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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빌려서 직원들 주식 사준다… 차입형 ESOP.

Written by leejeonghwan

July 3, 2005

위기에 직면하면 기업은 직원들을 자르거나 임금을 깎는 선택을 해야 한다. 1990년대 초반 미국의 항공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걸프전쟁이 터지면서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팬아메리칸항공을 비롯한 주요 항공사들의 파산신청이 잇따랐다. 업계 1위였던 유나이티드항공도 예외는 아니었다.

직원들을 자르느냐 임금을 깎느냐의 갈림길에서 유나이티드항공은 두번째를 선택했다. 이 회사는 임금을 깎고 일을 늘리는 대신, 고용을 안정시키고 줄어든 임금만큼 주식을 사서 보상해주기로 했다. 임금이 많게는 15.7%까지 깎였지만 회사는 현금과 차입을 동원해 주식을 사서 나눠줬고 그 결과 전체 주식의 55%가 직원들 몫으로 떨어졌다.

다른 항공사들은 직원들을 잘라냈고 파업과 엄청난 손실을 겪어야 했지만 유나이티드항공은 달랐다. 임금은 깎였지만 고용은 유지됐고 다행히 주가가 크게 뛰어 올랐고 직원들은 엄청난 평가이익을 챙길 수 있었다. 회사 입장에서도 고용비용 절감은 물론이고 정부의 세금감면 혜택까지 받아 이익도 크게 늘어났다. 직원들이 주주 입장에서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수익성도 크게 좋아졌다.

오는 10월이면 우리나라에도 차입형 ESOP가 전면 도입된다. 차입형 ESOP는 회사에서 빚을 내서 주식을 사고 그 주식을 직원들에게 나눠주는 제도를 말한다. 임금의 일정부분을 적립하거나 회사와 공동으로 출연하는 방법도 있다. 별도의 출연 없이 배당이익으로 차입금을 상환하는 방법도 있다.

ESOP(Employee Stock Ownership Plan)는 종업원주식인수제도의 약자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우리사주신탁제도라고도 부르는데 ESOP와 우리사주제도는 또 다르다. 우리사주제도는 직원들이 직접 주머니를 털어 주식을 사야 하지만 ESOP는 회사가 직접 비용을 들여 직원들에게 주식을 나눠주는 개념이다. 기업의 이익을 직원들과 공유하는 부가급여의 성격을 띤다. 기업 입장에서는 이익이 났을 때 임금을 올려줄 것이냐, 주식을 나눠줄 것이냐를 선택할 수 있다.

직원들이 주식을 갖고 경영에 참여하면 기업운영의 투명성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 소유 집중을 완화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적대적 인수합병을 방어할 수도 있다. 직원들 입장에서는 소속감과 주인의식, 책임의식도 강화된다. 회사 입장에서는 임금인상을 억제하는 것은 물론이고 주식매입에 들어가는 비용을 모두 손비처리하고 세금혜택을 받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ESOP는 노동자와 주주의 상충되는 이해를 원만히 조절하는 기능이 있다. 유나이티드항공의 사례에서 보듯 ESOP는 비용절감과 고용안정, 장기적으로는 주가상승에도 기여한다.

이번에 브릿지증권을 인수하기로 한 골든브릿지와 이 회사 노조도 차입형 ESOP를 적극 활용할 계획이다. 골든브릿지는 우선 400억원의 인수대금 가운데 50억원을 ESOP에 배정하기로 했다. 기자회견에서 이상준 골든브릿지 사장은 ESOP 지분비율을 50%까지 높이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를 두고 브릿지증권 노조 조합원들 사이에서는 앞으로 3년 동안 임금을 절반으로 깎고 그 절반으로 주식을 산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그러나 확인 결과, 골든브릿지나 노조나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잡혀있지 않은 상태다.

아마도 브릿지증권은 ESOP가 본격적으로 경영에 참여하는 최초의 사례가 될 전망이다. 성공의 관건은 골든브릿지와 ESOP가 각각 신규사업과 기존사업의 영역에서 얼마나 유기적으로 잘 결합하고 경영개선에 기여하느냐에 달려있다. ESOP의 지분을 50%까지 늘리겠다는 이성준 사장의 약속이 지켜질 것인가도 관심거리다.

민주노동당 경제민주화운동본부 송태경 정책실장은 ESOP의 도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브릿지증권의 경우, 노동자들이 회사의 청산을 막기 위해 일방적으로 희생을 떠안는 방식은 안 된다”고 지적했다. 송 실장은 “노동자들에게 급여삭감을 강요하기 보다는 회사에서도 대응출연 방식으로 부담을 나눠 짊어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민주노동당은 ESOP가 기업민주화는 물론이고 실업과 비정규직 등 노동 문제를 푸는 핵심 열쇠라고 보고 정책적으로 ESOP를 지원하고 있다.

송태경 실장은 “ESOP는 노동자가 직접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말한다. 송 실장은 “ESOP나 노동자 경영참여가 회사의 선의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얻어내는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이번 브릿지증권의 경우에도 노조의 강력한 반발과 BIH에 대한 사회적 문제의식이 ESOP의 도입을 가능하게 했다고 볼 수 있다. ESOP가 확산되려면 그만큼 노동운동 진영의 협상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유철규 성공회대 교수는 “ESOP를 통한 경영참여도 바람직하지만 주주가 아니라 노동자로서 경영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유 교수는 “ESOP가 자칫 노동자의 경영참여를 가로막는 장벽이 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우리나라에 도입된 우리사주제도나 ESOP는 대부분 재테크의 성격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노동자의 경영참여는 미미하거나 형식적인데 그치고 그나마 의결권조차 주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10월부터 차입형 ESOP가 도입되면 부실기업의 매각에 종업원들이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지난해 대우종합기계의 경우는 실패로 끝났지만 차입을 해서 경영권을 인수하고 이익이 나면 배당을 받아 갚아나가는 방식이 가능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ESOP의 한계와 실패사례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1990년대를 ESOP로 위기를 넘어섰던 유나이티드항공은 2000년 들어 다시 위기를 맞는다. 경영실적이 악화되면서 이익배분 문제를 놓고 경영진과 노조의 갈등이 깊어졌고 ESOP는 이런 위기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다. 노조가 경영을 장악하면서 인건비는 계속 올라갔고 감원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특히 주가가 떨어질 때 ESOP는 취약했다. 유나이티드항공은 내리막길을 걷다가 결국 2002년 파산을 신청했다.

이정환 기자 top@leejeonghw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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