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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른 실패와 반복, 뉴스룸과 해커톤 문화.

Written by leejeonghwan

December 31, 2020

해커톤에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무제한 커피와 달달한 간식입니다. 일단 커피가 맛있어야 하고 마카롱 같은 걸 잔뜩 쌓아두면 당을 보충할 수 있겠죠. 여기에 저녁이면 캔 맥주가 필요할 수도 있고요. 화이트 보드와 포스트잇, 그리고 커다란 타이머도 있으면 좋습니다.

째깍째깍. “마감까지 1시간 30분 남았습니다.” 심장이 쪼그라들고 입안이 바짝바짝 마르는 경험, 극한의 에너지를 끌어올리다 보면 지적 아드레날린이 분출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해커톤(hackathon)은 해킹(hacking)+마라톤(marathon)이라는 의미입니다. 원래 개발자 문화에서 시작됐지만 문제 해결을 위한 네트워크 이벤트로 확장한 개념입니다. 해킹을 시스템의 취약점을 파고 든다(그래서 문제를 해결한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해킹 마라톤이라고 하면 짧은 시간 안에 문제를 해결하는 대회라는 의미가 되겠죠.

자동차를 만드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몇 년씩 걸려서 자동차를 개발할 수도 있을 거고요. 당장 굴러가는 킥보드부터 시작해서 자전거를 만들어 보고 엔진을 얹어서 오토바이도 만들어 보고 기술력이 확보되면 자동차를 만들 수도 있겠죠.

일단 굴러가는 뭔가를 만들어 보자, 그래서 자동차를 계속 만들 건지 말 건지부터 이야기해조자, 이게 린(lean) 방법론에서 ‘최소 기능 제품(minimum viable product)’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완벽한 뭔가를 만들려면 시간도 오래 걸리고 실패에 치러야 할 비용이 너무 크게 됩니다. 그래서 일단 되는지 안 되는지 보고 안 되면 접고 또 다른 걸 시도해 보자는 거죠. “빠른 실패와 반복(fail fast and iterate)”이 핵심입니다.

미국의 복스미디어(Vox Media)가 복스(Vox)라는 이름으로 미디어를 기획하고 론칭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9주였습니다. 백지 상태에서 시작해 두 달 남짓한 동안 콘텐츠 콘셉트와 디자인 포맷까지 뉴스 사이트가 하나 뚝딱 만들어진 것입니다.

복스미디어는 애초에 해커들이 만든 회사였습니다. 복스의 최고 경영자, 짐 뱅코프(Jim Bankoff)는 웹 네이티브 저널리스트들을 ‘미디어 해커(Media Hacker)’라고 불렀습니다. 해커 문화와 저널리즘의 결합, 기업가 저널리즘(entrepreneurial journalism)을 표방하고 계속해서 실험과 실패를 반복하면서 업그레이드하는 독특한 모델이었죠.

복스미디어는 1년에 한 번 VAX(=Vox+Hack)라는 이름으로 사내 해커톤을 개최합니다. 1년에 한 번, 1주일씩 모여서 함께 먹고 자고 마시면서 수백 가지 아이디어를 쏟아내고 테스트하면서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하는 것이죠.

SB네이션(SBNation)에서 시작해 더버지(The Verge)와 복스(Vox), 폴리곤(Poligon), 커브드(Curved), 이터(Eater) 등 버티컬 미디어의 실험을 계속 확장할 수 있었던 동력이 바로 이 해커톤 문화에서 나온 것입니다. 문제의 발견과 해법의 모색, 테스트와 평가의 무한 반복, 장벽을 넘어 협업을 일상화하고 실패를 장려하는 역동적인 조직 문화를 만드는 것이죠.

복스미디어의 수석 아키텍트, 미챌 로빗(Michael Lovitt)은 이렇게 말합니다.

“시작할지 안 할지도 모르는 프로젝트에 사람을 빼오기는 쉽지 않지만 1주일 동안 빌릴 수는 있습니다. 위험을 감수하고 무모한 아이디어를 쏟아낼 수 있는 자유, 1주일이면 충분하기 때문이죠.”

해커톤 마지막날은 프레젠테이션과 Q&A, 평가와 토론이 이어집니다.

