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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보유액으로 미국 빚 갚아주기, 그만둬야 된다.

Written by leejeonghwan

February 26, 2005

빚이 아무리 많아도 계속 빚을 낼 수만 있다면 문제될 게 없다. 지난 몇 년 동안 미국이 그랬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나라들이 엄청난 달러와 미국 국채를 사준 덕분에 미국은 빚더미를 끌어안고도 탄탄한 성장을 이어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계속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결국 빚은 빚이고 언젠가는 갚아야 하니까.

2월 22일, 한국은행이 달러 자산을 줄이려 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세계적으로 달러 투매가 확산됐다. 이른 바 한국은행 쇼크였다. 달러 자산을 내다판다는 건 달러 가격이 상대적으로 떨어진다는 걸 의미한다. 달러 가격이 떨어진다는 건 금리가 올라가고 결국 미국의 빚이 더 늘어난다는 걸 의미한다. 미국은 그동안 달러를 찍어내가면서 빚을 늘려왔고 그 달러를 받아줄 데가 있었지만 이제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다.

2월 24일에는 환율이 폭락하면서 잠깐이나마 원달러 환율 1천원선이 무너지기도 했다. 환율 1천원선이 무너진 것은 1997년 11월 이후 7년 3개월 만이다. 한국은행이 뒤늦게 해명에 나서면서 사태는 겨우 진정됐다. 한국은행은 그동안 엄청난 외환보유액 때문에 골머리를 앓아왔으면서도 이날 당분간 달러 자산을 팔 계획이 없다고 거듭 해명했다.

우리나라 외환보유액은 IMF 외환위기 무렵 73억달러에서 지난달 15일 기준으로 2002억달러까지 무려 28배나 불어났다. 우리나라의 외환보유액은 일본과 중국, 대만에 이어 세계 4위 규모다. 문제는 달러 약세가 계속되면서 달러 자산의 가치가 줄어든다는데 있다. 우리나라 외환보유액 가운데 달러 자산은 1600억달러 정도, 특히 미국 국채가 700억달러에 이른다는 게 일반적인 추산이다. 전체 미국 국채의 4% 규모다.

만약 한국은행이 미국 국채를 팔기 시작하면 미국 국채는 물론이고 달러 가치가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다. 당연히 미국의 적자도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된다. 2월 22일의 한국은행 쇼크는 일단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위험은 여전히 상존한다. 세계적으로 달러를 팔고 유로화나 엔화로 옮겨가는 분위기고 달러 약세는 이미 추세다.

우리나라처럼 외환보유액이 많은 나라들은 운신의 폭이 좁다. 외환보유액 가운데 달러 자산을 1600억달러로 잡으면 환율이 10원 떨어질 경우 1조6천억원이 날아간다. 환율 1140원선이 깨진 지난해 10월 이후부터 보면 4개월 만에 무려 20조원이 사라진 것으로 추산된다. 게다가 환율이 떨어지면 수출기업들 실적이 악화되고 주가가 떨어지면서 경기침체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더 큰 문제는 이렇게 환율이 떨어지고 한국은행이 환율 방어에 나서면서 외환보유액이 더 늘어난다는데 있다. 그렇다고 외환보유액을 줄이면 환율이 다시 떨어지고 한국은행은 또 환율 방어에 나서야 한다. 결국 외환보유액이 계속 늘어나는데도 환율이 계속 떨어지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환율 대책이 거의 무의미하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달러를 사들이면 시중에 돈이 풀리고 금리가 떨어진다. 그 돈을 흡수하려고 통화안정증권을 발행하는데 그 이자비용만 한해 6조원을 넘어선다. 여기에다 달러 자산의 가치 하락까지 감안하면 환율을 지키는데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가는 셈이다. 노진호 현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기회비용을 포함한 외환보유액의 사회적 비용이 국내총생산의 0.4%에 이른다는 조사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좀더 근본적인 문제는 미국의 쌍둥이 적자와 달러 약세 정책에서 비롯한다. 지난해 기준 미국의 대외채무는 국내총생산 대비 27%에 이른다. 재정적자와 경상수지 적자도 각각 4.5%와 6% 규모다. 감세 정책과 이라크 전쟁도 이 엄청난 적자에 한몫을 했다. 웬만한 나라라면 일찌감치 무너졌겠지만 미국의 경우는 다르다.

