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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금융계열사 의결권 확보에 목을 매는 이유.

Written by leejeonghwan

October 27, 2004

“주주들 위임장을 모아왔소. 이건희 회장과 임원들은 모두 경영에서 손을 떼고 물러나시오. 딱 3일의 여유를 주겠소.”

어느날 갑자기 외국인 투자자들이 들이닥쳐 다짜고짜 이렇게 밀어붙인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은 삼성전자 본사를 미국으로 옮겨가겠다고 한다. 핵심 연구인력만 남겨놓고 경영진을 모두 갈아치우겠다고 한다. 이게 웬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란 말인가.

외국인 투자자들의 뒤에는 미국 중앙정보국, CIA가 있다. CIA는 삼성전자가 중국과 손을 잡고 전쟁무기를 개발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삼성전자가 개발하고 있는 다음 전략 산업도 걱정거리였다. 무슨 꿍꿍이 속일까. 대한민국은 늘 뭔가 엄청난 일을 저지를 것만 같다. 이 조그만 나라가 반도체 강국이 될 거라고 누가 내다볼 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이제 반도체를 쥐는 나라가 세계를 쥐게 된다. 더 큰 일을 저지르기 전에 일찌감치 삼성전자의 뿌리를 뽑아야 한다. 필요하다면 전쟁이라도 저질러야 한다.

CIA는 삼성전자 주식을 갖고 있는 미국 투자은행들을 끌어모아 삼성전자 지분을 꾸준히 늘려왔다. 주주총회까지 갈 것도 없다. 어차피 이건희 회장의 우호지분은 얼마 안된다. 미국 투자은행들을 설득 또는 협박해 위임장만 충분히 받아오면 삼성전자의 경영권을 빼앗기는 손바닥을 뒤집는 것만큼이나 쉽다. 그래야만 할 이유가 충분하다면 CIA는 언제라도 삼성전자를 집어 삼킬 수 있다.

2002년에 출간된 김진명의 소설, ‘바이 코리아’에 나오는 이야기다. 삼성전자가 적대적 인수합병을 당해 외국에 넘어갈 수도 있다는 그야말로 소설 같은 이야기가 요즘 설득력 있게 떠돌고 있다. 그때는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코웃음을 치고 넘어가는 분위기였지만 이제는 제법 심각한 분위기가 됐다.

무엇보다도 지난해 주식시장을 한바탕 뒤흔들어놓았던 SK주식회사와 소버린자산운용의 경영권 분쟁이 아직도 매듭을 짓지 못하고 있다. 외국인 투자자들 지분 비율도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10월 27일 기준, 삼성전자의 외국인 지분 비율은 무려 57.4%에 이른다. 삼성전자 뿐만 아니라 어지간한 대기업은 이미 50% 이상 많게는 90% 이상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지분이 넘어가 있는 상태다. 조금씩 상황은 다르지만 자칫 SK 꼴이 날 가능성은 어디에나 있다.

SK주식회사의 대주주가 된 소버린자산운용은 사모 펀드다. 몇몇 개인들이 돈을 모아 만든 펀드라는 이야기다. 챈들러라는 성을 가진 뉴질랜드 출신의 40대 형제가 대주주라는 사실이 알려져 있을뿐 자본의 출처나 투자 규모 등은 모두 베일에 가려져 있다.

소버린은 지난해 3월 분식회계 문제로 SK의 주가가 바닥을 치고 있는 틈을 노려 한주에 평균 9232원씩 모두 1900만주를 사들여 14.94%의 지분을 확보한 최대주주가 됐다. 10월 27일 주가는 5만8600원. 1년 반 동안 여섯배 가까이 뛰어오른 셈이다. 소버린의 시세차익은 모두 9380억원에 이른다. 문제는 소버린이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경영권에 욕심을 내고 있다는데 있다. 소버린은 내년 4월 주주총회에서 최태원 회장 등 경영진의 퇴진을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10월 25일 국회 정무위원회 회의실에서 열린 공정거래법 개정안 공청회에서는 삼성전자의 적대적 인수합병 가능성을 놓고 한바탕 논란이 벌어졌다. 논란의 핵심은 공정거래위원회의 금융계열사 의결권 제한 정책이다. 계열사의 지분을 모두 합쳐 15%가 넘을 경우 15%를 넘어서는만큼 금융 계열사의 의결권이 줄어든다는 이야기다. 삼성전자의 경우, 삼성생명보험과 삼성화재보험 등 금융 계열사들의 의결권이 제한된다.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경우 올해 4월 1일 기준, 이건희 회장 일가와 계열사들의 지분은 모두 합쳐 23.4%. 이 가운데 자사주 6.8%를 뺀 지분은 17.8%, 공정위의 계획대로라면 여기서 15%가 넘는 2.8%만큼 의결권이 줄어들게 된다. 공정위의 개정안은 11월 국회에 상정될 전망이다.

