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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질 정치와 저질 언론의 악순환, 어디서부터 바로 잡을까.

Written by leejeonghwan

August 21, 2021

(미디어감시연대 선거 보도 백서에 실린 글입니다.)

정책 검증이 부족했다, 이슈를 추종하면서 네거티브를 확대 재생산했다, 언론이 갈등을 유발했다, 군소 후보에 대한 관심이 부족했다, 여론 조사 지지율과 당락 가능성에 매몰돼 경마 중계식 보도만 넘쳐났다 등등. 선거가 끝날 때마다 반복되는 이야기들이다. 우리는 이제 ‘이게 문제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넘어 왜 이런 문제가 반복되는가, 그리고 이런 문제가 반복되지 않게 만들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

구조적 원인을 짚어보자.

첫째, 정치가 저질이라 언론이 저질인 걸 수도 있다. 언론 보도는 현실을 조명하거나 현실을 반영한다. 정책을 검증하는 보도가 부족하거나 부실한 건 애초에 정책이 거기서 거기고 어차피 선거만 끝나면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을 적당히 그럴 듯한 선언과 선전에 그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 보면 언론이 저질이라 정치가 이 모양일 수도 있는 것 아닐까. 언론이 제 역할을 했다면 정치가 이 모양이고 선거가 이 모양일까.

실제로 지난 보궐 선거에서도 정책과 공약을 비교 분석한 보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숱하게 많은 기사가 쏟아졌지만 주요 후보들이 내놓은 공약이 유권자들의 선택을 가를 만큼 선명한 차이를 드러냈다고 보기 어렵다. 정책을 다룬 기사가 더 많았어야 했다고 지적할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정책이 구체적이지 않았고 치열하게 부딪힐 만한 쟁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는 게 정확한 설명이 될 것이다.

서울에서는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후보가 모두 부동산 규제 완화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누가 돼도 공사판”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더불어민주당 박영선 후보는 노후 임대주택 단지 등 공공 택지를 개발해서 반값 아파트를 토지임대부 방식으로 분양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고 국민의힘 오세훈 후보는 민간 재건축과 재개발 기준은 완화해서 공급을 늘리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부산시장 선거에서는 정부가 가덕도 공항을 선물로 내놓으면서 더불어민주당 김영춘 후보를 배후 지원했지만 정권 심판의 정서를 넘지 못했다. 국민의힘 박형준 후보의 핵심 공약이었던 어반루프는 실현 가능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정부가 약속했으니 가덕도 공항은 누가 되더라도 추진할 것이고 어반루프는 실효성과 별개로 애초에 핵심 쟁점이 아니었다. 언론 역시 적극적으로 검증하거나 분석할 의지가 없었다.

저질 정치? 문제는 네거티브를 다루는 방식.

둘째, 네거티브는 언론의 본성이다. 언론은 약점을 들춰내고 공격하고 끌어내리는 데 익숙하다. 누군가에게는 불편하겠지만 그게 언론이 할 일이고 진실에 접근하는 과정이다. ‘생태탕’ 이슈가 튀어 나오면 어느 언론도 그걸 무시할 수 없다. ‘페라가모’가 논란이 되면 그걸 뭉개는 게 오히려 언론의 책무를 다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의혹이 제기되면 최선을 다해 바로 잡고 설명해야 하는 게 공인의 책무이기도 하다.

문제는 네거티브를 다루는 방식이다. 의혹이 있으면 집요하게 물어뜯되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거나 본질에서 벗어났다고 판단되면 물러나야 한다. 하지만 뉴스는 생물이다. 일부 언론이 발을 빼더라도 뉴스가 살아 움직이면서 계속해서 이슈를 만들어내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원래 지저분한 뉴스에 끌린다. 정치인이 쏟아내는 막말과 언론의 선정주의가 맞물리면서 대형 이슈가 터져 나오지만 지나고 나면 남는 게 없게 된다.

