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세상은 가능하다, 이정환닷컴!

소버린이 억울해 하는 이유.

Written by leejeonghwan

March 14, 2006

“주요 언론사 한 곳에서 심층 인터뷰를 요청해 온 적이 있었다. 기자 한 명이 모나코에 있는 소버린 본사까지 찾아와 이틀 동안 회사 곳곳을 돌아보고 인터뷰를 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일까. 기사는 실리지 않았다.”

2005년 9월 우리나라를 찾은 마크 스톨슨 소버린자산운용 상무의 이야기다. SK 지분을 모두 정리하고 철수한 뒤 한달 만에 다시 돌아온 그는 증권학회 주최로 열린 간담회에 참석해 “한국 언론이 정도를 저버렸다”고 비난을 쏟아냈다. 그는 또 “SK에서 소버린 광고 1페이지를 빼면 SK 광고 2페이지 주겠다는 제의를 했고 대부분 언론이 이를 받아들였다”고도 했다. 실제로 2005년 SK 주총을 앞둔 무렵, 대부분 언론이 소버린 광고를 거부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소버린이 적대적 M&A를 시도했다는 주장을 강하게 부인했다. 소버린은 순수한 개인 소유 투자회사일뿐 헤지펀드와 다르다는 것이다. 소버린은 SK의 주식을 28개월 동안 보유했다. 우리나라 기관투자자 보유 기간이 평균 4개월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꽤나 장기 투자를 한 셈이다. 그는 “소버린이 투기꾼이면 한국의 대부분 주식 투자자들은 모두 투기꾼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소버린이 처음 우리나라에 이름을 알린 것은 2003년 4월이었다. 그해 2월 SK글로벌 분식회계 사건으로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구속되면서 SK의 주가가 1만3천원에서 6천원 언저리까지 폭락했다. 소버린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3월 24일부터 4월 9일까지 13거래일 동안 1768억원을 투자해 SK 지분 14.99%를 사들였다. 평균 매입 가격은 9293원이었다. 소버린이 금융감독원을 통해 공시를 내보낸 때가 4월 3일이었다.

소버린은 뉴질랜드 출신의 리처드 챈들러 형제가 설립한 투자회사다. 소버린그룹홀딩스가 소버린에셋매니지먼트를 100% 소유하고 이 회사가 다시 크레스트시큐러티즈를 100% 소유하고 이 회사가 레전드와 호라이즌, 비스타, 세이지, 콰츠 등 5개 자회사를 소유하는 구조로 돼 있다. SK 주식을 사들인 것도 이들 자회사들이었다. 소버린은 3월 14일 보도자료를 내고 공식적으로 경영 참여를 선언했다.

소버린은 그 뒤 SK에 SK글로벌에 대한 지원을 중단할 것을 요청하는 등 본격적인 경영 참여 또는 경영 간섭에 나섰다. SK도 소버린의 요구를 의식해 사외이사 비율을 70%로 늘리고 이사회 중심 경영 체제를 구축하는 등 지배구조 개선에 앞장서는 모습을 보였다. 덕분에 그 이듬해인 2004년 3월 주주총회에서는 SK가 경영권 방어에 성공했다. 소버린이 요구한 집중 투표제나 이사 선임 등의 요구는 모두 부결됐다.

그러나 소버린은 그해 10월 25일 최태원 회장의 임원 자격을 문제 삼으며 임시 주주총회를 요구해 다시 관심을 끌어모았다. 그러나 이사회는 소버린의 요구를 부결시켰고 법원도 소버린의 신청을 기각했다. 소버린은 자사주 매각에도 반대했지만 역시 법원은 SK의 손을 들어줬다. 소버린은 SK가 경영권 방어를 위해 주주들의 의결권을 침해하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이를 기각했다.

그 이듬해 주주총회에서도 소버린은 패배했다. SK는 표결에서 이겼고 임기가 만료된 최태원 회장은 다시 이사로 선임됐다. 소버린은 2005년 6월 경영에서 손을 떼겠다고 선언했고 7월 18일 보유주식을 모두 매각했다. 평균 매각 가격은 4만9011원. 1768억원에 사들여 9326억원에 팔았으니 4.3배, 7558억원의 시세차익을 거둔 셈이다. 배당금 485억원과 환차익 1316억원을 더하면 2년 반 남짓한 동안 수익은 9359억원에 이르렀다.

SK는 자산총액 1조원이 넘는 계열사들을 7개나 자회사 또는 손자회사로 보유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룹의 지주회사 역할을 하면서도 지분 구조가 매우 취약했고 게다가 주가까지 매우 낮았다는 것이다. 보유하고 있는 SK텔레콤 지분 21%만 해도 4조원에 이르는데 정작 SK의 시가총액은 1조원 남짓에 머물렀다. 무엇보다도 특수관계인 지분이 14% 밖에 안 됐다. 누구라도 SK 주식을 사들이면 SK그룹 전체를 흔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

소버린이 SK의 주식을 왜 하필이면 14.99%만 사들였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전기통신사업법에 따르면 외국인은 SK텔레콤 같은 기간통신사업자는 외국인 지분이 49%를 넘지 못하도록 돼 있는데 여기서 외국인이랑 외국인이 15% 이상 지분을 보유한 법인을 말한다. 그런데 소버린이 SK의 지분을 조금 더 사들여 15%가 넘게 되면 SK가 외국인으로 분류되고 SK가 보유한 SK텔레콤 지분의 의결권이 제한받게 되는 것이다.

그룹의 지주회사 역할을 해야 하는 SK로서는 소버린이 지분을 0.01%만 늘려도 그룹 지배구조에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되는 상황이었다. 이를 두고 SK를 압박하기 위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구체적으로 드러난 사실은 없다. 소버린은 14.99%를 사들여 2년 반 동안 보유하고 있다가 매도했다. 스톨슨 상무는 이날 간담회에서 왜 지분을 14.99%만 사들였느냐는 질문에 “한국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다”고만 말했다.

