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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닝’과 ‘헛간을 태우다’.

이창동의 영화 ‘버닝’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소설 ‘헛간을 태우다’가 원작이라고 한다. 원작이라고는 하지만 모티브만 따왔을 뿐 전혀 다른 내용이라는데 시놉시스를 살펴보니 기본 골격과 디테일을 상당 부분 그대로 살린 듯.

하루키의 소설에서는 이름 없는 남자로 나오지만(영화에서 이름은 벤이다), 주인공이 이 남자를 피츠제럴드의 ‘그레이트 개츠비’ 같다고 생각하는 대목이 나온다. 사실 이 개츠비는 하루키의 소설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인물이다.

약간씩 성격은 다르지만,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에서의 나가사와,
‘기사단장 죽이기’에서의 멘시키,
‘양을 쫓는 모험’에서의 ‘쥐’,
‘댄스댄스댄스’에서의 고혼다 등등.

잘 생겼고(손가락도 길고) 성격도 좋고 재능도 있지만(물론 돈도 있고) 영혼을 잠식 당한 남자. 하루키는 ‘양을 쫓는 모험’과 ’댄스댄스댄스’에서 양이 들어간 사나이와 양이 빠져나간 사나이라는 상징을 동원했다. 이들은 양을 쫓지만 양을 다시 찾을 수 없다는 걸 안다. 양이 들어온 이유도 알 수 없지만 양이 빠져나간 이유도 알지 못한다. 재능이란 그런 것이고 운명이란 불가항력적이다. 아마도 이창동 역시 하루키의 세계관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상징을 어느 정도 이해한 듯하지만 결론은 전혀 다른 영화가 된 것 같다.

‘헛간을 태우다’의 그녀(영화에서는 해미)는 ‘1Q84’의 후카에리와 ‘댄스댄스댄스’의 키키나 유키처럼 주인공을 다른 세계로 이끄는 영매의 역할을 한다. 종종 그렇듯이 ‘개츠비’와 ‘영매’의 만남은 치명적이다. ‘댄스댄스댄스’에서 유키는 살아남았지만 키키는 고혼다에게 목 졸려 죽는다.

영화는 안 봤지만 남자(벤) 역할을 맡은 스티븐 연은 고혼다 같은 역할을 하기에는 그럴 듯 해 보인다. (엄밀히 말하면 고혼다와 쥐는 전혀 다른 성격의 인물이다.) 유아인은 어쩐지 하루키 소설의 주인공으로는 너무 세다는 생각이 들지만 어차피 다른 스토리라니까 상관 없을 것 같고. 이창동이 이 미묘한 원작을 어떻게 영화로 구현했을지 궁금하긴 하지만 어쩐지 안 보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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