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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패러디의 자유를 달라.

Written by leejeonghwan

July 18, 2007

올해 3월 미국에서는 74초짜리 짧은 동영상 하나가 정치권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동영상의 내용은 이렇다.

머리를 짧게 깎은 무표정한 사람들이 음침한 통로를 따라 줄을 맞춰 걸어간다. 방송에서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계속 흘러나온다. 장면이 바뀌면 사람들이 나란히 의자에 앉아 방송을 보고 있다. 그리고 다음 장면, 카메라가 커다란 화면을 비추는데 그는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 대통령 선거 경선을 앞두고 있는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이다.

분위기는 언뜻 2차 세계대전 무렵 유태인 수용소를 연상시킨다. 딱딱하게 굳은 힐러리의 모습은 익숙하면서도 어딘가 낯설다. 그때 한 여성이 커다란 망치를 들고 뛰어 들어온다. 그 뒤를 무장한 경찰들이 따른다. 방송은 여전히 계속되고 여성은 망치를 빙빙 돌리다가 화면을 향해 집어던진다. 망치가 부딪히는 순간, 화면이 하얗게 부서지면서 끝난다.

흥미로운 것은 그 다음 장면이다. 텅 빈 화면 위로 “1월 18일, 진짜 민주주의가 시작된다. 2008년은 ‘1984년’과 다를 것이다.”라는 자막이 뜬다. 그때서야 우리는 이 동영상이 조지 오웰의 ‘1984년’을 패러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힐러리가 빅 브라더라면 수용소의 사람들은 바로 미국 국민들인 셈이다. 이 동영상의 이미지는 너무나도 강렬했다.

힐러리와 애플, 1984년.

이 동영상이 거센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건 힐러리의 가장 강력한 경쟁상대인 브락 오바마 상원의원이 관련돼 있었기 때문이다. 동영상 맨 마지막에 오바마의 홈페이지 주소가 실려 있었던 것. 오바마는 즉각 “우리와는 관계 없는 일”이라고 성명을 발표했는데 며칠 지나지 않아 동영상의 제작자가 오바마 캠프에서 일하는 직원인 것으로 드러났다.

필립 벨리스라는 직원이 나서서 “업무 시간 이후 개인적으로 한 일일뿐 오바마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해명했지만 논란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이 직원은 결국 사표를 냈다. 동영상 파문은 자칫 정치 공세로 비화될 조짐까지 보였다. 이 동영상은 2주만에 150만명이 내려 받았고 힐러리의 이미지에 치명적인 손상을 안겨줬다.

상당히 공격적인 패러디였지만 힐러리는 공식적인 대응을 자제했다. 가뜩이나 딱딱한 독재자의 이미지가 굳어진 뒤라 유화적인 제스춰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때문이다. 한 방송사와 인터뷰에서는 “정치에 무관심한 젊은 계층이 이 동영상을 보고 정치에 관심을 가진다면 행복하겠다”고 애써 표정관리까지 했다.

언론의 자유를 파격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미국에서는 이런 종류의 동영상을 규제할 방법이 없다. 이 동영상은 1984년 애플이 새로운 맥킨토시 컴퓨터를 선보이면서 만든 광고를 살짝 변형한 것이다. 원작이 워낙 훌륭했기 때문에 패러디의 완성도도 높았다. 애플에서 저작권 문제로 소송을 걸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는데 아직은 조용한 상태다.

이번 동영상 사태는 정치 패러디의 순기능과 역기능, 그 한계와 책임 등의 문제를 고민하게 한다. 힐러리나 오바마는 간담이 서늘했겠지만 유권자들로서는 흥미진진한 일이었다. 누구를 지지하느냐와 별개로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인 힐러리를 다시 살펴보게 만들었고 그와 오바마를 다시 비교하는 계기도 됐다.

무죄 판결 받은 박근혜 패러디 포스터.

