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안문제연구소, 월간 ‘말’에 딱지를 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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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의 첨병, 공안문제연구소가 월간 ‘말’에 ‘용공’과 ‘반정부’라는 딱지를 붙였다. 공안문제연구소가 최근 열린우리당 최규식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이 연구소는 1997년부터 1999년 사이에 월간 ‘말’ 기사 15건에 대해 감정을 실시, 이 가운데 5건에 대해 ‘용공’, 8건에 대해 ‘반정부’라는 판정을 내린 것으로 확인됐다. 누가 이 연구소에 월간 ‘말’ 기사의 감정을 의뢰했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진보매체에 대한 상시적이고 광범위한 사상 검증이 시도되고 있다는 사실이 다시 확인된 셈이다.

대표적인 진보매체를 자부해온 월간 ‘말’이 ‘용공’과 ‘반정부’ 또는 이적성 시비에 말려든 것은 이미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국가의 존립이나 안전,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국가보안법 7조 1항)”는 이유로 비판과 대안 담론을 가로막는 것은 정당성 없는 권력을 가진 자들의 생존 본능이었다. 지난 17년 동안 권력 남용의 첨병 역할을 맡았던 공안문제연구소가 마침내 그 실체를 드러냈다. 마침 국가보안법 폐지 여론이 확산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 법이 실제로 현장에서 어떻게 악용되고 있는가 구체적인 내막이 드러난 셈이다.

1988년 경찰대학 부설로 설치된 공안문제연구소는 전두환 정부 때 치안본부(경찰청) 산하 남영동 대공분실 안에 있던 내외정책연구소가 전신이다. 내외정책연구소의 설립은 197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름이 바뀌기는 했지만 공안문제연구소는 대공분실이 홍제동으로 이전한 뒤에도 한동안 건물을 함께 사용하다가 1993년 경기도 용인시 경찰대학 본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실상 군사독재 시절 서슬퍼렇던 대공분실의 계보를 그대로 이어오고 있는 셈이다.

공안문제연구소 운영규칙에 명시된 이 연구소의 기본 임무는 “좌익 이념 및 이론에 대한 비판 논리의 체계적 연구와 대응론의 제시”다. 또 “국내 좌익 세력의 실상과 전술 등의 실태 및 문제점 파악”, “공안관련 정책방향 제시와 대안 개발 및 자문” 등도 있다. 그러나 이 연구소의 핵심 임무는 역시 “공안관련 사건의 증거물에 대한 감정 및 분석”이다. 1999년에 대우경제연구소에서 발간된 ‘중앙행정기관 경영진단’에 따르면 이 연구소 기능의 60%가 이 부문에 집중돼 있다.

이번에 최규식 의원실에서 확보한 자료에 따르면 공안문제연구소는 2000년부터 올해 8월까지 모두 3만5011건의 문건을 감정했다. 이 연구소는 보존기한 3년이 지난 자료를 모두 폐기하기 때문에 2000년 이전의 활동 상황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최근 3년 동안 해마다 5천건 이상의 문건을 감정해왔다는 사실로 미뤄볼 때 지난 17년 동안 최소 8만5000건 이상의 문건을 감정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번에 최규식 의원실이 확보한 자료 가운데는 1997년부터 1999년 사이의 감정서 목록도 있다. 700여페이지에 빼곡히 적힌 감정서 목록은 이 연구소의 활동이 얼마나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온갖 집회의 유인물과 단체 소식지, 회의록 등을 포함해 단행본과 정기간행물, 논문 등이 감정 대상에 올랐다. 정기간행물 가운데서는 월간 ‘말’을 비롯해 ‘한겨레’ 등의 진보적 성향의 매체들이 철저한 감정을 거쳤다. 심지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연설문까지 감정 대상에 올랐다. 종류별로 보면 유인물이 3만2323건으로 대부분을 차지하고 간행물이 1744건, 도서가 859건씩이다.