미국은 그동안 달러 약세를 방치하면서 무역적자를 줄여왔다. 그러나 달러 약세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면서 세계적으로 달러 이탈이 눈에 띄게 늘어났고 달러 약세가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최근 한국은행 쇼크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위기감이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마침 울고 싶은 애, 뺨을 때려준 격이다.

2003년 기준으로 미국은 미국을 제외한 세계 수출의 20%를 수입하고 있다. 적자는 늘어나는데 저축률은 1% 수준에 머물러 있다. 미국은 지난해 세계 저축의 80%를 끌어다 썼다. 하루 평균 20억달러 정도를 외국에서 빌리고 있다. 미국은 그렇게 다른 나라들에게 빌린 돈으로 그 나라들이 수출한 물건을 사들여왔다. 그동안 미국의 빚이 세계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됐다는 이야기다. 그런 미국이 무너지면 세계 경제가 한꺼번에 위기를 맞게 된다.

현재로서는 다들 눈치만 보면서 팔고 싶어도 팔지 못하는 상황이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이나 중국, 대만 등 외환보유액이 많은 나라들 가운데 하나라도 먼저 달러를 팔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투매가 확산될 수도 있다. 뉴욕타임즈의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최근 사설에서 “위기 폭발의 순간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면서 “한국을 비롯해 거액의 외환보유국들이 달러 보유액을 줄여나가기만 해도 달러화 가치에 치명적인 타격이 될 것”이라고 우려를 나타냈다.

물론 미국도 이런 위기를 마냥 방치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조만간 재정적자를 줄이고 금리를 높여 환율을 끌어올릴 가능성도 있다. 중국에 위엔화를 절상하라는 압력도 거세고 과거 플라자 합의 같은 세계에 빚 떠넘기기 조치가 단행될 가능성도 있다. 전창환 한신대학교 교수 같은 경우는 미국이 환율을 지키기 위해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있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높은 환율 덕분에 수출에서 짭짤한 재미를 봤다. 그러나 달러가 약세로 돌아서면서 수출 기업들은 경쟁력을 잃고 있다. 달러 가치가 회복될 거라는 기대도 많지만 분명한 것은 이제 미국에 의존하는 수출 중심 경제로 그동안과 같은 짜릿한 성장을 담보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무서운 속도로 쫓아오는 중국도 큰 위협이다. 우리는 이제 미국 시장을 상당부분 잃을 준비를 해야 한다. 상황에 따라서는 미국의 몰락 이후를 준비해야 할 수도 있다.

환율 하락과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규모의 외환보유액은 수요 공급의 문제라기 보다는 세계 경제의 구조적인 문제다. 고집스럽게 버티고 있는 중국이 위안화의 고정환율제를 포기하고 무너지면 위기는 더욱 확산될 수 있다. 미국에 목을 매고 있기 보다는 좀더 적극적이고 구조적인 대안을 모색해야할 시점이다.

하상주 대우증권 전문위원은 단순히 환율방어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성장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이야기다.

“결국 성장 방식의 문제다. 우리는 소비를 줄이면서 저축을 했고 미국은 저축을 줄이면서 소비를 했다. 무엇이 옳고 그르냐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다. 미국의 소비에 의존하는 수출 중심의 성장 방식이 한계를 맞았다면 대안을 찾아야 한다.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고 내수 소비를 확충하는 것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지금 미국의 달러경제가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정환 기자 top@leejeonghw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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