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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트 니어링 평전’을 읽다.

우리가 아는 스코트 니어링의 삶은 그가 버몬트와 메인의 농장에서 보낸 인생의 나머지 61년에 집중돼 있다. 우리는 그의 처음 39년을 알지 못하고 그가 왜 현실을 벗어나 숲속으로 숨을 수밖에 없었는가 이해하지 못한다. 이 책은 그에 대한 해답이다. 우리는 이 책에서 그의 다른 모습을 본다.

니어링은 평생에 걸쳐 자본주의와 맞서 싸웠다. 처음에 그는 약탈과 불로소득을 없애고 좀더 평등하고 건전한 사회를 만드는데 목표를 뒀다. 그는 진보진영이 나서서 사회의 생산과 분배 문제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 대안으로 공동체의 부활과 사회주의를 제안했다.

그는 문제의 핵심이 사회의 윤리, 이를테면 시민의식에 있다고 보고 교육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복지가 부유함보다 우선해야 하고 수요와 공급에 따른 임금 법칙이 최소임금 법칙에 의해 깨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늘 낙관적이고 때로는 지나치게 원론적이거나 이상적이었다. 그는 노동의 바탕 위에 세워지고 노동으로 지속되고 노동으로 부를 재창출하는 사회를 꿈꿨다.

서른살에 들어서면서 니어링은 관심을 기득권 계층에서 일반 대중으로 낮춰 잡는다. 기득권 계층에게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는 것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고 봤기 때문이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아무 생각없이 살고 낡은 사고를 고집하고 변화를 두려워하고 통속에 감동할 뿐 다른 어떤 것에도 움직이지 않은 보통 사람들”에게 그는 이제 희망을 걸게 됐다.

그는 특히 불로소득과 아동노동을 비롯해 사회의 분배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 들었고 곧 기득권 계층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다. 그리고 서른두살 되던 해에 처음으로 대학에서 쫓겨났다. 사회의 기본질서를 뒤흔든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대학은 자본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했고 그는 자본의 적이었다.

게다가 전쟁이 터지면서 그의 이상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공동체의 삶을 통해 자본주의를 극복하자던 그의 주장은 공허하기만 했다. 전쟁이 자본주의의 탐욕에서 비롯했다고 주장했지만 누구도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전쟁이 사라지길 바란다면 우리는 몇가지 기준을 정해야 한다. 특권을 없애고 경쟁 경제를 억누르고 노동자에게는 정당한 임금을 지급해야 한다. 불로소득은 사라져야 한다. 민주주의는 확장돼야 하고 경제 지도자도 정치 지도자처럼 선출돼야 한다.”

그는 몇군데 대학에서 더 잘리고 결국 어디에서도 일자리를 구할 수 없게 됐다. 언론도 마찬가지였다. 나중에는 어느 신문도 그의 칼럼을 실어주지 않았고 어느 출판사도 그의 책을 출판하려고 하지 않았다. 대중 선전활동도 거의 성과가 없었다.

그는 자서전에서 그 무렵의 절박한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극도로 긴박한 시대를 살고 있으므로 우리는 일반 시민들을 억지로 간섭하고 통제해야 하며 강제로라도 우리 생각을 그들에게 알려야 한다.”

그러나 그 무렵 실용주의 열풍은 숱하게 많은 지식인들의 눈을 멀게 만들었다. 실용주의는 기회주의로 전락했고 기득권 계층의 논리를 그대로 답습했다. 니어링은 대책없는 반전주의자로 낙인찍혔다. 그는 사회당 소속으로 하원의원 선거에 나갔다가 떨어졌고 심지어 간첩 혐의로 기소되기도 했다. 강연 요청도 크게 줄어들었다.

톨스토이의 이른바 개인적 급진주의에 빠져든 것은 그 무렵이었다. 결국 사회를 바꾸는 일은 나를 바꾸는 일로 바뀌고 말았다.

“모든 사람이 스스로 급진주의자가 되고 사상가가 되며 이상을 가지고 스스로 터득해 행동하는 것이 급진주의를 위한 유일한 길이다. 이것이야말로 사회질서가 변화할 수 있는 유일한 기반이다.”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야 사회가 바뀐다던 그는 이제 스스로 터득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미 이때부터 ‘보통 사람들’에 대한 그의 믿음은 무너졌다고 볼 수 있다. 이 무렵 니어링의 반성은 주목할만하다.

“근대 사회는 똑같은 습관을 가진 대중적 인간, 무산자 계급, 짓눌리고 치우치고 틀에 박히고 불만에 가득 차 있고 영성이 바닥나고 무지하고 지나치게 자극적인 것을 추구하는 산업 노동자라는 인간형을 만들었다. 오늘날까지 미국의 노동자들은 기득권 계층과 똑같이 투표할 정도로 계급의식이 희박하다.”

니어링은 그 뒤 미국 노동당에 입당했다가 제국주의에 대한 입장차이로 제명당한다. 지나친 이상주의에 빠져 과학적 마르크스주의를 왜곡하고 있다는게 제명 이유였다. 결국 니어링은 투쟁의 통로를 모두 차단당하고 숲속으로 숨어든다.

그 뒤 61년은 우리가 아는 바와 같다. 그의 자서전이나 그의 두번째 부인 헬렌이 쓴 , 두 사람이 함께 쓴 에 나온 것처럼 그는 산골 마을에 내려가 노동과 자급자족, 반자본 반문명 주의를 직접 몸으로 실천했다. 그의 삶은 건강했고 늘 기쁨과 활력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해피 엔딩은 아니었다. 우리는 그를 잘못 이해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가 죽기 3년 전에 남긴 말이다. “한 친구는 내가 말하는 것들이 그 전처럼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할 것이라고 충고했다. 참 유감스럽다.”

이건 죽기 1년 전에 남긴 말이다. “대중을 움직이기 위해 한 세기 내내 뭔가 하려 했지만 그 노력은 외형상 거의 성공하지 못했다.”

스코트 니어링 평전 / 존 살트마쉬 지음 / 김종락 옮김 / 보리 펴냄 / 1만8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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