우리나라에서도 드라마틱한 사례가 많다. 일단 우리나라는 선거법이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는 정도가 미국보다 훨씬 심하다. 정치인을 패러디 했다가 법정에 불려가기도 하고 방송 프로그램이 폐지되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선거운동기간 이전에 특정 정당이나 후보자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내용을 권유 또는 호소하는 행위는 모두 불법이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박근혜 대표 피습 사건과 관련한 패러디다. 지난해 5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유세 도중 괴한에게 습격을 당해 면도칼에 베인 사건이 터졌다. 한나라당이나 열린우리당이나 승리를 확신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이런 사건이 터지자 한나라당에 동정표가 몰리기 시작했다. 열린우리당 지지자들은 애가 타기 시작했다.

박근혜 대표의 피습사건이 한나라당의 자작극이라는 플래시 동영상과 포스터가 나돌기 시작한 것은 선거 막바지 한나라당 지지율이 크게 뛰어오르던 무렵이다. “오 후보가 박 대표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우스개소리로 흘려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병상에 누워있던 박 대표는 발끈했고 한나라당은 윤아무개씨 등을 선거관리위원회에 고발했다.

윤씨는 1심에서 무죄, 2심에서 벌금 300만원을 선고 받았다가 최근 대법원은 이 사건을 무죄취지로 고등법원에 파기환송했다. 대법원에 따르면 공직선거법의 허위사실 유포는 공표된 사실이 후보자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을 때만 성립한다. 윤씨의 경우는 오 후보 등을 직접적으로 겨냥한 것이 아니라 해당이 안 된다는 이야기다.

이에 앞서 2004년 17대 총선에서는 조순형 당시 민주당 대표의 패러디 사진을 올린 신아무개씨가 유죄를 인정받아 150만원의 벌금을 물기도 했다. 법원은 “단순한 풍자물로 볼 수도 있지만 정치적 성향을 확실히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단순히 글을 게시하는 것보다 이미지 전달 효과가 크다”며 “선거 결과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다만 법원은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서는 국민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가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벌금형을 선고한다”고 덧붙였다. 신씨 등은 “표현의 자유 문제가 간과됐고 선거법이 과도하고 추상적인 규정으로 표현의 자유, 정치활동의 자유, 창작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항소는 물론이고 헌법 소원까지 내겠다고 밝혔지만 결국 흐지부지 됐다.

두 사건에 대한 법원의 엇갈린 판결은 허위사실 유포와 정치적 의사 표현 사이에 명확한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의미한다. 정치적 의도를 관철시킬 목적으로 불특정 다수에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것이 불법인가. 그 의사 표현의 방식이 우스갯소리일 경우에도 사실과 한 치도 어긋나서는 안 되는 것인가.

패러디, 그냥 웃고 즐기면 안 되나.

2004년 총선에서는 패러디 전문 사이트 라이브이즈의 김아무개 사장이 선거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기도 했다. 대선자객 시리즈로 인기를 끌었던 김씨의 경우는 허위사실 유포도 아니고 적극적인 정치적 의사표현이라고 보기도 어려웠지만 법원은 사전선거운동을 금지하는 규정에 저촉됐다고 판단했다.

해외에서도 정치 패러디가 저작권이나 상표권과 관련해서 문제가 된 경우는 많았지만 선거법으로 문제가 된 경우는 매우 드물다. 영국에서는 총리를 히틀러로 묘사한 피켓을 들고 다녀도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는다. 정치적 의사 표현의 자유를 지나치게 제한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올 만도 한 상황이다.

패러디의 매력은 무엇보다도 촌철살인에 있다. 핵심을 찌르는 날카로운 비판, 익숙하면서도 낯설고 뒤통수를 치는 쿨한 유머가 패러디의 기본 조건이다. 힐러리의 패러디 동영상은 이런 조건을 충분히 갖췄기 때문에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독재자 힐러리, 직설적으로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 메시지는 강렬했다.

패러디의 어원은 다른 노래, 변주곡이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파라디아(paradia)다. 이보다 더 오래된 말로 추정되는 파라디오(paradio)는 모방을 의미한다. 결국 패러디는 모방과 변용, 여기에 유머를 곁들여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킨다. 우회적으로 핵심을 전달하는 패러디는 딱딱한 신문기사나 장황한 논설에 담아낼 수 없는 참신한 매력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패러디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정치인은 역시 노무현 대통령이다. 한나라당은 한때 자체적으로 패러디 사이트를 운영하기도 했고 TV에서는 노 대통령을 비꼬는 코미디 프로그램도 인기를 끌었다. 노 대통령은 쉽게 흥분하고 막말을 일삼는 독불장군으로 묘사된다. 주변 사람들과 늘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것도 패러디의 소재다.