감정서는 물론이고 이 감정서 목록도 모두 3급 국가기밀로 분류돼 있어 일반인은 열람할 방법이 없다. 월간 ‘말’은 최규식 의원실의 도움을 얻어 월간 ‘말’과 관련된 감정서 목록을 뽑아 분류하는데 성공했다. 시기별로 보면 1994년과 1995년 기사가 각각 1건, 1997년 2건, 1998년 9건 등이다. 현재 최규식 의원실을 통해 감정서 원본의 열람을 요청했지만 2000년 이전 감정서는 모두 폐기됐다는 답변이 왔다. 2000년 이후 감정서는 아직 목록조차 확보되지 않은 상태다.

공안문제연구소의 실태는 최근 최규식 의원이 익명의 내부 제보자에게 받은 편지에서 잘 드러난다. 10월 7일 최규식 의원실로 배달된 A4 용지 4장 분량의 이 편지는 연구소가 경찰 수사기관의 외압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경찰청 보안국 대공분실에서 수사 진행하고 있는 사건의 감정인 경우, 직접적이고 노골적으로 감정서 작성에 개입해 감정서를 검열하고 될 수 있는대로 좌익 용공으로 판정하도록 압력을 행사했습니다. 왜냐하면 보안 경찰의 경우, 보안사범 5명을 구속시키면 특진이 되는 제도가 있기 때문에 감정서의 결과가 이들의 특진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경찰 출신 소장에 대한 문제 제기도 있다. 경남지방경찰청장 출신의 전병룡 소장은 경찰청 정보국장, 경비국장 등을 지낸 바 있다. 편지에 따르면 그는 연구관들의 감정서를 하나하나 검열하면서 좌익 용공 판정이 적은 연구관들에 대해서는 갖은 압력과 협박을 저지른 것으로 알려졌다. 심지어 감정이 끝난 문건에 대해 재감정을 지시하는 경우도 있었다. 경찰청에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교체할 수 있는 별정직 소장의 특성상 경찰 수사기관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을 거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이 제보자가 옮긴 전 소장의 발언은 사뭇 충격적이다.

“우리의 감정서가 얼마나 중요한데 우리가 일선 경찰들의 사기를 덜어뜨려야 되겠는가. 경찰 수사관들이 빨갱이들의 문건 하나를 입수하는데 목숨을 거는데 이들이 기소할 수 있게 우리가 뒷받침이 돼야 한다. 좌익 용공을 많이 잡아줘야 한다.”

이 제보자는 “전 소장이 좌익 용공을 많이 잡는 것이 애국인 것처럼 분위기를 몰아가고 있어서 연구관들도 알아서 길 수밖에 없다”고 적고 있다. 한청(한국청년단체 협의회)과 진보의련(진보와 연대를 위한 보건의료운동연합) 사건이 대표적인 경우다. 편지에 따르면 이 연구소의 감정 업무는 의뢰된 개별 문건에 한정해 감정서를 작성해주는 데 그친다. 그러나 이 사건들의 경우 소장이 조직 자체에 대한 감정을 명령했고 연구관들이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반대했는데도 소장 직권으로 이를 관철시켰다는 이야기다.

최규식 의원실은 한청의 문건에 대한 연구소의 감정서의 일부를 공개했다. 이 감정서에 따르면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자는 주장만으로도 ‘용공’이 될 수 있다.

“요컨데 본 문건에서 발견되는 국가보안법 철폐 주장은 북한의 대남 선전선동용 주장과 같은 맥락이고 (중간 생략) 따라서 본 문건은 북한의 대남선전선동용 주장을 수용 지지하고 있으므로 ‘용공’ 성향의 문건으로 평가된다.”

결국 경찰 보안국은 2001년과 2002년 각각 한청과 진보의련을 국가보안법에 따라 친북 좌익과 반정부 이적단체로 규정했다. 법원은 한청 전상봉 의장과 제주대학교 의과대학 이상이 교수 등에게 징역에 집행유예와 자격정지를 선고했다. 그 과정에 공안문제연구소의 감정서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법원은 “한청의 강령이나 소식지가 남한 사회를 미 제국주의 식민지로 규정하고 있고 북한을 찬양하면서 주한미군 철수, 인민민주주의혁명 등을 주장하고 있어 공소사실 모두 유죄로 인정된다”고 밝혔다.

