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국가 부도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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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만든 영화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일단 재밌었습니다. 팩션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여전히 그 밑에 깔려 있는 팩트의 힘이 있죠. IMF를 관통했던 지금의 40대와 50대에게는 특별한 의미로 다가올 거고요. 경제부 기자들이 흥미로워할 만한 대목이 많았습니다. (이하 약간의 스포일러 있습니다.)

영화 초반에는 좀 손발이 오그라드는 느낌의 대사가 많은데(특히 김혜수), 보다 보면 익숙해집니다. 영화적 재미를 위해서겠지만 김혜수가 맡은 한시현 팀장의 비중이 굉장히 크죠. 한국은행 팀장인데 말이죠. 일개 팀장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실제로 팀장급이 IMF 협상에 배석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대학로 연극처럼 과장된 말투와 행동도 몰입을 방해하고요. 다만 뒷부분으로 갈수록 표정이 살아나는 것 같긴 했습니다. 애국지사일 때보다 좌절하고 슬픔에 차 있을 때 표정 연기가 더 좋았습니다.

작가가 이쪽 현실을 잘 모른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는데요. 이를 테면 청와대 경제 수석과 재정경제원 차관이 왜 국회에서 미팅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한은에서는 왜 통화정책팀만 일을 하는지도 모르겠고요. 외환보유고나 금융기관의 여신 관리 등은 통화정책팀의 업무가 아니죠. (일부러 그렇게 쓴 거겠지만 재정경제원을 재경국이라고 하고 한은 총재는 총재가 아니라 총장이더군요. 이런 디테일도 은근 신경 쓰였습니다.)

악당으로 묘사된 재경국 차관의 캐릭터도 현실적이지 않았습니다. 작정하고 나라를 팔아먹으려던 누군가가 있었을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당황했고 잘 몰랐고 신자유주의 개혁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던 것도 사실일 거고요.

한시현(김혜수)이 IMF는 안 된다고 맞서자 차관이 묻습니다. 그럼 대안이 뭔데?

제대로 답을 못하죠. 이 부분이 이 영화에서 그나마 디테일이 살아있는 부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한시현이 말한 통화 스왑 등이 가능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모라토리엄도 검토 대상이 아니었고요. 당시 김영삼이나 임창렬이나 강만수나 IMF가 아니라 다른 대안이 있으면 당연히 그렇게 갔을 겁니다. 실제로 강만수가 일본에 통화 스왑을 요청하기도 했는데 일본은 미국과 공조하겠다며 거부했죠.

실제로 선택의 여지는 많지 않았고 굴욕적인 협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요. 물론 한국 정부가 협상력이 있었다면 좀 더 좋은 조건을 요구할 수도 있었겠지만,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몇몇 고위 공무원 때문에 IMF를 받아들이게 됐다고 단순 도식화하는 건 왜곡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1997년에 한국 정부에는 한시현 같은 사람이 없었죠. 누구도 이게 아니라 이거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고 말하는 게 맞을 겁니다. 영화에서도 나오죠. “당신이 책임질 수 있어?”

그런데 이 영화에서 재경국 차관은 그냥 스테레오 타입입니다. ‘알 권리’가 그렇게 중요해? 라고 묻는다거나 IMF로 가는 게 별거 아니라고 태연하게 주장한다거나 이 엄청난 파국 앞에서 이번 기회에 경제의 체질을 바꿔야 한다고 밀어붙이면서 아무런 고민도 망설임도 없죠.

한시현의 기자회견 장면도 손발이 오그라들었고요. 그게 뭐라고 왜 기사 한 줄 안나는 지에 대한 설명도 없었습니다. 기자들은 일단 가면 뭐라도 씁니다. 안 쓸 이유가 없죠.

서류를 툭툭 집어던지는 장면도 무엇을 의도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여러차례 위기를 경고했는데 무시한 데 대한 화풀이인가요? 한은 직원에게 커피나 타오라고 소리지르는 차관은 이 사람이 무능할 뿐만 아니라 여성 차별을 하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줄 수는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선악 구도를 나누고 우리 편과 아닌 편을 구별해서 본질에 다가서기 어렵게 만듭니다.

그나마 팩션으로 긴장감을 잘 살린 부분은 IMF 총재와 협상 장면이었습니다. 종금사를 폐쇄하라, 금리를 높이고 자본시장을 개방하고, 외국인 지분 보유 한도를 높이고 노동 유연성을 받아들여라 등등의 선결 조건을 내걸었죠. 한시현은 여기서 왜 쉬운 해고가 나오느냐, 미국이 협상의 배후에 있는 것 아니냐고 질문했다가 쫓겨납니다.

실제로 미국은 데이비드 립턴 재무부 차관과 티모시 가이트너 부차관보 등을 보내서 협상을 배후 지휘했습니다. 구제 금융을 빌미로 경제 구조 개편을 요구한 게 미국 정부의 기획이었다는 게 정설입니다.

영화를 보면서 아쉬웠던 건 차관과 수석 등등의 고뇌 또는 갈등을 좀 더 드러냈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작정하고 나쁜 놈이 아니라 무능하고 무지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나쁜 선택을 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물론 그렇다고 용서 받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이걸 고독한 영웅과 본 투 더 악당의 대결 구도로 만들어 버려서 아쉬웠습니다. 실제로는 공포와 좌절, 당황스럽고 무력한 상황이 계속됐을 것 같은데 말이죠. 사실 나쁜 놈 몇 놈이 문제인 것보다 나라가 넘어가게 생겼는데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 훨씬 더 무서운 거죠. 누군가는 결단을 내려야 하는데 권한도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그나마 안전한 선택이라고 할 만한 걸 골랐던 상황이었을 겁니다. 물론 유학파 출신의 모피아 관료들과 그들만의 네트워크, 뿌리 깊은 시장 지상주의가 근간에 깔려 있었을 거고요. 정치가 필요할 때 정치가 작동하지 않은 것이 진짜 문제의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상 최악의 경제 위기라는 급박한 상황에서 정치가 멈춰버린 것이죠. 원래 나쁜 놈들이어서 그래,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건 간편하면서도 무책임하죠.

유아인의 연기도 좋았지만 참 대본이 안쓰러웠습니다. (종금사 직원인데 외환 거래도 하고 동시에 신입 사원 연수팀도 맡고 있고요.) 김혜수가 IMF는 안 된다고 맞서는 순간 도장을 찍는 허준호의 교차 편집도 좋았습니다. 대선 후보들에게 확약을 받아오라고 윽박지르는 장면도 디테일이 좋았고 벵상 카셀의 연기가 일단 먹어줬죠. 성실하게 살아왔던 평범한 국민들이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는 메시지를 전달한 것도 좋았습니다.

어차피 가공의 인물이고 팩션이라고 하지만 어쨌거나 20년 전의 비교적 가까운 역사를 다루고 있으면서 영화적 재미를 위해 현실을 뒤섞고 잡탕으로 버무렸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재미 없었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우리는 국가 부도의 날 이후를 살고 있고 한 번도 제대로 진단과 반성을 하지 않았죠. 그래서 의미 있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어쨌거나 한 번 다시 생각해 보게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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