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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을 만나다.

Written by leejeonghwan

November 3, 2004

날이면 날마다 영화 보고 영화 이야기하는 게 일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영화평론가 정성일씨를 만났다. 꽤나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오프 더 레코드가 많았고 술에서 깨고 나니 막상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생각나는 이야기를 간단히 정리해본다. 나름대로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사람들은 왜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 같은 영화에 열광하는 것일까. 이 영화들은 역사를 주제로 다루는 것 같지만 역사를 기묘하게 수정하고 왜곡하고 있다. 관객들은 영화를 보면서 편안함을 느낀다. 6·25 전쟁이나 암울했던 군사독재 시절의 기억은 모두 사라지고 다만 감동과 추억으로 남는다. ‘살인의 추억’이나 더 나가면 ‘슈퍼스타 감사용’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들에서 1980년대는 그냥 추억일 뿐이다.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는 모두 개봉관 관객이 1천만을 넘어섰다. 200만이나 300만씩 관객이 들어차려면 마케팅의 힘이 필요하다. 그러나 관객이 500만을 넘어 1천만을 넘을 때 그건 마케팅이 아니라 하나의 문화 현상이다.

사람들은 그들이 한번도 소유하지 못했던 것들을 그리워 하는 것 같다. 실제로 그들이 지나왔던 1980년대는 그들이 그리워하는 1980년대와 다르다. 사람들은 영화를 보면서 실재하지 않았던 과거를 추억한다. 과거의 고통스러운 기억에서 벗어나려는 것일 수도 있다.

더 신기한 건 역사를 소재로 하지 않는 영화들까지도 과거로 도망가려 한다는 사실이다. ‘몽정기’나 ‘품행제로’, ‘해적, 디스코 왕이 되다’, ‘와이키키 브라더스’ 등등의 영화들은 굳이 배경이 과거일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이 영화들은 굳이 과거 시점으로 돌려서 이야기하려고 하고 관객들은 이를 기꺼이 즐긴다. 현실을 들여다 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정작 현재를 다루는 영화들은 현실에서 벗어나 있다. 굳이 우리나라 영화일 이유가 없는 영화들이다. 배경을 미국이나 일본이나 프랑스로 놓아도 똑같이 먹힐 수 있는 영화들이다. ‘올드보이’가 그렇고 ‘빈 집’이 그렇다.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도 그렇고 ‘주홍글씨’도 그렇고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도 그렇고 사실 요즘 거의 모든 영화들이 그렇다.

이 영화들은 2004년 대한민국을 그리는게 아니라 그냥 언제 어디에 있어도 상관없는 그런 공간을 그린다. 현실의 문제들은 철저하게 외면되고 무시된다. 우리나라 영화에는 시대적 공간적 배경이 없다.

지난해 평론가들이 가장 기대를 걸었던 영화, ‘지구를 지켜라’는 흥행에 실패했다. 그렇게 미래를 그린 영화도 먹히지 않는다. 과거를 비틀어 추억하거나 현재를 다루되 현실을 건드리지 않는 그런 영화를 관객들은 찾는다. 기묘한 현상이다.

문제는 이런 영화들이 역사를 비트는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역사를 바꾸어 버린다는데 있다. 2004년을 사는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6·25는 ‘태극기 휘날리며’로 기억된다. 1970년대는 ‘실미도’로 1980년대는 ‘살인의 추억’이나 ‘슈퍼스타 감사용’으로 기억된다. 사람들이 ‘태극기 휘날리며’를 기억할 때 실제 6·25는 기억에서 사라져 간다. 사람들은 과거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영화가 만들어낸 조작된 과거로 대체하고 편안함을 느낀다. 역사가 바뀌어 버리는 것이다.

가까운 일본을 보자. 안노 히데야키 감독의 ‘에반겔리온’ 포스터의 광고 문구는 “모두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어”였다. 거대한 로봇 앞에선 조그만 여자아이, 그리고 세상에 대한 불신과 절망. 모두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건 이 시대 일본 젊은이들이 딛고 있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말이다.

그리고 이듬해 미야자키 하야오는 ‘모모노케 히메(원령공주)”의 포스터 광고 문구에 “살아라”라고 커다랗게 적어넣었다. “모두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어”에 대한 대답이었던 셈이다. ‘모모노케 히메’는 따뜻함과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신세대와 구세대가 그렇게 영화를 통해 메시지를 주고 받으면서 현실의 문제를 깊이 있게 파고든다.

아오야마 신지의 ‘유레카’는 버스 인질 사건에서 살아남은 세 사람의 이야기다. 시작하자 마자 총격전, 거침없이 화면이 바뀌고 10분 뒤부터 영화의 속도는 갑자기 느려진다. 3시간 50분짜리 이 영화는 내내 이 세 사람의 단조로운 일상을 쫓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여자아이는 절벽에 서서 못다한 말을 쏟아내고 아저씨는 여자아이를 끌어안으며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고 말한다.

이 영화는 이 세 사람이 어떻게 상처를 치유하는가를 다룬 영화다. 감독은 옴 진리교의 사린 가스 테러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일본 사람들을 위해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3시간 50분에 이르는 긴 여행이 필요했다는 이야기다. 우리에게도 우리의 상처를 치유해줄 그런 영화가 있을까.

2000년대의 사람들은 영화를 통해 세상을 보고 세상을 이해한다. 그러나 정작 우리나라 영화들은 갈수록 현실에서 멀어지고 있다. 감독이나 관객이나 고통스러운 현실을 외면하고 영화가 만들어내는 가상의 현실에 빠져든다. 그 가상의 현실에는 역사도 없고 미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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