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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 풀려나셨다.” 만세 부르는 언론.

Written by leejeonghwan

September 7, 2007

정의가 땅에 떨어졌다. 횡령과 배임 혐의로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던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이 항소심에서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 재판부는 파격적인 판결이 멋쩍었던지 신문기고와 강연 등의 사회봉사 명령을 내렸다. 고질적인 유전무죄 판결이지만 이를 비판하고 바로 잡아야 할 언론의 시각은 솜방망이 판결만큼이나 관대하기만 하다. 일부 언론은 오히려 “족쇄가 풀렸다”느니 “감옥이 능사가 아니라”느니 “현대기아차의 글로벌 경영에 탄력이 붙었다”느니 쌍수를 들어 환영하는 분위기다.

중앙일보는 6면 머리기사에서 이번 재판을 담당한 이재홍 부장판사의 말을 옮겨 “돈 많은 사람, 돈으로 사회공헌”이라는 경악할만한 제목을 뽑았다. 중앙은 “거액의 사회공헌기금을 내라고 판결문에 명시, 정 회장에게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하면서 집행유예 선고에 대한 일각의 비난을 완화라려는 의도”라고 평가했다.

중앙은 1면 머리기사에서는 “감옥이 능사 아니다, 실질적 죗값 치러야 한다”는 제목을 뽑기도 했다. 중앙은 관대한 판결에 대한 이 부장판사의 구구절절한 설명을 비중 있게 옮겼다. “우리나라 경제에서 현대차의 파급 효과는 상당하다”거나 “미국에서는 엔론 같은 회사가 20개 부도나도 끄덕없지만 엔론은 이미 죽은 회사였고 현대차는 살아있는 회사다”, “재능 있는 사람은 재능으로, 돈이 많은 사람은 돈으로 사회에 실질적인 공헌을 하게 하는 게 진정한 사회봉사명령이다” 등등.

한국경제는 아예 현대차의 사보가 아닌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1면 머리기사에서 “정몽구 현대차 회장 다시 뛴다”는 제목 아래 “글로벌 톱 5를 향해 다시 뛸 수 있게 됐다”면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현대차가 우리 사회에 미치는 경제적 효과가 막대하고 정 회장은 현대차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이 부장판사의 말을 옮기기도 했다.

한경은 5면을 털어 현대차 그룹의 분위기를 자세하게 전했다. “정 회장이 기업인으로 사회적 소명을 성실히 수행하겠다는 재다짐을 한 것”이라거나 현대차 임직원들의 말을 인용, “이제야 기나긴 터널에서 빠져 나온 것 같다”고 전하기도 했고 “협력사와 상생 협력을 통해 고용 창출 확대와 수출 증진, 선진 기술 지원 등에 지속적으로 매진하는 방안을 마련하게 될 것”이라는 등 낯 뜨거운 찬사를 잔뜩 늘어놓았다.

매일경제는 잔뜩 흥분한 한국경제보다는 좀 더 침착한 태도를 보였다. 그냥 지나치기는 멋쩍은 듯, 재판 결과를 두고 “다소 논란이 예상된다”고 지적한 부분이 눈길을 끈다.

서울경제나 파이낸셜뉴스 등 다른 경제지들도 논조는 비슷했다. 파이낸셜은 현대차 관계자의 말을 인용, “중국 시장에 이상 기운이 감지됐지만 정 회장이 발목을 잡혀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다”며 족쇄가 풀린만큼 조만간 중국 시장에서 낭보가 날아올 것”이라고 전했다.

국민일보는 13면 머리기사에서 “현대기아차 일단 큰 고비를 넘겼다”고 제목을 뽑았다. 재판 결과를 둘러싼 논란은 거의 언급이 없고 다만 “유죄를 인정하면서도 집행유예를 선고, 정 회장과 현대기아차에 반성할 기회를 줬다”고 애매모호한 평가를 내렸다.

가장 비판적인 논조를 보인 곳은 한겨레였다.

