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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본 것이 너의 것은 아니다.

Written by leejeonghwan

May 20, 2020

‘DNA : 51번째 사진의 비밀’ 리뷰. (학교 과제로 쓴 글입니다.)

역사에 가정은 의미가 없지만 만약 로잘린드 프랭클린이 1958년 37세의 나이로 요절하지 않았다면 1962년 프랜시스 크릭과 제임스 왓슨, 모리스 윌킨스 등과 함께 노벨상을 받았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노벨상은 살아있는 사람에게만 수여된다.

한국에도 번역 출간된 ‘로잘린드 프랭클린과 DNA’란 책에는 왓슨의 고백이 담겨 있다. 1984년 한 과학 학술대회에서의 연설 가운데 한 대목이다. 노벨상 수상 32년 만의 일이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크릭과 제가 구조를 훔쳤다는 이야기가 있었죠. 윌킨스가 프랭클린의 X선 사진을 보여줬는데 와! 그것이 나선이었어요. 그리고 한 달 뒤 우리는 구조를 완성했어요. 윌킨스는 그것을 제게 절대로 보여줘서는 안 됐던 거죠. 저는 서랍을 뒤져서 사진을 훔친 게 아닙니다. 누군가가 그것을 제게 보여줬고 제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대강 윤곽을 잡은 거죠. 하지만 프랭클린의 사진이 중요한 사건이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심리적으로 그것이 우리를 움직였죠.”

여러 기록과 증언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프랭클린의 DNA 사진을 보지 못했다면 크릭과 왓슨이 DNA가 이중 나선 구조라는 이론을 만들지 못했을 거라는 사실이다. 공범이라고 할 수 있는 윌킨스가 노벨상의 공동 수상자였다는 사실도 공교롭다. 윌킨스의 자리에 프랭클린이 있었어야 했고 프랭클린은 크릭과 왓슨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았어야 했다.

문제의 핵심은 이들이 단순히 프랭클린의 사진을 훔쳐 본 정도가 아니라 프랭클린의 사진에 담긴 연구 성과를 자신들의 것으로 포장했다는 데 있다. 프랭클린이 독자적으로 이중 나선 구조에 대한 이론을 정립했는지 안 했는지는 해석이 엇갈린다. (언급은 있지만 크릭·왓슨과 비교하면 완결된 상태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니다.

1954년에 출판된 문제의 논문의 각주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여기서 언급된 정보는 논문이 출판되기 전에 친절하게도 윌킨스와 프랭클린이 알려줬다. 우리는 이에 대해 킹스칼리지 연구팀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이 데이터가 없이는 우리 모델의 완성이 불가능까지는 아니라도 이뤄지기 어려웠을 것임을 언급하고 싶다.”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한 언급이었겠지만 두 가지가 사실과 다르다. 첫째, 프랭클린이 알려준 것이 아니고 윌킨스가 프랭클린 몰래 빼돌린 것이다. 둘째, 실제로 사진 없이는 이론 확립이 불가능했다고 보는 게 맞다. 적어도 1년 뒤에 이런 논문을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적당히 몇 줄 걸치는 정도로 예의를 갖췄을 뿐 프랭클린이 죽고 난 뒤에는 프랭클린의 사진을 평가 절하하고 인신공격에 가까운 비난도 남발했다. 역사는 승자만 기억하고 죽은 사람은 말이 없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1954년의 문제의 논문이 실린 잡지에는 프랭클린의 논문도 실렸다. 최초로 공개되는 사진을 공개되기도 전에 인용해서 논문을 쓰고 그게 같은 잡지에 동시에 실린 것이다.

이 놀라운 이야기에서 몇 가지 생각할 부분이 있다.

첫째, 만약 이들이 아이디어를 훔쳐가지 않았다면 프랭클린이 직접 DNA의 구조를 밝혀냈을까. 가능했겠지만 역시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프랭클린은 3년 뒤에 세상을 떠났을 테니까. 실제로 프랭클린은 크릭·왓슨의 논문이 게재된 잡지에 동시에 논문을 게재했지만 이중 나선 구조에 대한 이론을 완성하지는 못했다. 같은 사진을 보고도 읽는 게 달랐던 것이다.

둘째, 프랭클린도 뛰어났지만 사진 한 장에서 인사이트를 끌어낸 크릭과 왓슨의 실력도 평가절하할 수는 없다. 비난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이들이 프랭클린의 연구 결과를 훔쳐갔다고 비난하는 것은 과도하다.

셋째, 그렇다면 어떻게 행동하는 게 최선이었을까. 프랭클린에게 공동 연구를 제안하고 공동의 업적으로 가져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는 그럴 정도의 관계가 아니었던 것 같고 오히려 거꾸로 아이디어만 넘겨주는 결과가 됐을 수도 있다. 학문도 경쟁이라 결국 누가 먼저 퍼블리싱하느냐에 따라 주도권이 달라지게 된다. 그렇다고 사진이 공개될 때까지(프랭클린이 논문을 쓸 때까지) 기다렸어야 했을까. 여전히 쉽지 않은 문제다.

넷째, 학문의 업적은 개인의 것이지만 학문의 성과는 인류 모두의 자산이다. 그렇다면 아직 공개하기 전의 연구 성과는 누구의 것일까. 여기서는 단순히 사진 한 장이지만 사진이 아니라 출간하기 전의 논문 초안이라고 한다면 그걸 미리 훔쳐보고 인용해서 후속 논문을 쓴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윤리 위반이다. 당신이 본 것이 당신의 것은 아닌 것이다.

클릭과 왓슨 못지 않게 프랭클린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아야 하고 뒤늦게나마 인정을 받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클릭과 왓슨이 자신들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프랭클린을 깎아내린 것은 어떤 이유로도 용서받을 수 없는 비열한 짓이었다.

아이작 뉴튼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거인의 어깨 위에 서있을 때 더 멀리 내다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진실 앞에 겸허할 필요가 있다.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프랭클린 덕분에 겨우 좀 더 진실에 가깝게 다가설 수 있었던 것이다. 51번째 사진을 둘러싼 오래된 논쟁은 진실에 다가가는 방법에 대한 무거운 질문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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