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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학 운동과 야학 동아리.

생각나는대로 솔직하게 털어놓고 이야기하겠다.

먼저 반성하는 건 내가 지난 몇년 동안 야학 사람들과 제대로 소통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조금 주제 넘지만 달리 말하면 후배들을 키워내지 못했고 고민들을 함께 나누지 못했다. 늘 시스템을 고민하고 대안을 이야기했지만 그 실천의 지점을 찾지 못했고 좌절하고 체념하고 포기하기도 했다. 지난 몇년 동안 야학의 문제의식은 제자리에 머물러 있었고 오히려 후퇴되기도 했다. 원론만 공허하게 떠돌고 열정은 박제되어 퇴색됐다.

문제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가 살펴본다. 우리가 이곳에서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다시 반문해본다.

대안의 부재, 담론의 부재 시대다. 많은 사람들이 지배 담론의 지형에서 소외돼 있고 그걸 넘어설 대안을 고민할 힘이 없다. 대안은커녕 현실을 넘어설 힘도 없다.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현실을 견뎌내거나 무기력하게 방관하고 결국 현실에 순응한다. 그래서 모순은 확대 재생산된다. 흩어진 개인들은 무력하고 이기적이다.

배움은 현실을 넘어서는 힘이 될 수 있다. 야학은 그런 믿음을 구현하는 공간이다.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고민하고 함께 공부하고 대안을 찾아나가는 공간이다. 끊임없이 반성하고 되돌아 볼 것은 우리가 과연 현실을 넘어서고 있는가 하는 부분이다. 관성에 휘말려 현실을 묵인하고 방관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부분이다. 우리는 과연 치열하게 대안을 고민하고 있는가.

지난 몇년동안 성광야학은 한명의 활동가도 길러내지 못했다. 나부터도 이론가이기만 했을뿐 활동가로 바로 서지 못했고 그 활동의 영역을 개척하지도 못했으니 그 책임을 누구에게 물을 수도 없다. 무엇보다도 나는 후배들과 고민을 함께 나누지 못했다. 적극적으로 실천의 지점을 찾지도 않았다. 안타까운 것은 이제 이곳에 최소한의 문제의식과 지향 조차도 남아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변명 같지만 문제의식과 지향은 강제하는 게 아니라 합의되고 공유돼야 한다. 구체적이지 못하고 적극적이지 않아서였겠지만 지난 몇년 동안 나는 숱하게 많은 저항과 반발에 부딪혔고 이곳에서 이제 소수의 목소리가 됐다고 느낀다. 한편으로는 그 소수의 목소리에 야학이 해야할 고민과 부담이 전가됐다고도 느낀다. 변명 같지만 함께 고민할 사람이 없었다.

성광야학 사람들은 더이상 현실을 고민하지 않는다. 그게 위기의 진짜 본질이다. 지금 성광야학은 현실에 맞서는 운동 공간이 아니라 그냥 동아리처럼 보인다.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어울리지만 목표가 없는 이런 모임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 이런 강학들이 모여서 하는 수업도 방향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단단한 목표를 갖고도 어려울 텐데 아무런 목표도 잡혀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도대체 당신은 왜 수업을 하는가. 그것도 공짜로 말이다. 당신은 왜 소모임에 참여하는가. 수많은 토요일을 바쳐가면서 당신은 여기에서 무엇을 얻고 있는가. 당신은 여기에 무엇을 쏟아붓고 있는가.

치열하게 살지 못하는 강학들이 하는 수업이 학강들에게 현실을 넘어서는 힘이 될 수 있을까.

야학에 필요한 치열함은 사회적 의제를 보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당신이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야학의 수업은 학력 불평등과 그런 불평등을 만드는 사회적 계급을 인식하고 그런 인식의 바탕에서 고민돼야 한다. 그때 비로소 수업은 현실의 해방이고 극복이 된다. 수학이든 영어든 검정고시 수업이든 세미나든 소모임이든 어떤 종류의 공동학습이든 모두 마찬가지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 못지 않게 그 소통의 의제들이 필요하다. 어설픈 친목 모임에 그치지 않으려면 우리는 더 치열하게 고민하고 소통해야 한다. 야학은 대안을 고민하는 곳이다. 공부하고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곳이다. 그럴 자신이 없다면 당신은 학강이든 강학이든 이곳에 머무를 자격이 없다. 이곳은 따뜻한 공간이지만 동시에 치열하고 전투적인 공간이다. 이곳에는 나태한 감상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우리는 공동의 목표를 세우고 그 세부 과제들을 나눠야 한다. 이른바 분업 시스템이지만 단순한 분업이 아니라 의제를 공유하고 문제의식을 주고 받으면서 상승효과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치열한 현실인식이 전제돼야 한다. 공동의 목표와 과제들이 명확히 정립돼야 한다. 그런 목표와 과제가 없다면 우리는 도대체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고민 없이는 수업도 없다. 학강들을 깨어나게 하려면 강학들이 먼저 깨어야 하고 야학도 깨어있는 공간이 돼야 한다. 강학들이 먼저 기꺼이 배우려는 태도로 나서야 한다. 치열하게 현실과 맞서 싸우고 당면한 현실 이상을 내다보고 고민해야 한다. 고민하지 않고 공부하지 않는 강학들이 수동적인 학강들을 만든다. 그런 수업은 학강에게나 강학에게나 소모적이다. 그런 수업은 기만이다.

신입강학들이 별다른 교육도 없이 2주만에 수업을 맡을 수 있는 건 그 수업이 아무나 고민없이 맡을 수 있는 수업이기 때문이다. 성광야학은 그렇게 스스로 목표와 문제의식을 거세해왔다. 소모임도 방향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치열함이 없다면 영화모임이든 독서토론회든 어떤 다른 소모임이든 깊이를 갖출 수 없다. 그런 모임은 소모적이다.

성광야학은 표류하는 배가 됐다. 선배들부터 문제의식이 없기 때문에 후배들에게 아무런 문제의식도 불어넣을 수 없다. 새로운 학강과 강학이 들어오면서 계속 굴러갈 수는 있겠지만 여전히 방향은 없다. 동력도 없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아직 야학이 해야할 일들이 있고 야학만 할 수 있는 일들도 있다. 야학은 현실과 맞서 싸우는 공간이 돼야 한다. 서로 가르치고 배우면서 사라진 담론을 복원하고 그 가운데서 대안을 찾아나가는 그런 공간이 돼야 한다. 우리는 이 좁은 공간에 갇히지 않고 담론의 공간을 사회 전반으로 확산시켜 나가야 한다. 야학은 그래서 선구적인 실험이고 모든 사회운동의 최전선이다.

원점부터 다시 논의가 시작돼야 한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치열하게 싸우지 않으려면 야학을 떠나라. 수업이야 남아있는 사람들이 일주일에 두세번씩 나와도 되고 얼마든지 새로운 사람을 찾아도 좋다. 문제는 당신들의 게으르고 감상적인 태도다. 그게 야학이 몇년씩 표류하고 있는 이유다. 야학은 삶의 방식이다. 야학에 남으려거든 삶의 방식을 바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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