중요한 것은 “해보니까 되더라”는 성취의 경험입니다. 이런 브레인스토밍은 단순히 기사 아이템을 발제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문제를 테이블 위에 얹어두고 황당무계한 아이디어를 쏟아내면서 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입니다. 일단 해보는 것, 그동안 해볼 엄두도 내지 않았던 것들에 부딪혀 보는 것이죠. 안 될 거라고 생각해서 밀쳐 놓았던 것들을 마주하는 것입니다.

제가 기자들이 해커톤 문화를 경험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크고 작은 해커톤을 주최하고 진행하기도 했고요. 몇 년 전부터 만나는 사람들마다 해커톤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고 다녔습니다.

혁신은 내부에서 그것도 콘텐츠를 가장 고민하는 사람들이 모험에 뛰어들 때 비로소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익숙한 일상을 벗어나 경계를 넘어 전혀 다른 영역의 사람들과 협업을 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입니다.

뉴욕타임스에는 ‘메이커위크(Maker week)’라는 해커톤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1년에 한 번 모여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여러 가지 주제를 펼쳐놓고 프로토타입(prototype)을 만들면서 답을 찾아나가는 이벤트입니다.

우리가 뉴욕타임스의 혁신을 이야기하곤 하지만 그게 어떻게 가능했는지 과정을 들여다보지 않았습니다. 보고서 하나 잘 써서 갑자기 조직이 바뀐 게 아니란 겁니다. 중앙집권적인 언론사 문화에서는 변화 보다는 전통과 관행이 조직을 지배하게 됩니다. 언론은 언제나 새로운 걸 좇지만 그 새로운 걸 다루는 방식은 고전적이고 관습적이죠. 가뜩이나 도제식 학습을 거쳐 중앙집권적인 편집 시스템에 적응한 언론인들은 변화를 거부합니다.

뉴욕타임스가 구글의 디자인 스프린트(sprint)를 메이커위크에 결합한 경험은 신기하고 놀랍습니다. 해커톤의 목표가 브레인스토밍을 통해 숨겨진 역량을 끌어내는 데 있다면 스프린트는 브레인스토밍 단계를 좀 더 강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스프린트는 보통 10명 안쪽의 작은 그룹에서 진행하는데 2018년에 뉴욕타임스는 100명이 모여서 스프린트+해커톤을 진행했습니다.

디자인 스프린트는 구글의 수석 디자이너 제이크 냅(Jake Knapp)의 표현에 따르면 “최소의 시간으로 최상의 결과를 얻도록 조정된 최적의 프로젝트”입니다. 월요일에 질문을 뽑고 화요일에 아이디어와 솔루션을 스케치한 다음 수요일에는 솔루션을 결정하고 스토리 보드를 만들게 됩니다. 목요일이면 프로토타입이 나오고요. 금요일에는 테스트를 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게 5일 만에 끝나는 것이죠. 보통은 3개월에서 1년 정도 걸리던 작업인데 말이죠. 뉴욕타임스는 아예 5일 걸리던 스프린트를 이틀로 줄이고 좀 더 구체적인 질문을 제안해 효율을 높였다고 합니다.

제이크 냅이 지적한 것처럼 해커톤은 대단하지만 대단하지 않기도 합니다. “오, 우리에게 이런 엄청난 재능이 있었어.” 에너지 뿜뿜했던 순간이 지나가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도 하고요. 그래서 다시 지치게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해커톤은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조직 문화를 바꾸는 작업이 돼야 합니다.

뉴욕타임스의 해커톤 문화가 독특한 건 모든 과정을 다시 기록하고 독자들과 공유한다는 것입니다. 뉴욕타임스의 오픈나우(Open Now)에 여러 가지 흥미로운 사례가 소개돼 있습니다. 이를 테면 이런 아이디어들이 메이커위크에서 나왔고 일부는 실제로 사이트에 적용됐습니다.

독자들이 직접 기사에 형광펜으로 중요한 부분을 표시하고 코멘트를 달게 하면 어떨까, 이런 아이디어는 정말 재밌죠. 미디엄(Medium)에서는 하고 있는 기능인데 뉴욕타임스는 아직이군요.

오비추어리팀은 사망 기사의 남녀 성비를 비교하는 대시보드를 만들었습니다.

어떤 기사가 관련 기사로 이어지고 어떤 기사는 읽다가 빠져나가는가 확인하기 위해 패키지 맵퍼라는 걸 만들었는데 이것도 해커톤에서 나온 아이디어였습니다.