이 연구소에 감정을 의뢰한 기관을 살펴보면 경찰기관이 3만1775건으로 가장 많고 국정원이 2193건, 기무사가 1043건을 차지했다. 또 하나 주목할 부분은 이 연구소의 인력 구성이다. 경찰대학 사무분장 규칙에 따르면 이 연구소의 정원은 24명 그 가운데 경찰관 3명과 기능직 5명을 빼면 실제로 연구관은 16명, 실제 현원은 1999년 기준 12명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이 지난해 무려 7710건의 문건을 감정했다는 이야기다. 한 사람 앞에 1년에 642.5건, 주 5일 근무 기준으로 하루 평균 2.5건 꼴이다.

한 사람 앞에 하루 2.5건이면 사실상 감정이라기 보다는 경찰 수사기관에서 의뢰한 문건에 도장을 찍어 넘기는 정도의 요식행위에 그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편지에 따르면 경찰청 보안국 수사대장에서 연구소장으로 그리고 연구관으로 압력이 전달돼 내려오면 연구관이 이를 거부하고 객관적이고 공정한 감정을 내릴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고 현실적으로 그럴 시간도 없다.

월간 ‘말’ 기사에 대한 감정 결과를 보면 이들의 감정 결과가 얼마나 터무니 없는가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용공’ 판정을 받은 1998년 6월호, “백령도 분단현장 체험”이라는 제목의 기사는 민족문학작가회의 고문으로 있는 시인 이기형씨가 쓴 백령도 기행문이다. 1917년 평남 함주 태생의 시인이 쓴 분단 시대 통한의 기록은 한갖 ‘용공’으로 매도된다. 굳이 논란이 될 수 있는 부분을 찾자면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냉전 체제를 청산해야 한다”거나 “녹슨 철조망과 쇠사슬을 걷어버려야 한다”, “역사의 명령을 거부하는 자는 도태되어 쓰레기통에 처넣어질 것이다”, “일흔두살의 내가 아들 손자 모두 데리고 함경도 함주 땅을 밟을 수 있는 날이 어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정도다.

1995년 4월호, “미국의 NPT 연장전략과 비동맹의 도전”이라는 기사에 대한 ‘반정부’ 판정은 이 연구소가 생각하는 ‘반정부’의 기준이 어디에 있는가 보여준다. 조임숙 평통사(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사무차장이 쓴 이 기사는 미국의 핵확산금지조약회의를 둘러싼 국제 갈등을 다루고 있다. 논란이 될 수 있는 부분은 딱 한 문단, 정부가 평화운동 진영의 입장과 상반된 입장을 주장하고 있다는 부분이다. 독자 여러분이 ‘반정부’ 성향 여부를 직접 판단해보기 바란다.

“우리나라는 무기한 연장 지지와 핵 기술 이전을 주장했다. 말하자면 최악의 선택을 하고 있는 셈이어서 개탄스러움을 자아내고 있다. 국익적 차원에서만 보아도 무기한 연장 반대라는 입장에 일단 선다면 다급해진 미국으로부터 상당부분 경제적·정치적 양보라는 반대급부를 얻을 수도 있을 텐데 일단 미국의 손을 들어주고 보자는 태도는 한심스럽다.” (월간 ‘말’, 1995년 4월호)

미국에 대한 비판이 ‘반정부’ 성향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우는 1994년 5월호, “전쟁 억지를 위한 진보 진영의 과제”라는 기사에 대한 판정에서도 나타난다. 평화연구소 김창수 연구원은 이 기사에서 전쟁 억지와 평화적 통일을 위해 방위비를 삭감하고 미국의 방위비 분담 압력에 대한 반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김 연구원은 “주한미군에 대한 방위비 지원은 불평등한 한미군사관계를 지속시키는 고리가 되고 이 고리를 통해 미국 군수자본이 한반도에서 자본의 논리를 실현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방위비를 낼 게 아니라 오히려 주한미군이 무상으로 쓰고 있는 토지에 대한 임대료를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이런 정도의 주장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반정부’ 성향이 된다.