선거를 앞둔 3월29일 문화일보가 서울시 유권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 조사에서는 “내곡동 논란이 투표에 영향을 미쳤다”는 답변이 4.1%에 그쳤다. 선거 막판에는 내곡동 이슈가 지면을 도배하다시피 했지만 네거티브가 네거티브로 작동하지 않았거나 오히려 언론의 과도한 이슈 몰이가 반대 여론을 불러 일으켰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네거티브에 대한 반감이 오히려 문제를 문제로 보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다.

부산에서 박형준 후보의 엘시티 특혜 분양 의혹이 불거졌을 때 국민의힘은 “철 지난 의혹으로 흑색 선전을 한다”며 일축했다. 상당수 언론이 “네거티브 공세가 피로감을 가중시킨다”며 ‘물타기’를 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런 나쁜 놈을 지지할 수 있느냐”는 질문은 흔히 지지자들을 돌아서게 만들기 보다는 더욱 결속하게 만들거나 ‘결국 그놈이 그놈’이라는 인식과 함께 투표를 포기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기득권 정치에 발이 묶인 언론.

셋째, 소수 정당과 군소 후보에 관심이 부족했다는 비판도 뼈 아프지만 실제로 준비된 후보가 얼마나 있었는지, 과연 기계적인 균형을 맞추는 게 옳은지 반문해 볼 필요도 있다. 이를 테면 정치를 희화하고 있는 국가혁명당 허경영 후보에게 동일한 지면을 내주는 게 옳은가? ‘작년에 왔던 각설이’ 같은 기득권 정당이 지면을 독점하는 것도 문제지만 소수 정당과 군소 후보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지적 역시 한가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현실적으로 후보자가 10명이라고 해서 모두에게 동일하게 10분의 1의 지면을 줘야 하는 건 아니다. 선거법에 따르면 대통령 선거의 경우 국회의원 5명 이상의 정당의 후보자거나 직전 선거에서 3% 이상 득표를 했거나 여론 조사 지지율이 5% 이상인 후보를 TV 토론회에 초청할 수 있다. 실제로 3명 이상이면 제대로 토론을 진행하기 어렵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군소 후보들을 모아 별도로 토론회를 여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물론 소수 정당과 군소 후보라도 당연히 뉴스 가치가 있으면 취재를 해야 한다. 역시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논쟁이 되기 쉽지만 언론은 현실적으로 기계적 균형 보다는 이슈와 화제를 좇을 수밖에 없다. 독자들의 관심이 없으니 취재를 안 하는 것일까. 아니면 기사가 없으니 독자들의 관심이 없는 것일까. 적어도 지난 서울시장 보궐 선거에서는 특별히 눈길을 끄는 후보가 많았고 쟁점도 부각되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선거 보도의 문제라기 보다는 평소에도 한국 정치가 기득권 정당 중심으로 돌아가는 데다 몇 차례 정권 교체 과정에서 정치의 효능감을 끌어내지 못했던 게 현실이다. 정의당 중심의 진보 진영이나 한때 국민의당이 불러 일으켰던 제3지대 돌풍도 근본적으로 정치 역량의 차이를 보여주지 못했다. 언론이 기득권 정치에 갇혀 있었던 게 아니라 애초에 문제의식이 없거나 편승하고 있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경마 중계가 문제라고? 선거는 결국 승자 독식이다.

넷째, 경마 중계식 보도에 대한 비판도 마찬가지다. 선거 때마다 반복되는 지적이지만 선거는 원래 승자 독식의 게임이다. 선거에서 지지율만큼 뜨거운 이슈가 있나? 모두가 지지율을 궁금해 하고 내가 찍은 사람이 당선이 될지 안 될지가 최대의 관심 사안이다. 남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보는가. 다른 사람의 판단이 나의 판단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고 그게 민주주의의 속성이다. 원래 여론은 그렇게 작동하는 것이다.