미국에서는 조지 부시 대통령이 패러디의 단골 소재다. 일간지 ‘인디펜던트’는 지난해 11월 공화당이 중간선거에서 참패한 직후 1면 머릿기사에 부시 대통령의 얼굴 사진과 함께 “문제는 전쟁이야, 멍청아. (It’s the war, stupid!)”라는 선정적인 문구를 내걸기도 했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선거에서 “문제는 경제야, 멍청아”라는 슬로건을 패러디한 것이다.

최근에 가장 인기를 끈 패러디 동영상은 버거킹의 ‘우스꽝스런 닭’을 빗댄 ‘우스꽝스러운 대통령’. 특정 정당이나 특정 정치인을 노골적으로 비꼬고 있지만 선거법에 저촉되는 경우는 없다. 주간지 ‘타임’은 부시 대통령이 고향인 텍사스에서 워싱턴으로 이사간 덕분에 텍사스 사람들의 평균 지능지수가 올라갔다는 내용의 만화를 버젓이 신문에 싣기도 했다.

패러디 전문 사이트 집잽닷컴에는 정치인들을 패러디한 애니메이션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이 정도면 사용자들이 만드는 UCC를 넘어 아예 기업형 패러디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표현의 자유가 폭넓게 허용돼 있고 수요도 충분하다는 이야기다. 다만 집잽닷컴에서도 인신공격이나 명예훼손에 가까운 내용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경우는 흔하다.

“문제는 쓸데없는 규제야, 멍청아.”

짚고 넘어가야할 사례는 지난해 3월, 청와대 홈페이지에 올라 문제가 됐던 박근혜 대표의 패러디 사진이다. 영화 ‘해피 엔드’의 포스터에 박 대표의 얼굴을 따다 붙였는데 문제는 이 영화의 주제가 불륜인데다 박 대표가 속옷 차림에 침대에 엎드려 있는 모습으로 나왔다는 것이었다. 이런 사진이 청와대 홈페이지에 첫 화면에 올랐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한나라당과 일부 언론의 유착 관계를 패러디한 사진이었지만 내용과 무관하게 호된 비판이 쏟아졌고 청와대가 나서서 사과와 함께 관련 담당자들을 직위 해제하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이 사건의 경우는 선거법 이전에 특정 개인에 대한 명예 훼손 또는 여성 폄훼가 논란의 핵심이었다.

2005년에는 공중파 방송에서 누드 패러디 사진이 문제가 돼 프로그램이 통째로 폐지되기도 했다. 문제의 사진은 마사치오 죠반니의 ‘낙원 상실’에 한나라당 박세일, 전재희 의원의 얼굴 사진을 합성한 것. 행정수도 이전에 반대해 사퇴한 이들 의원들을 비꼬는 내용이었지만 역시 발가벗은 그림이 문제가 됐고 여성을 폄훼했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분명한 것은 패러디에도 최소한의 원칙이 있다는 사실이다. 표현의 자유는 최대한 존중해야겠지만 여성과 장애인, 노인 등 사회적 약자를 비꼬는 내용은 결코 공감을 얻지 못한다. 지나친 비약이나 사실 왜곡도 결국 문제가 된다. 누드 패러디는 언제나 논란의 소지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우리나라의 패러디 문화는 아직 시작 단계에 머물러 있다. 영화 포스터나 신문 만화에 얼굴 사진을 오려붙이고 자막을 살짝 바꾸는 정도가 대부분이고 플래시 애니메이션이나 정치인들 성대모사를 담은 MP3파일 등은 약간 특별한 경우다. 합리적인 담론문화가 뿌리를 내리지 못했고 콘텐츠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다.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단속할 수밖에 없다”는 선거관리위원회의 발상은 시대착오적이다. 정치가 좀 더 즐거울 수는 없을까. 웃고 떠들면서 신나게 정치 이야기를 할 수는 없을까. 그게 바로 우리 시대가 정치를 소비하고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방식이다.

미디어 미래 7월호 원고.

이정환 기자 top@leejeonghw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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