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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F. 케리’를 읽다.

미국 대통령 선거가 딱 3일 앞으로 다가왔다. 이 책은 ‘보스턴글로브’ 기자들이 쓴 존 포브스 케리의 전기다.

케리는 예일대학교 재학 시절 비밀 단체인 해골단(Skull and Bones society)에 가입한다. 같은 대학의 2년 후배, 조시 부시 대통령도 해골단 단원이었다. 1832년에 창설된 해골단은 해마다 15명의 신입회원을 받는데 구체적인 활동 내용은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져 있다. 죽음의 결사(Brotherhood of Death)를 표방한 이들은 배타적인 엘리트 집단을 구성한다.

케리는 졸업식 대표 연설에서 미국의 무력 사용을 강도높게 비판했다. 그러나 졸업 후 해군에 입대하고 베트남 전쟁에 뛰어든다. 1968년, 스물네살 되던 해였다. 그때만 해도 베트남 전쟁은 숱하게 많은 새로운 영웅을 낳을 반드시 이길 수 있는 전쟁처럼 보였다.

무모하고 용감한 케리는 참전 4개월 만에 훈장을 세개나 받고 전쟁 영웅이 되어 돌아온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전쟁 영웅을 환영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반전 시위가 미국을 휩쓸고 있었고 하원의원에 출마할 계획이었던 케리는 고민 끝에 반전 운동가로 돌아선다. 언론은 한때 전쟁 영웅이었던 이 젊고 능력있는 반전 운동가를 주목했다.

1971년 스물일곱살 때 케리는 상원 외교위원회에 출석해 전쟁의 참상에 대해 증언한다. 케리는 가장 영향력있는 반전 운동가로 부상했다. 변신은 놀라웠다. 그는 영웅이 되기 위해 전쟁에 참가하기도 하고 그 전쟁을 반대하기도 한다. 그에게 기회주의자라는 비난이 따라다니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케리는 1972년 첫번째 하원의원 선거에서 낙선한다. 그 과정에서 백악관이 직접 선거에 개입하기도 했다. 그만큼 케리는 이미 위협적인 존재가 됐다.

그 뒤 10년의 정치적 망명이 시작됐다. 케리는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를 시작했고 라디오 방송의 토크쇼 진행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대학원을 졸업한 뒤에는 검사가 되고 1982년까지 법조계를 떠돈다. 정치적으로 암담한 시절이었지만 검사 경력은 진보주의자라는 부담스러운 꼬리표를 상쇄시키는 정치적 무기가 된다.

1982년 케리는 메사추세스 부지사로 정계에 복귀한다. 10년전의 대중적 인기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나 케리는 부지사에서 시작해 1984년 마침내 상원의원에 당선된다.

정치인 케리를 이해하려면 소수자 우대정책을 둘러싼 논의를 살펴보는게 좋겠다. 케리는 소수자 우대정책이 만병통치약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특히 인종적 특혜가 백인들의 적대감을 조장했다는 부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백인이 역차별 당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인종 문제를 전면에 끌어낸 것이다. 자칭 진보주의자가 결코 해서는 안될 발언을 한 셈이다.

나중에 거센 반발에 부딪히자 그는 여전히 소수자 우대정책을 지지하고 있으며 다만 이 정책에 대한 반감을 지적한 것일 뿐이라고 둘러댔으나 반발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보좌관들에 따르면 그는 토론에 들어갈 때까지도 명확한 입장을 갖고 있지 않는 경우가 많다. 케리는 소크라테스처럼 질문을 던지면서 문제점을 찾아내고 입장을 바꾸는 전략을 구사한다. 그는 보좌관들의 조언을 귀기울여 듣되 모든 결정은 마지막에 가서 스스로 내린다.

이라크 전쟁에 대한 입장도 오락가락이다. 케리는 후세인을 위협으로 간주하고 부시의 입장에 동조하면서도 무력 사용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전쟁이 아닌 평화를 위해 전쟁에 찬성했다고 변명을 늘어놓았다. 신중한 태도였지만 양다리를 걸친다는 비난도 끊이지 않았다.

케리가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입장을 선택하고 있지만 부시나 케리나 결국 미국의 이해를 대변하는 미국의 대통령이다. 다만 이번 선거는 부시와 케리의 대결이 아니라 부시와 반 부시의 대결이고 부시의 지난 4년에 대한 재평가라고 보는 게 맞다.

반 부시의 대안으로 케리를 선택하는 건 반 이회창이 대안으로 노무현을 선택하는 것만큼이나 암담하고 아득한 일이다. 부시보다야 낫겠지만 크게 기대할 건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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