선거는 원래 밴드웨건(달리는 마차처럼 다수의 움직임에 올라타는 심리)과 언더독(상대적으로 약한 편을 응원하는 심리)이 경합하게 마련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왕이면 내가 찍은 사람이 당선되면 좋겠다는 심리와 또 동시에 이 사람이 당선되도록 힘을 실어줘야겠다는 심리로 투표에 참여한다. 아, 남들도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누군가에게는 이런 경마 중계식 보도가 어떤 후보를 찍을 것인지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지지율 보도가 문제가 아니라 지지율이 지나치게 부각되면서 꼬리가 몸통을 흔들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여론조사에서 투표 의향을 드러내지 않거나 거꾸로 답변하는 숨은 표가 있을 수 있고 일부의 강경한 여론이 실제보다 과다 대표되는 경우도 많다. 언론이 상황을 부풀리거나 왜곡하고 쏠림 현상을 부추기면서 여론을 쥐락펴락하는 게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진짜 문제는 이런 언론 보도가 민의를 왜곡하고 선거를 혼탁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선거 때마다 왜 언론 보도는 이 모양인가.

네 가지 요인을 살펴보면서 현실적인 한계를 이야기했지만 이 글은 언론을 변명하려는 글이 아니다. 다만 지적하고 싶은 건 많은 문제가 애초에 언론의 속성인데다 관행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와 얽혀 있다는 것이다. 이러이러한 게 문제라고 준엄한 비판을 쏟아낸다고 해서 어느 날 갑자기 네거티브가 줄어들고 정책과 공약을 분석하는 기사가 쏟아지고 경마 중계가 사라지지는 않을 거라는 이야기다.

선거는 원래 네거티브가 넘쳐나고 경마 중계처럼 당선을 바라보고 질주하는 떠들썩한 정치 이벤트다. 정책과 공약이 뒷전으로 밀려났던 건 애초에 선거 때만 반짝하고 온갖 그럴 듯한 약속을 쏟아냈다가 당선되고 나면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구조에서는 선거 때만 집중되는 공약 분석 역시 큰 의미가 없다. 공허할 뿐만 아니라 자칫 언론 보도가 정당과 정치인의 선전 도구로 이용될 가능성을 경계해야 한다.

선거 때마다 네거티브가 넘쳐나는 건 네거티브 외에 첨예하고 뜨거운 쟁점이 없기 때문이다. 언론이 경마 중계에 ‘올인’하는 건 이보다 더 독자들의 흥미를 끌만한 의제가 없기 때문이다. 땅따먹기처럼 누가 표를 더 많이 가져오느냐의 경쟁에 유권자들을 들러리로 내세우는 것이다. 가치와 가치가 충돌하는 게 아니라 우리 편이 이길 것인가 질 것인가로 선거의 의미가 축소된 데는 언론의 책임도 크다.

보궐 선거 2주 뒤인 4월22일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서울시 유권자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는 유권자의 47.8%가 “언론 보도를 믿지 않는다(불신한다)”고 답변했다. 58.7%가 “이번 선거 보도가 지지하는 후보를 선택하는데 도움을 주지 못했다”고 답변했고 61.1%는 “언론 보도가 갈등을 유발했다”고 평가했다. “언론 보도를 믿지 않는다”고 답변한 사람 가운데 62.0%가 “언론 보도가 객관적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답변한 것도 눈길을 끌었다.

애초에 객관적일 수 없는 현장.

언론은 과연 어디까지 객관적일 수 있을까. ‘생태탕’과 ‘페라가모’가 이슈의 전면에 등장하는 순간, 이게 선거의 판도를 가를 것인가 아닌가, 후보가 사퇴를 해야 할 사안인가 아닌가 판단을 해야 한다. 어떤 독자들은 생태탕을 제대로 다루지 않는 언론이 정파적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그 반대로 생각하는 독자들도 있을 수 있다. 2년 가까이 한국 사회의 주요 의제를 잠식한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그 가족의 재판에 대한 언론 보도 역시 마찬가지다.

기자들은 일상적으로 가치 판단을 하고 그 판단을 지면에 담는다. 그런 판단이 모여 언론의 논조로 나타나고 정파성으로 드러나게 된다. 진짜 문제는 정파성이 아니라 사실과 의견을 뒤섞어서 맥락을 뒤틀거나 정파성을 숨기고 객관적인 척 공정한 척 하면서 독자들의 판단을 호도하는 경우다. 애초에 객관적일 수 없는 사안을 임의로 재단하고 강하게 주장할 때 오히려 독자들의 신뢰를 잃게 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때다.

