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라일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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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5월, 미국 월 스트리트는 한국에서 날아온 전자우편 한 통이 돌고 돌면서 화제가 됐다. 발신인은 칼라일그룹 한국 사무소 직원인 피터 정, 그가 미국의 친구들에게 보낸 전자우편 제목은 “나는 왕처럼 살고 있다(Living like a king)”였다. 낯 뜨거운 내용이지만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방 세 개짜리 아파트에 살고 있어. 왜 방이 세 개나 필요하냐고? 좋은 질문이야. 안방은 나와 뜨거운 영계들(chicks)이 앞으로 2년 동안 뒹굴 퀸 사이즈 침대가 있는 곳이지. 두 번째 방은 내 영계들을 위한 할렘이고 세 번째 방은 너희 바람둥이들(fuckers)이 한국을 방문할 때 머물 곳이야. 나는 이곳에서 왕이야. 이틀에 한번 그리고 주말마다 한국 최고의 클럽과 술집에 가는데 바이(buy) 사이드 업무를 더 배우면 날마다 가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아. 밤마다 여자들로부터 만나자는 전화를 받고 한번 나가면 적어도 3명의 영계들이 우리 집에 오고 싶다고 달라붙어. 은행가들(bankers)로부터 이런 저런 사업 제안을 받고 있는데 이들은 나의 변덕스러운 취미(골프, 최고의 저녁식사, 술집 접대 등)를 모두 충족시켜주지. 그러니까 너희 바람둥이들은 나와 연락을 끊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이 전자우편은 그의 전 직장인 메릴린치증권을 비롯해 월스트리트 증권가는 물론이고 세계 전역으로 쫙 퍼졌다. ‘블룸버그’와 ‘다우존스’ 통신이 이 전자우편을 소개했고 며칠 뒤에는 ‘워싱턴포스트’까지 비중 있게 이 사건을 다뤘다. 결국 왕처럼 살던 그는 사표를 쓰고 회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 언론에서도 이 사건을 일부 다루기는 했지만 외신을 번역해 그의 여성 편력을 가십거리로 다뤘을 뿐 그 의미를 제대로 짚고 넘어가지는 않았다.

세계의 여러 언론이 이 우스꽝스러운 전자우편에 큰 관심을 보였던 것은 칼라일이 그 무렵 한미은행의 최대주주였기 때문이다. ‘워싱턴포스트’는 이 사건을 두고 “한국 은행 산업의 추악한 단면”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그 누구도 이 사실을 지적하거나 제대로 주목하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칼라일이라는 이름이 낯설었고 칼라일이 한미은행의 대주주라는 사실조차 잘 알려지지 않았다.

피터 정이라는 칼라일의 직원은 프린스턴대 출신의 미국 교포 2세로 그때 나이 24세였다. 말단 직원이었던 그가 한국에서 한 일은 뭐였을까. 왜 한국의 은행가들이 그에게 줄을 서서 온갖 향응을 제공해야 했을까. 이 전자우편은 칼라일 같은 외국계 펀드들과 피터 정 같은 ‘검은 머리 외국인’들이 IMF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에 들어와 무슨 짓을 했는지 짐작케 하는 한 단편이다.

(돌아보면 2000년과 2001년, 그 무렵에는 뉴브리지나 칼라일에 대해 아무도 비판하지 않았다. 이 전자우편 사건이 터졌을 때도 칼라일이 한미은행의 대주주였다는 사실을 아무도 눈여겨 보지 않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칼라일이 JP모건 뒤에 숨어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칼라일이라는 이름은 낯설기만 했고 우리는 칼라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외국 언론들은 얼마나 우리나라를 비웃었을까.)

참고 : 미국 군수자본 칼라일, 한미은행을 덮치다. (이정환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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