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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로프 팔메의 묘지에서.

4일째 되던 날, 한국 음식점을 찾아가는 길에 길 한복판 바닥에 박혀있는 놋쇠로 된 비석을 발견했다. 올로프 팔메 전 총리가 총 맞아 죽은 곳이라고 했다. 찰츠요바덴 협약이 스웨덴식 사회적 합의모델을 만들었다면 팔메는 스웨덴식 복지제도와 사회민주주의 모델을 구현했다. 팔메는 스웨덴 국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이기도 하다. 취재 마지막 날 기자는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팔메의 묘지를 찾았다.

그는 총리로 재직 중이던 1986년 어느 날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귀가하던 중 검은 코트를 입은 괴한의 총에 맞아 죽는다. 마침 토요일이었고 주말 잘 보내라며 경호원들도 모두 돌려보낸 뒤였다. 팔메는 평소 경호원 없이 돌아다니면서 놀라는 사람들을 보고 즐거워했다고 한다. 괴한은 잡히지 않았고 그의 죽음은 끝내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1927년 스톡홀름의 중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난 올로프 팔메는 스톡홀름대학 법학과를 두 학기 만에 졸업한 뒤 미국에 유학가 자유민주주의의 한계를 절감했다고 한다. 1949년에는 체코에서 열린 국제학생연맹 회의에 스웨덴 대표로 참가해 소련식 국가 사회주의 역시 스웨덴의 대안 모델은 아니라는 결론을 얻는다. 그 뒤 비공산 온건 좌파들의 모임인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서 활동하던 그를 당시 총리였던 에르란데르가 눈여겨보고 비서로 고용한다.

그때가 1953년, 팔메는 5년 뒤인 1958년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1969년 에르란데르가 노령을 이유로 사퇴하자 그가 그 뒤를 이어 사민당 당수로 지명돼 42세의 나이로 최연소 총리에 임명된다. 팔메는 총리 임명 직후 대대적인 복지제도 확대에 착수한다. 노조의 중앙집권 체계가 무너지고 무질서한 파업이 확산되던 무렵이었다. 팔메는 고용안정법과 임금노동자 경영참여법 등을 잇따라 제정하고 스웨덴식 사회민주주의 구현에 앞장선다. 그 과정에서 보수세력의 거센 반발에 부딪히기도 했다. 그리고 아마도 그게 그의 죽음을 가져왔을 것이다.

팔메는 미국과 소련의 패권주의를 거세게 비판한 많지 않은 정치인 가운데 한명이기도 하다. 그는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을 맹렬히 비판했고 소련의 프라하 침공에 대한 항의시위가 열릴 때면 시민들과 뒤섞여 거리를 행진하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이론보다는 그 이론을 어떻게 현실에 구현할 것이냐다. 스웨덴 모델은 반대를 무릅쓰고 때로는 죽음까지 무릅쓰고 이상을 쫓았던 그의 용기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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