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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철학’을 읽다.

‘사건의 철학’은 질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를 알기 쉽게 풀어쓴 책이다. 철학아카데미의 이정우 선생이 썼다. 방정식 따위나 건성으로 풀다가 학교를 겨우 졸업한 내게 이 책은 충격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철학이 현실을 바꿀 수 있으리라고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새로운 고민을 다시 하게 됐다. 들뢰즈는 내게 세계를 보는 전혀 다른 방식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민우가 자전거를 타고 내려가다 다혜와 부딪힌다. 다혜는 쓰러지고 들고 있던 책은 바닥에 흩어진다.

두 사람이 부딪히는 건 그야말로 순간이지만 이 사건은 두 사람의 운명을 바꿔놓는다. 사건은 아주 잠깐 존재했다가 사라지지만 그 의미는 오래 남아 영향을 미친다. 사건은 물체의 표면효과고 의미는 사건의 표면효과다. 두 사람이 부딪혔을 때 그 물리적 작용이 사건을 만들고 사건이 의미를 만든다. 사건은 물체의 표면에 달라붙어 있다가 솟아오른다. 이를테면 자전거의 앞바퀴나 사람의 무릎에서 튀어나온다.

의미는 그 의미를 읽어내는 주체와 무관하지 않지만 그 주체가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민우와 다혜가 이 사건에 의미를 두는 것은 이 사건이 일련의 계열화된 사건들 사이에서 이미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를테면 다혜가 매우 예뻤고 민우가 한눈에 반했기 때문에 민우의 자전거가 다혜의 무릎이 부딪혔을 때 이 사건은 의미를 갖는다.

사건이 모두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사건이 솟아올라 어떤 계열 안에 자리잡을 때 비로소 의미도 드러난다. 사건은 계열화될 때만 의미를 갖는다. 이 사건은 자전거의 앞바퀴와 무릎의 접촉이 아니라 민우와 다혜의 만남, 그리고 첫눈에 반함으로 계열화된다. 이 사건의 의미는 민우가 만드는 게 아니라 사건에 따라온다(부대한다).

사건에는 규칙이 없지만 유형화할 수는 있다. 그런 특이성의 체계를 객관적 선험이라고 한다. 선험이란 경험에 앞선다는 말이다. 사건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객관적 선험 안에 자리를 잡을 뿐이다.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는 우리가 딛고 있는 현실, 그런 현실을 구성하는 객관적 선험을 발견하고 그 구조를 파헤치는 학문이다.

후기구조주의는 이런 구조를 파헤치되 다양한 가능성을 모색한다. 구조주의에서는 의식의 바깥, 구조를 사유했지만 후기구조주의에서는 구조의 바깥, 다시 말하면 바깥의 바깥을 사유한다. 후기구조주의에서 무의미는 거꾸로 의미가 굉장히 많다는 말이다. 무의미는 의미가 분화되지 않은, 이를테면 바둑판의 빈칸 같다고 보면 된다. 무의미한 사건이 어떤 계열화된 구조에 자리를 잡을 때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된다.

후기구조주의는 계열화의 너머를 꿈꾼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객관적 선험의 장에 존재하는 온갖 계열화 가운데 하나의 계열화가 현실화된 세계다. 다른 세계, 다른 계열화도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한 사회의 계열화 방식을 독사라고 하고 그 독사를 넘어서는 것이 바로 파라독사, 역설이다.

무의미와 역설은 저항의 개념이다. 실천철학으로 가면 어떤 사회와 시대에 통용되는 계열화를 코드(독사)라고 하고 그 코드를 부정하는 힘을 욕망(파라독사)이라고 한다. 다른 계열화의 다른 세계를 꿈꾸려면 체제의 격자를 가로지르는 노마드(유목민)적 주체가 필요하다.

(일상의 영역에서 더 쉬운 언어로 이야기돼야 한다. 일단 내용 정리만 하고,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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