그러나 소버린이 지분을 더 늘리지 않은 것은 기업결합심사를 피하기 위해서였을 가능성도 있다. 공정거래법에서는 지분이 15% 이상이면 기업결합심사를 받도록 돼 있는데 소버린의 경우 자산운용 내역과 지배구조 등을 공정거래위원회에 모두 공개해야 한다. 아마도 14.99%는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SK 경영진들을 압박할 수 있는 최적의 지분 비율이었을 것이다.

소버린에 대한 평가는 이렇게 크게 엇갈린다. 물론 소버린이 올린 시세차익만 놓고 소버린은 투기자본으로 매도할 수는 없다. 그 무렵 SK는 분명히 문제가 많은 기업이었고 그래서 주가도 필요 이상으로 낮았다. 소버린은 나름대로 가치투자를 했고 주주의 권리를 정당하게 행사했다. 소버린 덕분에 SK그룹의 지배구조가 개선되고 투명성이 크게 높아진 것도 사실이다. 소버린으로서는 억울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소버린은 주식 취득 신고를 늦게 해 검찰에 고발됐다가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을 뿐 그밖에 특별한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았다. 스톨슨 상무는 “우리는 거대한 음모 조직도 아니고 보시다시피 머리에 뿔도 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소버린은 다른 한국 투자자들과 마찬가지로 매매차익에 대해서는 세금을 안 냈지만 배당에 대해서는 세금을 모두 냈다”고 덧붙였다. 소버린 사태를 외국 자본과 국내 자본의 이분법으로 해석하는 건 옳지 않다.

소버린은 주주로서 당연히 할 수 있는 요구를 했다. 계열사 지원을 중단하라고 요구하거나 문제가 있는 경영진의 문책, 더 많은 배당을 요구하는 건 주주의 정당한 권리다. 특히 우리나라 재벌 대기업 집단처럼 창업자 경영진과 주주의 이해가 충돌하는 경우가 많을 때는 주주 자본주의의 원칙이 더 절실히 요구된다. 소액주주 운동에 앞장섰던 참여연대가 소버린 편에 섰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 무렵 SK는 매력적인 투자 대상이었고 소버린이 아니라 누구라도 욕심을 낼만 했다. 실제로 주가는 5배 가까이 뛰어올랐고 소버린 뿐만 아니라 국내 주주들도 놀라운 시세차익을 챙겼다. 소버린 사태의 더 근본적인 문제는 SK그룹의 복잡한 지배구조와 방만한 경영, 그리고 경영진의 비도덕성에서 찾을 수 있다. 재벌 대기업 집단의 문제와 투기자본의 문제를 애매하게 뒤섞으면 곤란하다.

그런 맥락에서 투기자본이냐 재벌이냐의 단순한 구분은 문제가 많다. 투기자본의 대안이 굳이 재벌일 이유도 없고 외국 자본의 대안이 굳이 국내 자본이어야 할 이유도 없다. 주주 자본주의는 이미 우리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굳어지고 있다. 주주 자본주의를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핵심은 자본의 투기적 속성을 끊임없이 경계하고 견제하는 것이다. 소버린을 내보내도 다른 소버린이 온다. 우리는 수많은 소버린과 맞서 싸워야 한다.

.

www.leejeonghwan.com

Related Articles

Related

절벽에서 뛰어내리면서 비행기를 조립한다는 것.

절벽에서 뛰어내리면서 비행기를 조립한다는 것.

오늘 아침 주주총회를 끝으로 미디어오늘에서 제 역할은 끝났습니다. 오후에는 자유언론실천재단에서 “ChatGPT와 저널리즘의 책임”을 주제로 특강이 있는데 이게 제가 미디어오늘 대표로 나서는 마지막 대외 행사가 되겠네요. 끝나고 선배들 저녁 식사 대접을 하기로 했습니다. 다음 주부터 몇 가지 계획이 있는데요. 1. 4월부터 슬로우뉴스 대표를 맡기로 했습니다. 유한회사 슬로우뉴스를 주식회사로 전환하고 제가 100% 지분을 인수하기로 했습니다. 기자들도 뽑고 콘텐츠도...

라즈베리 파이 오디오 만들기.

라즈베리 파이 오디오 만들기.

시간 날 때마다 만들었던 라즈베리파이 오디오. 드디어 완성. 사실 별 거 없는데 여기저기서 부품 조달하고 거기에 맞춰 도면 만드는 게 힘들었습니다. build log는 영어로. This is my new network audio system. All in one Integrated Amplifier. 1. Raspberry Pi 4B. 2. Hifiberry DAC+DSP. 3. 7 inch touch screen for raspberry pi. 4. Chromecast...

미디어오늘을 떠납니다.

미디어오늘을 떠납니다.

미디어오늘에 경력 기자로 입사해 편집국장으로 3년, 사장으로 6년을 지냈습니다. 다행히 월급날을 한 번도 밀리지 않았고요. 열심히 벌어서 금융 부채를 모두 정리했고 만성적인 자본잠식에서 벗어났습니다. 언론사 경영이라는 게 날마다 전쟁 같았지만 한 번도 원칙과 정도를 벗어나지 않았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다. 제가 지속가능한 미디어오늘을 위한 성장 엔진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면 지난 15년이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미디어오늘 지면에 대해서는 자부심과 아쉬움이...

더 나은 세상은 가능하다, 이정환닷컴!

Join

Subscribe For Updates.

이정환닷컴 뉴스레터를 구독하세요.

.

www.leejeonghw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