한국 언론은 특히 정파적 상업주의의 뿌리가 깊다. 일부 열성 독자들의 성향에 맞춰 정파성을 부각시키면서 그걸 언론의 브랜딩과 마케팅 수단으로 활용했다. ‘우리가 가장 옳다’는 태도로 독자들을 가르치려 들거나 이런 논조에 동의하는 독자들을 충성 독자로 끌어들이면서 줄어드는 매체의 영향력을 방어해 왔던 것이다. 광고 시장이 무너지고 언론의 수익 구조가 흔들리면서 이런 경향이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임영호 부산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월간 ‘신문과방송’ 2021년 4월호 기고에서 “언론의 정파화는 독자층의 정파적 성향 분포를 반영하면서 시작했다는 핑계도 있었으나 이제는 역으로 시민들의 정파 성향을 부추기고 갈등을 조정하는 정파적 상업주의로 굳어졌다”고 지적한 바 있다. ‘우리 편’ 독자들에게 영합하는 언론의 정파적 상업주의가 언론 보도를 정치 행위로 인식하게 만들어 언론 전반의 불신을 불러온다는 이야기다.

선거 보도의 틀을 바꾸기 위한 제안.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정치학과 교수인 토마스 페터슨의 분석에 따르면 20156년 미국 대선 기간 동안 트럼프에 대한 보도 가운데 부정적인 기사가 77%, 클린턴은 64%나 됐다. 긍정적인 기사는 트럼프가 23%, 힐러리가 36%로 집계됐다. 부정적인 기사가 트럼프의 지지율을 꺾지 못했으며 긍정적인 기사가 상대적으로 더 많다고 해서 클린턴의 지지율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한국에서의 경험도 다르지 않다. 대선이든 총선이든 우리는 서너 명의 나쁜 놈 가운데 가장 덜 나쁜 놈을 뽑는 선거를 치렀다. 누가 더 분노해서 투표소까지 찾아가느냐의 경쟁이었고 냉소하고 방관하는 사람들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은 채 선거를 치렀다. 언론 보도는 언제나 프레임을 강조하고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면서 대화와 토론 보다는 진영 논리에 시민들을 가뒀다. 언론의 실패가 정치의 실패로, 민주주의의 실패로 이어졌다.

변화를 만들려면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언론은 결코 완벽할 수 없고 저질 보도를 뿌리 뽑을 단칼의 묘수도 없다. 징벌적 손해 배상이 도입되더라도 언론의 오랜 습관과 관행이 근본적으로 바뀔 거라고 기대하기 어렵다. 언론중재법 개정안이 바로 잡으려는 건 악의적이고 반복적인 왜곡 보도로 부당하게 입은 피해를 실질적으로 배상해야 한다는 것이지만 어떤 법도 단순히 나쁜 보도를 처벌하거나 퇴출시킬 수 없다.

저질 정치와 저질 언론의 악순환을 끊으려면 선거 때만 반짝 할 게 아니라 집요하게 정책을 추적하고 검증하고 책임을 물어야 한다. 정치가 저질인 건 그래도 표를 얻는 데 무리가 없기 때문이고 언론이 저질인 건 그래야 읽히고 그래야 돈이 벌리기 때문이다. 더 많은 감시와 비판이 필요하다. 정치를 드라마로 다루지 않고 정치로 다뤄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계속해서 설명하고 독자들을 끌어들이고 판단에 동참하게 만드는 수밖에 없다.

독자들이 딱딱한 정치 해설 기사보다는 갈등과 충돌, 사람들 이야기에 끌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하지만 욕하면서도 관심을 갖게 만들고 분노하면서 읽게 만들어야 한다. 행동하면 바뀐다는 정치 효능감을 끌어내는 것도 언론의 과제다. 지역주의를 깨기 위해 싸워야 하고 지킬 수 없는 공약을 남발하고 말을 바꾸는 정치인들을 집요하게 추적하고 비판해야 한다. 그런 언론에 힘을 실어주고 그런 기사가 많이 읽히게 만들어야 한다.