심지어 ‘조선일보’에 대한 비판도 ‘반정부’ 성향이라는 딱지를 뒤집어 썼다. 1998년 7월호, “‘조선일보’의 세계적 오보, 성혜림 망명사건은 없었다”라는 기사는 ‘조선일보’의 믿거나 말거나 식 무책임한 보도와 안기부의 개입 의혹을 파헤친 분석 기사다. 한국역사연구회 김지형 연구원은 이 기사에서 “왜 안기부가 성형수술까지 시키면서 14년 동안이나 비밀리에 관리해오던 이한영을 그 시점에 공개했는지 의문으로 남는다”며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한건 올리려는 안기부의 의도가 맞아 떨어진 공작일 수도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조선일보’의 기사는 오보라는 게 정설이지만 이 사건의 실체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 사건의 진실 여부 이전에 김 연구원의 비판과 문제제기는 얼마든지 정당하고 누구도 ‘반정부’라는 명목으로 이를 막을 수 없다. 이 연구소는 다만 정부와 정부에 우호적인 신문을 비판한다는 이유만으로 ‘반정부’ 성향이라는 판정을 내리고 있다.

이 감정서는 1999년 5월 21일에 작성됐다. 역시 김 연구원이 쓴 1998년 9월호, “8·15 통일 대축전, 통일부가 망쳤다”는 기사에 대한 감정서도 이날 작성됐다. 애초에 김 연구원을 목표로 하고 그의 저작물에 대한 감정이 같은 날 한꺼번에 이뤄졌다는 이야기다. 두 기사 모두 조용관 연구원에 의해 감정이 이뤄졌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최근 보고서에서 공안문제연구소가 “표현물 전체의 맥락보다는 몇몇 문장을 문제 삼아 감정의 결과를 작성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이 위원회는 “그런데도 검찰은 이 감정결과에 따라 기소하고 법원은 이를 증거로 삼아 유죄판결을 내리고 있다”고 덧붙였다.

1994년 대학 교양교재 ‘한국사회의 이해’로 이적성 논란에 휘말렸던 정진상 경상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는 최근 공안문제연구소를 주제로 열린 토론회에서 “당시 수사관들이 연구소의 감정서가 마치 결정적인 증거자료라도 되는 것처럼 앞에 놓고 몰아붙였다”고 회상했다.

건국대학교 법학과 한상희 교수는 “공안문제연구소의 감정서 어느 곳을 찾아봐도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리인 ‘중대·명백한 위험’의 법리를 펼치고 있는 것은 전혀 없다”고 지적했다. 한 교수는 “국가보안법이 사상통제법이 아니라 국가 안보를 위한 법이라면 먼저 고려돼야 할 것이 그 표현이 담고 있는 사상이 아니라 그 표현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의 경중과 그 발생 가능성의 정도여야 한다”며 “연구소는 이런 위험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다”고 강조했다.

한 교수는 검찰이나 경찰, 국정원 등 수사기관이 자신이 해야 할 판단을 유보한채 그 판단을 연구소에 의뢰하고 그 이름을 빌려 법 판단을 정당화해왔다고 보고 있다. 제 3자의 외관을 가진 기관에 감정을 의뢰하고 전문가적 의견을 획득해 국가보안법을 적용하는 과정과 그 결과가 정상적이었음을 가정, 국가보안법의 폭력성을 은폐 또는 엄폐하는 기회를 제공해 왔다는 이야기다.

한 교수는 “과거 대부분의 시국사건의 판결에서 연구소의 감정 의견이 그대로 검찰의 공소장에 기재되고 판결문에 복제돼 나오는 것도 이런 메카니즘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또 다른 문제는 연구소의 감정 결과가 예심 역할을 하면서 검찰과 경찰의 수사과정에서 발생하는 인신제약과 인권침해를 정당화하는 기능을 해왔다는 데 있다. 도장 찍듯이 주문생산된 감정서만으로 사실상 1차적인 법 집행이 이뤄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공안문제연구소는 그 인적 구성에서부터 업무수행의 절차와 과정, 감정평가 기준은 물론이고 심지어 감정의 결과까지도 철저하게 비밀주의로 일관하고 있다. 외부의 접근이나 검증, 비판은 철저히 차단돼 있고 당연히 객관적이거나 과학적인 평가와도 거리가 멀다. 한 교수는 이를 두고 ‘이념적 자급자족 체계’라고 지적한다. 이게 바로 국가보안법을 지탱하고 있는 국가안보 논리의 참담한 실체다.