신문 업사이클링 프로젝트 역시 해커톤 프로젝트였고요.

이밖에도 독자들의 메일을 자연어 처리(NLP) 기술을 활용해 자동으로 분류하고 필요하다면 자동으로 답장을 보내는 서비스를 만들기도 했고요. 가로세로 낱말 풀이를 크롬 확장 도구에 얹어서 협업 플레이를 할 수 있는 기능을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한국언론진흥재단 해외미디어동향 가을호에도 뉴욕타임스의 메이커위크에 대한 소개가 있는데요. 흥미로운 대목은 메이커위크에서 나온 아이디어가 반드시 상용화되지는 않고 오히려 “상용화에 대한 부담 없이 순수하게 아이디어에 집중하는 시간을 만드는 것”이 목표라는 것입니다. “혁신할 자유와 시간(the time and freedom to innovate)”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해커톤의 또 다른 목표는 장벽의 해체입니다. 기자들은 기자들끼리, 개발자들은 개발자들끼리 어울리는 문화를 깨고 기자들이 서비스 관점에서, 디자이너들이 저널리즘 관점에서, 필요하다면 비즈니스 파트에서 콘텐츠 기획에 참여할 수도 있고 독자 부서에서 새로운 콘텐츠 포맷을 제안할 수도 있을 거고요. 하나의 목표를 갖고 있는 언론사 구성원들이 관성을 깨고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는 조직 문화를 만드는 것이 진짜 목표라는 이야기죠. 공동의 가치를 확인하는 것도 중요한 성과일 것입니다.

시애틀타임스 출신으로 복스에서 일하고 있는 로레인 라비노(Lauren Rabaino)는 “해커톤이 혁신의 동력이라기보다는 지속가능한 혁신의 전제 조건인 협업과 이해의 문화를 만드는 과정이라고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해커톤의 ‘교차 기능 구조(cross-functional structure)’를 언론사 조직에 이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콜롬비아대학교 토우센터에서 펴낸 “저널리즘 디자인 가이드(Guide to Journalism and Design)”라는 보고서가 있습니다. 이 보고서에서 강조하는 것도 정확한 문제의 인식과 아이디어를 창출하기 위한 민주적이고 투명한 접근 방식, 그리고 프로토타이핑과 테스트, 피드백을 반복하는 프로세스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뉴스 기업들에게는 이용자 중심 디자인이라는 개념이 없었죠. 여전히 일방향의 뉴스 생산과 전달 시스템에 머물러 있고요.

우리에게는 사악한 문제(Wicked Problem)와 길들여진 문제(Tame Problem)가 있습니다. 길들여진 문제는 결국 하나의 답으로 수렴되지만 사악한 문제는 본질적으로 복잡하고 정의하기 어렵거나 불가능한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디자인 씽킹이 필요하다는 게 이 보고서의 문제의식이었고요. 결국 또 해커톤 문화와 맞닿는 이야기입니다.

올해 마지막 뉴스레터에서 해커톤 이야기를 한 것은 변화의 방법론을 고민해야 할 때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조직이 바뀌지 않는다면 사람을 바꾸는 게 아니라(사람은 잘 안 바뀝니다) 문화를 바꿔야 합니다. 미디어오늘도 마찬가지겠습니다만 조직의 한계를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할 것, 그리고 실험하면서 보완하고 개선할 것, 이게 조직의 문화가 돼야 비로소 변화가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뉴스는 어디에나 넘쳐나고 뉴스를 좇다 보면 뉴스에 끌려가게 됩니다. 독자들은 뉴스 이상을 원하는데 여전히 낡은 뉴스를 쏟아내고 있는 건 아닌가 돌아보게 됩니다.

저는 새해에 이런 걸 해보고 싶습니다.

해커톤 프로그램을 여러 가지 형식으로 실험해 보고 싶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잠잠해지면 저널리즘 해커톤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고요. 비대면으로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무엇보다도 솔루션 저널리즘 방법론과 해커톤을 연계해서 문제를 규정하고 해법에 접근하는 저널리즘 프로젝트를 꾸려보고 싶습니다. 관심있는 분들과 후원하실 분들은 연락 주십쇼. 지역과 시민사회, 미디어 교육과 연계하는 다양한 프로젝트가 가능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언론이 답을 내놓아야 한다는 게 아니라 답을 찾는 과정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문제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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