‘생태탕’ 같은 핫한 이슈는 블랙홀처럼 다른 이슈를 집어 삼키게 된다. 2007년 대선 때는 BBK가 뜨거운 이슈였지만 실제로 많은 유권자들이 BBK의 본질에 큰 관심이 없었다는 게 선거 결과로 드러났다. 설령 이명박 당시 후보가 BBK의 실 소유주라는 사실이 밝혀졌더라도 상당수 지지자들이 이 후보를 찍었을 가능성이 크다. 2012년 대선 역시 박정희의 딸을 선택하느냐 마느냐가 모든 쟁점을 뛰어넘었다.

지나서 보면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이슈의 소용돌이 안에 있으면 실제보다 부풀려져 보이거나 금방이라도 판세가 뒤집힐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여론의 왜곡을 막으려면 무엇이 더 본질인가를 이야기하고 끊임없이 설득해야 한다. 당선을 바라보고 질주하는 것은 정치인들이 할 일이고 언론은 언론의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의제를 던지고 시대정신을 제안하고 여기에 답을 하게 만드는 게 선거를 앞두고 언론이 할 일이다.

진실을 보여주면 사람들이 생각을 바꿀까?

지난 보궐 선거는 그 어느 선거 보다 재미없는 선거였다. 어차피 쟁점이 없는 선거, 의제의 다양성에 관심을 기울였으면 어땠을까. “여성 혼자서도 안전한 서울(여성의당 김진아 후보)”이나 “소수자청 설치(미래당 오태양 후보)”, “부동산 특권 해체(진보당 송명숙 후보)” 등의 이슈가 선거 쟁점으로 떠올랐다면, 그리고 기득권 정당의 후보에게 답변을 요구했다면 훨씬 풍성하고 역동적인 선거가 됐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전임 시장들의 성 폭력 추문으로 치러진 보궐 선거인만큼 성 평등 이슈가 핵심 의제가 돼야 했지만 가장 책임이 큰 집권 여당이나 이에 맞서는 국민의힘은 쟁점을 외면했다. 여성운동 진영의 한 활동가가 “젠더 폭력 문제로 시작된 선거가 젠더 없는 선거가 됐다”면서 “정치권의 “거대 양당의 주요 공약은 모두 부동산 정책이 돼버렸고, 성평등 이슈는 다른 정당이나 후보자를 비난하는 정쟁의 도구로 전락해 버렸다”고 지적했을 정도다.

문제는 언론이 의제를 주도할 만한 힘을 갖고 있지 않다는 데 있다. 깊이 있는 분석 기사보다 막말과 네거티브가 훨씬 더 멀리 전달된다. 가짜 뉴스가 진짜 뉴스보다 훨씬 강력하고 왜곡과 과장을 바로잡기는 훨씬 더 힘들다. 공약 비교 분석 같은 지루한 기사를 제대로 읽는 독자는 많지 않고 심지어 좋은 공약을 내놓아 봐야 득표율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냉소하는 유권자들이 상당수다.

팩트체크 전문 뉴스 뉴스톱은 미국의 정치 전문 뉴스 폴리티팩트에서 운영했던 ‘트럼프 미터’를 벤치마킹해서 ‘문재인 미터’라는 이름으로 문재인 정부의 공약 검증 이행 상황을 체크하는 웹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다. 뉴스톱에 따르면 문재인 정부 4년 차인 2021년 5월23일 기준으로 887건의 공약 가운데 155건(17.5%)이 완료됐고 445건(50.2%)가 진행 중이다. 지체되고 있거나 파기된 공약이 각각 176건과 25건씩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국민들 대부분은 이런 웹사이트가 있는 줄도 모르거나 실제로 무슨 공약이 파기됐거나 이행되고 있지 않은지 관심조차 없다. 중요한 것은 공약 이행률이나 파기 건수가 아니라 실제로 후보가 선거 과정에서 던졌던 약속을 얼마나 지키고 있느냐다. 숫자가 아니라 내용을 봐야 한다는 이야기다. 언론이 제대로 추적하지 않고 후보 시절 했던 약속이 정권에 아무런 압박이 되지 않으니 굳이 신경 쓰고 챙겨야 할 이유가 없는 상황이다.

