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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사 징벌적 손해 배상, 어디까지 가능할까.

A wooden gavel rests on top of an open law book in front of a row of law books that is out of focus in the background. Photographed using a shallow depth of field.

정청래 의원이 언론사에 징벌적 손해 배상을 물리는 법안(언론중재 및 피해구제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발의했다.

악의적인 언론의 허위 왜곡 보도에 강력한 처벌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많고 정 의원 역시 언론 보도의 피해자라 강력한 문제의식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언론인권연대 역시 오랫동안 징벌적 손해 배상의 도입을 요구해 온 것으로 알고 있다.

쉽지 않은 이슈지만 몇 가지 짚고 싶은 부분이 있다.

1. 정청래 의원의 제안 이유 가운데 언론 관련 재판의 1심 승소율이 49.3% 밖에 안 된다는 것은 징벌적 손해 배상과는 무관한 이야기다. 오히려 정당한 언론 보도에 대한 재갈 물리기 식의 소송이 많다는 의미도 된다.

2. 언론사 상대 소송이라는 건 동전의 다른 면처럼 언론의 허위·왜곡 보도 때문에 억울하고 부당한 피해를 입은 경우도 있겠지만 공익적인 언론 보도를 소송으로 겁박하는 경우도 있다. 피해자 구제 못지 않게 언론의 자유 보호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

참고로 지난 200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후보는 한겨레를 상대로 50억 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낸 적도 있었다.

언론중재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승소한 경우에도 배상액이 청구액의 10분의 1 밖에 안 된다는데 의도적으로 허위의 사실을 퍼뜨리는 경우가 아니라면 위법성 조각 사유가 인정된다는 게 대부분의 언론 관련 판결의 논리다.

3. 정청래 의원의 법안은 최고액을 높이자는 것이라 실제로 이 법이 통과된다고 해서 언론사 손배 규모가 늘어날 것 같지는 않다. 일단 이 법이 없어서 손배 규모가 적은 것이 아니고 지금도 거액의 손배 판결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장 최근에는 고발뉴스 이상호 기자가 가수 김광석씨의 부인 서해순씨에게 1억 원의 손해 배상을 하라는 판결도 있었다. 방송 조작 논란이 있었던 SBS 찐빵 소녀 사건은 지난 2013년 3억 원의 손해 배상이 확정됐다. 각각 청구액은 6억 원과 10억 원이었다. 조선일보는 세월호 사고 현장에서 민간 잠수사로 참여했던 홍가혜씨를 정신질환자로 매도했다가 6000만 원의 손배 명령을 받았다.

4. 언론 보도로 인한 피해 규모를 정확하게 입증하기도 쉽지 않지만 지금까지는 법원이 피해가 어느 정도라고 판단해서 이만큼 배상하라고 판결을 했다면 이 법이 통과될 경우 피해 규모의 최대 3배까지 배상 금액을 부과할 수 있게 된다. 만약 피해자가 주장하는 피해 규모가 그대로 받아들여진다면 이상호 기자는 18억 원, SBS는 30억 원을 물어야 했을 거라는 이야기다.

5. 영국과 미국 법에서는 징벌적 손해 배상을 인정하고 있지만 한국 법은 기본적으로 전보배상(Compensatory damages)의 원칙을 따른다. 피해를 입은 만큼 배상을 한다는 의미다. 최근에는 하도급법이나 개인정보보호법 등에서 최대 3배까지 손해배상을 명령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지만 실제로 적용되는 사례는 거의 없다.

게다가 한국은 민사 손해배상과 별개로 언론사를 상대로 형사적으로 명예훼손 고소가 가능한 많지 않은 나라 가운데 하나다. 민사와 형사를 한꺼번에 걸거나 형사에서 이기고 난 뒤 민사를 거는 경우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정말 악의적인 보도의 경우 언론인을 감옥에 보내고 동시에 손배를 받아내는 것도 가능하다.

6. 악의적이고 의도적으로 심각한 피해를 일으킨 언론 보도의 경우 강력한 처벌이 있어야 할 것이다. 누구도 여기에 반대할 사람은 없다.

7. 최강욱 열린민주당 의원이 최근 KBS 저널리즘토크쇼J에 출연해 “악의적 허위 보도에 대해서는 언론사가 망하는 수준의 배상액을 묻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겠지만 매우 위험한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최 의원은 지금 검찰 조사를 받고 있는 입장이고 자신을 향한 언론 보도의 대부분이 왜곡 보도라고 주장하고 있다. 최 의원은 억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최 의원 관련 보도 가운데 망하는 수준으로 배상을 해야 할 만큼 악의적인 왜곡 보도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언론 보도에 문제가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기레기를 퇴출하는 법 같은 걸 만들 수는 없다.)

8. 이와 관련해 최근 많이 인용되는 기사가 “징벌적 손해 배상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여론이 81%”라는 미디어오늘의 여론 조사 결과였다. 정확한 질문은 “귀하께서는 ‘허위·조작 가짜뉴스’를 보도한 언론사에 대해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견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인데 일단 이런 질문을 받으면 반대할 사람은 많지 않다. “나쁜 언론은 처벌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세요?”와 다를 바 없는 원론적인 질문이고 상식적인 답변 비율이다. 다만 찬성한 사람들이 징벌적 손해배상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했을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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