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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중, “나 돌아갈래.”

Written by leejeonghwan

November 30, 2001

김우중씨는 돌아와야 한다. 그가 묶어놓은 매듭은 그가 풀어야 한다. 우리나라 경제는 그때야 비로소 새로운 페이지를 넘길 수 있을 것이다. 김우중씨 가 곧 돌아올 것이라는 소문이 어지럽게 나돌았던 지난 몇달, 되살아난 대우의 망령이 혼란스러운 기억을 헤집고 돌아다녔다. 딱히 새로울 건 없지만 여전히 고통스럽고 아픈 기억들이다. 그에 대한 해석은 여전히 크게 엇갈리고 있다. 기자는 어딘가에 숨어 귀를 곤두세우고 있을 김우중씨의 생각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돌아가고 싶어. 사람들 눈을 피해 프랑스로 핀란드로 이탈리아로 숨어다닌지도 벌써 이년째야. 오랜 여행에 이제는 몸도 마음도 모두 지쳤어. 내 나이 올해 65살. 이제는 조금씩 노후를 생각해야 할 것 같아. 이렇게 이역만리 객지에서 쓸쓸하게 눈을 감을 수는 없지 않겠어? 끔찍한 일이야.

이래뵈도 한때는 370개 해외 법인과 1040개 지사를 거느렸지. 가는 데 마다 미국 대통령 못지 않은 환영을 받았지. 그땐 정말 세상은 넓고 할일은 많았어. 대우의 태양은 지지 않는다고 큰소리치면서 세계를 주름잡았던 내가 이렇게 사기꾼 취급을 받으면서 쫓겨다니는 신세가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언젠가 석 변호사와 통화하다가 이제 그만 돌아가고 싶다고 그랬더니 그 이야기가 언론에 흘러 들어간 모양이야. 요즘 들어 부쩍 신문에 내 이야기가 많아졌어. 꽤나 시끄럽더군. 언젠가 한 신문사 경제 부장은 아는 사람을 통해서 내게 구구절절 편지까지 보냈던 걸. 답장을 쓰기도 그렇고 해서 그냥 편지를 가져온 사람에게 이번 재판 끝나면 들어갈지도 모르니까 가서 만나자는 말을 전해달라고 했지.

그랬더니 왠걸, 몇일 있다가 난데없이 예금보험공사에서 시비를 걸고 나왔지. 그때가 11월8일이던가. 어디 보자, 여기 있다.

“김우중씨 가 부인과 두 아들 명의로 시가 172억원 규모의 포천 아도니스골프장 지분 81.4%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또 두 아들 명의로 취득한 시가 30억원 규모의 서초구 방배동 토지와 딸 명의로 취득한 22억원 규모의 이수화학 주식도 확인됐다. 이밖에도 직원 명의로 시가 237억원 규모의 영종도 토지를 불법 취득하는 등 김우중씨의 숨겨진 재산은 모두 1413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밝혀졌다.”

뭐 딱히 새로운 사실도 아니잖아. 이미 한바탕 쑤실대로 쑤셔놓고 이제와서 새삼스럽게 숨겨둔 재산을 새로 찾아낸 것처럼 떠드는 건 또 뭐야. 나름대로 합법적인 매매방식을 거쳤는데 말이야. 게다가 석 변호사 말처럼 아직 재판중인 문제를 뭐라고 시비걸 수는 없는 거잖아.

다 알려진 사실들을 끌어 모아놓고 왜 새로운 이야기처럼 부풀린 것일까. 말 들어보니까 처음에는 우리 회사말고 고합에 대한 조사결과를 발표할 계획이었다던데. 그런데 은근슬쩍 내 이야기가 끼어들면서 고합 이야기는 멀찌감치 뒤로 밀려나버렸지. 다음날 보니까 신문들마다 앞다투어 “김우중 1413억원 은닉”이라고 호들갑스러운 제목을 달고 기사를 내보냈더라고.

분위기를 봐서 은근슬쩍 들어갈려고 그랬더니 이젠 다 틀렸군. 아마 나보고 들어오지 말라는 경고 같은 거 아니었을까. 본격적으로 김우중 죽이기가 시작되는 모양이야. 아예 발을 들여놓을 엄두를 못내도록 말이야.

아마 맞을 거야. 이미 몇몇 신문에 내가 올해 안에 들어갈 계획이라는 기사가 실렸으니까. 지금 하고 있는 재판이 끝나면 들어간다고 그랬으니까.
그런데 어제 보니까 재판도 한정없이 늘어질 것 같아. 되는 일이 없군. 대우자동차 김태구 (전)사장하고 대우 강병호 (전)사장, 이상훈 (전)전무도 모두 보석으로 풀려났더라고. 도대체 재판을 하겠다는 거야 뭐야. 이렇게 질질 끌면 언제 끝내나. 원래 11월에 끝나기로 했던 재판이 이러다가는 내년까지 이어질 것 같아. 이래서야 올해 안에 들어갈 수 있겠어?

내가 들어가면 또 한바탕 시끄러울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흥. 그래, 시끄럽기야 하겠지. 그럼 뭐야, 나보고 여기서 늙어 죽으라고?

의사 말로는 안정을 취하라는데 갈수록 골치거리만 쌓이는군. 위장병에다 만성 경막하혈종에다 복통, 두통, 요즘은 정말 옛날 같지 않아. 정치적인 것 다 떠나서 이제는 정말 몸이 고달파서라도 빨리 들어가고 싶어.