중요한 것은 맥락과 구조, 그리고 변화에 대한 희망.

우리는 냉소와 불신이 현실을 바꾸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문제는 선거가 아니라 정치에 있다. 선거 보도의 문제를 바로 잡으려면 정치 보도를 바로 잡아야 하고 근본적으로 언론이 현장에 접근하는 방식을 바꿔야 한다.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관심을 기울이고 구호와 선언이 아니라 변화를 이끄는 실질적인 아이디어에 집중해야 한다. 계속해서 이게 최선인가 묻고 더 나은 대안을 탐닉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언론이 바뀌어야 정치가 바뀐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당선되지 않게 만들기 위해 투표하는 게 아니라 가치와 지향에 투표를 해야 한다. 한 판의 승부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시스템을 바꾸는 변화에 표를 던져야 한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토론이 필요하다. 독자들이 언론에 기대하는 것은 단순한 사실 전달을 넘어 맥락과 구조를 드러내고 통찰을 담아내는 것이다. 언론이 변화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하고 그런 희망을 정치에 투영해야 한다.

정치 보도가 몇몇 인물 중심의 드라마에 매몰되는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선거 이전부터 일상적으로 가치의 경쟁을 유도하고 유권자들이 가치를 선택하도록 해야 한다. 언제나 뜨거운 쟁점인 부동산 문제를 포함해서 양극화 해소와 지속 가능한 성장, 기후 변화, 재벌 개혁, 청년 실업, 교육 개혁 등의 현안을 묻고 입장을 끌어내야 한다. 적어도 국민들이 내가 선택한 정당이 어떤 세상을 만들려고 하는지는 알고 투표장에 갈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정당이나 후보자 중심보다 정책과 공약을 중심으로, 좀 더 나가서 이런 아이디어가 실제로 무엇을 바꿀 수 있는지 해법을 중심에 두고 한국 사회의 변화 방향에 대한 토론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선거가 민주주의를 확장하는 데 실질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선거 과정에서 민의를 더 잘 반영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솔루션 저널리즘을 끌어내기 위해 이를 테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시작해 보면 어떨까.

투표율을 높일 수 있는 실질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실제로 지난 선거에서 투표율을 크게 끌어올린 선거구가 있는가. 있다면 어떤 요인으로 높아졌는가. 지하철 역 앞에서 인사하는 선거 운동원과 확성기, 수많은 선거 전단 외에 유권자들과 소통할 수 있는 더 나은 방법이 있나. 과거 선거에서 참고할 만한 사례가 있나. 선거 자금을 최소화하면서도 당선된 신인 정치인의 사례가 있는가. 다른 후보들도 벤치마킹할 부분이 있는가.

유권자들의 요구를 선거 과정에 반영한 사례가 있는가. 정당을 초월해 지역 사회의 의제를 발굴하고 협력한 사례가 있는가. 이런 시도가 실제로 변화를 만들어 냈는가. 안 됐다면 한계는 무엇이고 여전히 남은 가능성은 무엇인가. 시민들이 공약을 제안해서 받아들여진 사례가 있는가. 또는 지켜지지 않고 있거나 폐기될 뻔한 공약을 집요하게 문제제기해서 바꾼 경험이 있는가.

공론장의 복원, 퀄리티 저널리즘에 힘을 싣는 개혁.