한겨레는 1면 머리기사에서 “재벌 봐주기 집유… 정몽구 회장 웃었다”고 제목을 뽑고 실제로 웃고 있는 정 회장의 사진을 실었다. 한겨레는 “법원이 유독 재벌에 관대하다는 비판이 또 나오고 있다”면서 비판의 날을 세웠다.

한겨레는 3면에서 익명의 변호사의 말을 인용, “돈 많은 사람에게 돈을 내놓으라고 하는 것은 사회봉사명령의 취지에 반하는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강연과 신문 기고에 대해서도 “사회봉사가 부하 직원들의 몫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어떻게 하면 죄짓고 빠져나올 수 있는지 기법이라도 전수하려는 것이냐”는 김형탁 민주노동당 대변인의 말을 인용한데 이어 해설 기사에서 “회장이 구속되면 부도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는 논리는 황제경영의 폐해를 그대로 인정한 것이어서 논란이 예상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서울신문은 “기부가 사회봉사? 재벌 봐주기 논란”이라고 제목을 뽑았다. 인터넷 기사에서는 이번 재판과 대상그룹 임창욱 회장의 재판 결과를 비교해 눈길을 끌었는데 배달판에서는 이 부분이 삭제됐다. 임 회장은 219억원을 횡령했다가 1심에서 징역 4년, 항소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1년 7개월 동안 복역 끝에 올해 2월 사면을 받고 풀려난 바 있다. 정 회장이 2개월만에 보석으로 풀려나 결국 집행유예 판결을 받은 것과 비교된다.

이번 재판 결과에 대한 언론 보도는 ‘총수=기업’이라는 퇴행적인 사고방식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 우리 언론의 현 주소를 그대로 드러냈다. 2000억원 이상의 범죄를 저지르고도 기부금만 내면 풀려나는 어처구니 없는 현실을 우리 언론은 제대로 비판하지 못했다. 땅에 떨어진 사법 정의만큼이나 개탄스러운 현실이다.

경제개혁연대는 5일 “돈으로 산 집행유예, 돈 앞에 무릎 꿇은 사법정의”라는 제목의 논평을 내고 재판 결과를 강력하게 비난했다. 경제개혁연대는 “법원이 판결문에서 어떠한 수사를 동원하여 합리화했든, 이번 집행유예 선고는 정몽구 회장의 재력으로 이루어진 것에 다름 아니”라고 주장했다.

기억이 가물가물한 독자들을 위해 이번 사건을 다시 정리하자면 이렇다.

정 회장의 죄목은 크게 횡령과 배임이다. 정 회장은 2000년 4월∼2006년 3월, 비자금 1034억원을 조성해 696억원을 횡령하고 역외펀드 수익 1830만 달러를 횡령하는 등 900억원대 회사 자금을 횡령했다. 본텍을 계열사로 편입하는 과정에서 3자 배정 유상증자를 실시해 아들 의선씨와 글로비스에 실제 가치보다 훨씬 미달하는 가격에 신주를 배정해 이익을 준 동시에 지배주주인 기아차에 손해를 떠넘겼다.

또 청산이 예정돼 있던 현대우주항공 채무에 대한 정 회장 개인의 연대보증 책임을 면하기 위해 계열사들을 유상증자에 참여시켰고 자금난을 겪던 현대강관이 유상증자를 하자 손실이 예상되는데도 역외펀드를 설립해 현대차와 현대중공업 등을 증자에 참여시켜 손해를 끼쳤다. 횡령과 배임의 전체 규모는 모두 2100억원대에 이른다.

정 회장은 지난해 4월 구속 수감됐다가 두 달 만에 보석 신청이 받아들여져 풀려났고 올해 3월 1심 재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6일 항소심 재판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그리고 사회봉사활동을 명령 받았다. 2100억원에 이르는 배임과 횡령의 규모로 볼 때 정 회장의 집행유예는 이례적인 판결이다. 사회공헌기금과 강연, 언론 기고 등의 사회봉사활동 명령 역시 전례가 없다.

이정환 기자 top@leejeonghw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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