쳇, 얼마전에는 김우일이 한번 크게 터뜨렸더군. 마지막에 구조조정본부장까지 시켰더니 배신을 때려? 어줍잖게 양심 고백이니 뭐니 하면서 말이야. 그게 <월간조선> 11월호였나? 뭐 구국의 결단처럼 비장한 느낌까지 들더군. 다들 입다물고 조용히 있는데 왜 혼자서만 떠들어? 어디 보자. 뭐라고 그랬더라. 정치권과의 유착이라고?

“정치인 만나는 건 회장이 직접 했기 때문에 그 규모나 액수는 전혀 모릅니다. 때문에 뇌물사건이 터질 때마다 곤욕을 치렀어요. 한번은 회장이 국방부 장관에게 돈을 준 사건이 드러났는데 회장의 오른팔로 불리던 아무개 전무를 불러 당신이 준 것으로 하라고 입을 맞췄어요. 조사 과정에서 잘못하다간 몇 년형 떨어질 분위기가 조성되자 사실은 회장이 주었다고 실토해버렸습니다. 화가 난 회장이 그를 한직으로 좌천시켰는데 술로 세월을 보내다 간암으로 죽었어요. 장례식에 끝내 회장이 나타나지 않았다더군요.”

그래, 내가 정치인들한테 5억원씩 든 가방을 승용차 트렁크에 실어주곤 했다는 말도 했지? 맞아, 한때는 ‘김우중 리스트’가 있을 거라는 소문도 있었다지? 그때 찔끔한 사람들 많았을 거야. 나한테 돈 받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잖아. 뇌물도 뇌물이지만 기업들 인수·합병하면서 특혜나 편법지원이 좀 많았어? 사실 그런 것들 신경쓰느라 회사가 엉망이 된 거 아냐.

아무튼 돌아보니까 마지막에는 참 한심했어. 가라앉는 배라고 다들 자기 욕심 채우거나 눈가리고 아웅하기에 바빴지. 나도 특유의 임기응변과 막연한 낙관 논리로 밀어붙이고 있었고 회사 곳곳에 비효율과 부실의 뿌리가 깊었어. 대우의 패망은 이미 충분히 예견돼 있었던 걸 거야. 다만 다들 설마 대우가 망하겠느냐, 대우가 무너지면 우리나라가 무너진다는 억지스런 대마불사의 논리로 버티고 있었을 뿐이지.

김우일이 뭐랬더라? “그것은 사기행위였습니다. 이미 모든 계열사가 완전히 거덜난 상태였는데 어떻게 재기를 합니까. 40조원의 부실을 감쪽같이 숨긴 채 모든 임직원들이 나서서 기초는 튼튼한데 유동성에 문제가 있어 잠시 어려움에 빠진 것뿐이라고 거짓말을 퍼뜨렸습니다. 정부에서 금융기관에 어음 연장을 지시해 겨우 숨을 넘겼죠. 실제로는 1999년 3월에 이미 부도가 났는데 은행들이 만기가 되어 돌아온 어음을 쌓아놓고 있었던 겁니다.”

뭐 딱히 틀린 말은 아니야. 그렇지만 그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었지. 어떻게든 최악의 상황은 막아야 했으니까. 나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해.

그래도 따져보면 대우가 잘한 것도 많잖아. 왜 다들 헐뜯으려고만 하는 거야? 흠.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지겠지. 그래, 진실을 밝혀야지. 나도 아직 내놓을 수 있는 카드가 남아있단 말이야. 두고 보라고.

내가 돌아가면 굉장히 시끄럽겠지? 기소중지 상태니까 돌아가자 마자 검찰에 끌려갈 거야. 어차피 금방 보석으로 풀려날 거지만 말이야. 아무튼 조사 받으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마음껏 할 수 있겠지. 아마 내가 입을 열면 정치권도 발칵 뒤집힐 거야. 요즘같이 어수선할 때는 하루 아침에 정치권 판도를 바꿔 놓을 수도 있지. 마음만 먹으면 정부하고도 은밀하게 타협할 여지가 있을 거야.

언제 들어가는 게 좋을까? 요즘처럼 여론이 안좋을 때 굳이 서둘러 들어갈 필요는 없겠지. 한때는 김우중이 희생양이라는 이야기도 많았는데 말이야. 그런데 요즘은 나 혼자 다 뒤집어 쓰는 분위기란 말이야. 이렇게 되면 올해는 물 건너 간 것 같고 조금 더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아무튼 될 수 있으면 이번 정부하고는 부딪히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래저래 껄끄러워. 늘 싸우기만 했잖아. 그때 이기호나 강봉균이 조금만 더 도와줬어도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야. 요즘 현대는 그렇게 살리려고 애쓰면서 그때는 왜 그랬어? 지금 하이닉스반도체만큼만 해줬어봐. 대우가 무너졌겠어?

아무튼 어차피 올해 안에 들어가기 어려울 것 같으면 대선을 노려 은근슬쩍 내년 하반기에 들어가거나 아니면 아예 정권이 바뀌기를 기다려 대선 끝나고 난 다음에 들어가는 것도 좋을 거야. 천천히 따져 봐야지.

어때, 김우중이 여기서 쓰러질 것 같아? 천만의 말씀. 옛날처럼 다시 일어서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명예 회복은 하고 싶다 이거야. 하고 싶은 말도 많고 해야 할 말도 많아.

내가 이대로 여기저기 떠돌다가 조용히 사라져 버리기 원하는 사람들 많겠지? 그렇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거야. 내가 묶어놓은 매듭은 내가 풀어야지. 그래야 수레바퀴가 제대로 돌아갈 것 아닌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대우와 김우중에 대한 평가도 다시 내릴 수 있을 것이고 말이야. 그래, 지금부터 슬슬 돌아갈 채비를 해야겠다.

이정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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