사람들이 기사를 안 읽는다고 탓할 게 아니라 읽히는 기사를 만들어야 하고 찾아보기 쉽게 다시 배열하고 맥락을 복원해야 한다. 핵심 의제를 집중 공략하면서 비판과 문제 제기 뿐만 아니라 토론과 대안, 해법에 이르는 과정을 기록하는 것이 솔루션 저널리즘 방법론이다. 세상에는 해답이 없는 것 같은 문제가 많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라고 있는 것이 정치고 정치를 추동해서 세상을 바꾸는 것이 언론의 책무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토론이 필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BBK가 사실이거나 말거나 이명박을 선택했던 것처럼 내곡동이 사실이거나 말거나 오세훈을 찍고 당장 내 집 값에 도움이 될까 말까를 기준으로 투표장에 들어서는 게 현실이다. 거대담론은 멀고 뉴스는 혼탁하다.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는 상당수의 문제들이 이미 공론장에서 배제돼 있다. 언론이 이런 문제를 스치고 지나가기 때문이고 관심을 가져봐야 바뀌지 않을 거라는 무력감 때문이다.

“From Mirrors to Movers(거울에서 행동으로).” 솔루션 저널리즘을 연구하는 미국의 언론학자 캐서린 질덴스태드가 쓴 책의 제목이다. 언론이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지만 이제 우리는 사실이 전달되는 과정에 주관과 판단이 개입된다는 걸 알고 있다. 언론이 앞을 비추는 등대의 역할을 해야 하고 대안을 모색하고 의제를 제안하는 문제 해결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확산되고 있다.

진짜 언론 개혁은 토론을 끌어내고 공론장을 복원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에게는 너무 많은 문제가 있다. 문제를 문제라고 지적하는 것만으로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우리의 문제를 바로 들여다 보고 해법을 찾아나가는 과정에 언론이 좀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좋은 뉴스가 힘을 얻고 현실을 바꿀 수 있도록 공론장의 균형을 바로잡는 게 언론 개혁의 핵심이 돼야 한다.

세상 일이 다 그렇지만 단칼에 바로잡는 방법은 없다. 뚝딱 법 하나 잘 만들어서 갑자기 퀄리티 저널리즘이 등장하는 게 아니고 나쁜 언론 몇 개 퇴출시킨다고 해서 언론의 품격이 높아질 리 없다. 끊임없이 언론을 비판하고 감시하고 추동하면서 대안을 모색하고 좀 더 풍성한 토론을 끌어내는 게 우리 모두의 과제다.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진짜 언론, 그리고 깨어있는 독자들이 이런 변화를 견인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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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주주총회를 끝으로 미디어오늘에서 제 역할은 끝났습니다. 오후에는 자유언론실천재단에서 “ChatGPT와 저널리즘의 책임”을 주제로 특강이 있는데 이게 제가 미디어오늘 대표로 나서는 마지막 대외 행사가 되겠네요. 끝나고 선배들 저녁 식사 대접을 하기로 했습니다. 다음 주부터 몇 가지 계획이 있는데요. 1. 4월부터 슬로우뉴스 대표를 맡기로 했습니다. 유한회사 슬로우뉴스를 주식회사로 전환하고 제가 100% 지분을 인수하기로 했습니다. 기자들도 뽑고 콘텐츠도...

라즈베리 파이 오디오 만들기.

라즈베리 파이 오디오 만들기.

시간 날 때마다 만들었던 라즈베리파이 오디오. 드디어 완성. 사실 별 거 없는데 여기저기서 부품 조달하고 거기에 맞춰 도면 만드는 게 힘들었습니다. build log는 영어로. This is my new network audio system. All in one Integrated Amplifier. 1. Raspberry Pi 4B. 2. Hifiberry DAC+DSP. 3. 7 inch touch screen for raspberry pi. 4. Chromecast...

미디어오늘을 떠납니다.

미디어오늘을 떠납니다.

미디어오늘에 경력 기자로 입사해 편집국장으로 3년, 사장으로 6년을 지냈습니다. 다행히 월급날을 한 번도 밀리지 않았고요. 열심히 벌어서 금융 부채를 모두 정리했고 만성적인 자본잠식에서 벗어났습니다. 언론사 경영이라는 게 날마다 전쟁 같았지만 한 번도 원칙과 정도를 벗어나지 않았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다. 제가 지속가능한 미디어오늘을 위한 성장 엔진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면 지난 15년이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미디어오늘 지면에 대해서는 자부심과 아쉬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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