지도 이 사람들은 바다 위에서 사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긴다. 헐리우드 배우들에게 수십억원짜리 선물을 건네는 정신나간 왕족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세하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보트가 기다리고 있었고 시간이 많지 않았다.

반다르 시내는 싱가포르와 비슷하다. 도로도 잘 정비돼 있고 휴지 하나 없이 깨끗하다. 다만 대중 교통이 거의 없어 18세 이상이면 모두 자기 차를 갖고 있다. 집집마다 차가 두세대는 기본이라고 한다. 여행자들은 활동반경이 좁을 수밖에 없다. 말레이시아 라부안을 다녀오려고 했는데 멀기도 하고 가봐야 볼 것도 없다는 말에 포기했다.

관광객들에게 가장 큰 인기를 끄는 곳은 두바이의 버즈알아랍과 함께 세계에서 2개 밖에 없다는 7성급 호텔인 엠파이어호텔이다. 왕의 동생이 우리 돈으로 3조원을 들여 만들었다는 이 호텔은 30m가 넘는 대리석 기둥에 황금 장식(역시 도금이 아니라 직접 금을 발라 입힌 것이다)으로 관광객들을 압도한다. 석양 무렵 발코니에 서면 붉게 타는 남중국해가 내려다 보인다. 객실에는 본차이나와 은수저가 비치돼 있다. 원래 왕족만 이용할 계획으로 지었지만 IMF 외환위기가 겹친데다 엄청난 운영비가 부담스러워 일반인들에게도 개방하기로 했다고 한다. 엠파이어스위트룸은 하루 숙박비가 1500만원에 이른다.

브루나이를 찾은 때는 1월31일, 우리나라는 한 겨울이지만 북위 4도의 이곳은 낮이면 반팔 티셔츠를 입고도 땀으로 흠뻑 적실 정도의 한 여름 날씨였다.

템부롱 정글로 들어가려면 반다르에서 고속 보트를 타고 40분 가량, 그리고 차를 타고 20분 가량, 공원관리사무소에서 다시 바나나보트를 타고 30분 이상 강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바나나 보트는 5명이 한줄로 타게 돼 있다. 비가 꽤 오래 안 온 뒤라 수심은 1미터도 채 안 됐지만 배가 심하게 출렁거려 처음에는 카메라를 들지 못할 정도로 불안했다.

정글 투어라고 해서 커다란 칼을 휘두르면서 울창한 잡목 숲을 헤치고 지나가는 험난한 코스를 생각했는데 의외로 산행은 평탄하고 어렵지 않았다. 처음 듣는 새 소리와 벌레 소리들이 울려퍼졌다. 힘들다기 보다는 낯설고 황망다는 느낌, 지금까지 본 적 없었던 커다란 곤충들이 눈앞을 가로질러 날아갔다. 나무 계단을 타고 한참 올라가면 42m 높이의 철탑이 나타난다. 세계 최장의 캐노피워크(canopy walk)라는데 한눈에 봐도 아슬아슬해 보였다. 모두 5층으로 돼 있고 안전을 위해 한 층에 2명 이상 올라가지 못하도록 돼 있다. 한 사람이 올라갔다 내려오는데 넉넉히 30분 정도. 아마도 관광객이 많아지면 문제가 생길 듯.

수많은 계단을 타고 꼭대기에 오르니 멀리 말레이시아 키나발루 산이 올려다 보였다. 철탑은 바람이 불 때마다 휘청거렸다. 하늘에 붕 떠 있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공기는 축축하고 후덥지근했고 나무들은 치렁치렁 잎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가도 가도 끝없는 푸른 정글이라 딱히 멋있다고 할 수 없는 풍경이었지만 음험한 원시의 에너지가 느껴졌다. 나는 맹글로브 나무에 앉은 딱정벌레라도 된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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