문제는 삼성전자도 SK처럼 경영권이 위협받을 가능성이 있느냐다. 올해 상반기 기준으로 삼성전자의 순이익은 6조2719억원으로 증권거래소 상장기업 전체 순이익의 23.4%에 이른다. 삼성전자가 우리나라 경제에 차지하는 비중은 그만큼 크다. 금융계열사 의결권이 제한돼 이건희 회장 우호 지분의 의결권이 줄어든다는 이야기는 곧 삼성전자의 경영권이 위협을 받고 우리나라 경제의 근간을 뒤흔드는 심각한 위기가 닥칠 수도 있다는 이야기로 비화된다.

삼성생명은 10월 27일 기준으로 삼성전자 지분 7.2%를 확보하고 있다. 주가 43만원을 기준으로 4조5604억원어치다. 이 돈은 엄밀히 말하면 삼성생명의 자산이라기 보다는 이 회사 보험 계약자들의 보험료다. 삼성전자가 금융계열사 의결권 확보에 목을 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쉽게 돈을 끌어다 쓸 수 있고 정작 경영권에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보험 계약자들은 보험금을 타갈 뿐 보험료가 어디에 어떻게 쓰이는가 아무런 관심도 없다.

삼성생명의 지난해 매출액은 22조6839억원, 당기순이익은 3312억원에 이른다. 놀라운 것은 이 회사의 배당 규모다. 이 회사는 지난 5년 동안 한주에 5500원씩 배당을 줬다. 모두 1100억원어치다. 5년 동안 주주들에게 나눠준 배당금이 자본금 1000억원보다도 많다는 이야기다. 이미 배당만으로도 주주들에게 본전 이상의 수익을 안겨준 셈이다.

더 놀라운 것은 이 회사의 투자자산 현황이다. 삼성생명은 삼성전자의 지분 7.2%를 확보하고 있는 것을 비롯해 삼성물산을 4.8%, 호텔신라를 7.3%, 삼성중공업을 3.9% 등등 여러 계열사의 지분을 확보하고 있다. 삼성생명이 확보하고 있는 계열사 주식은 지난해 말 기준으로 7조1202억원 규모에 이른다. 지난해 이 회사 당기순이익의 21배가 넘어선다.

이밖에도 계열사들과 거래한 채권과 채무가 각각 4347억원과 1284억원에 이른다. 또 삼성카드가 떠넘긴 회사채를 사들이거나 삼성중공업으로부터 유형자산을 사들이는 등 삼성생명은 사실상 삼성 그룹의 금고 역할을 해왔다. 지난해 이들 특수관계자들과 거래에서 얻은 이익이 1016억원에 지나지 않은 반면 비용이 2345억원에 이른다는 사실도 이 복잡한 거래의 실체를 설명해준다.

그동안 삼성생명은 보험 계약자들의 보험료를 끌어들여 투자라는 명목으로 계열사들의 경영권을 방어하고 동시에 지배권을 강화해 왔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이런 악순환을 끊겠다고 나섰고 삼성을 비롯한 재벌 그룹들은 경영권 위기를 핑계로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있다. 온갖 수단을 썼는데도 경제 살리기에 실패한 노무현 정부는 재벌 그룹들의 손을 들어줄 분위기다. 투자와 고용이라는 절대 과제를 이들이 쥐고 있기 때문이다.

경영권 위협은 물론 가능한 이야기지만 소설과 달리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은 크지 않다. 삼성전자는 SK보다 시가총액도 훨씬 크고 지분도 잘 분산돼 있다. 그리고 설령 경영권 위협의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처럼 시장의 원리를 어겨가면서까지 무작정 재벌 그룹의 손을 들어줘야 하는가는 따져볼 문제다. 그들은 지금 그들의 영향력을 앞세워 우리 사회에 양보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면서 정작 그들은 그 무엇도 조금도 양보할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정환 기자 top@leejeonghw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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