경기도 용인시 경찰대학 본관에 자리잡은 공안문제연구소에서는 지금도 하루 평균 20건 이상의 사상 검증이 이뤄지고 이 검증서에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거나 재판을 받고 복역 중이다. 월간 ‘말’은 앞으로 공안문제연구소의 자료를 추가 입수해 국가안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권력 남용 문제를 철저하게 파헤칠 계획이다. 그 과정에서 ‘용공’이나 ‘반정부’라는 딱지를 몇개 더 얻는다고 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정환 기자 top@leejeonghwan.com


보안문제연구소로 간 남파간첩 홍종수.

광주항쟁이 정점에 이르고 있던 1980년 5월 24일. 신문과 방송은 모두 ‘광주 잠입시도 간첩 이창용 검거’ 보도를 내보낸다. “광주로 잠입해 시위를 무장폭력으로 유도하고 반정부 선동을 하라는 임무를 띠고 북에서 파견된 이창용이란 간첩이 23일 서울역에 도착했지만 40대 여성 2명이 그를 수상히 여기고 주변 경찰관에 신고해 결국 붙잡혔다”는 얘기였다. 이창용 검거는 당시 “남파간첩이 광주사태를 선동한다”는 신군부의 주장을 뒷받침하며 광주항쟁에 ‘빨간 색’을 덧칠했다.

하지만 이 ‘광주사태 배후조종 간첩’은 신기하게도 감옥살이를 면제받는다. 1988년 7월 국회 질의에서 조종석 당시 치안본부장은 이런 답변을 내놓았다. “간첩 이창용은 남파간첩인 이연종 일당 등 18명의 간첩을 검거케 한 공적 등을 감안해서 기소유예처분을 받고 석방, 현재 사회활동 중이며 주소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창용은 검거된 뒤 당국이 다른 간첩사건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줬기에 2년만에 실형도 살지 않고 풀려났고, 더구나 공안당국은 그가 어디에 있는지 관리조차 않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이창용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또 다른 간첩사건에서 ‘해결사’ 노릇을 한다. 바로 ‘함주명 간첩조작사건’. 1954년에 남파되어 가족을 찾기 위해 바로 자수한 귀순간첩 함주명은 집행유예로 풀려난 뒤 평범한 삶을 살게 된다. 그러다가 1983년 2월 함씨는 돌연 이근안한테 납치당하고 63일 동안 불법감금 상태에서 고문을 받는다. 그리고 고문 끝에 함씨는 ‘고정간첩’으로 조작된다. 그는 무려 16년 동안 복역하다가 1998년 8월 석방된다. 함씨를 고정간첩이라고 제보한 사람은 바로 이창용이었다.

월간 ‘말’은 1998년 10월호에서 남파간첩 홍종수의 실체를 밀착 취재했다. 먼저 홍종수가 법정에서 밝힌 주민등록번호로 신원조회를 해본 결과는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법무부나 경찰이 그를 관리하고 있는지 확인해본 결과 법무부 대답은 “공안사범 보호관찰대상자 가운데 홍종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없다”는 것이었다.

취재 결과 대공분야에서 오랫동안 일해온 관계자의 증언이 확보된다. “홍종수는 남파된 자가 아니라 재일동포 출신으로서 만들어진 간첩”이라는 것이다. 그는 홍종수가 “경찰 기관에 근무하다가 지금은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고 증언했다. 홍종수가 서울시경 내 보안문제 연구소에서 오랬동안 근무했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그와 같이 근무했다는 김아무개씨는 인터뷰에서 “5~6년 전까지 서울시경 내 보안문제연구소에서 홍종수씨와 같이 근무했는데 3년 전부터는 연락이 끊겼다”고 증언했다.

홍종수는 보안문제연구소에서 적어도 1992년까지 상당기간 근무한 것으로 확인됐다. 보안문제연구소는 1995년 12월 내외정책연구소와 통합해 지금의 공안문제연구소가 된다. 공안문제연구소는 한해 7000건 이상의 용공·반정부 문건을 감정하면서 국가안보를 지키느라 여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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