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학의 관성과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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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학의 존립 기반이 무너지고 있다.

먼저 우리는 지난 몇년동안 야학에 학강을 거의 또는 전혀 남기지 못했다. 몇명의 학강이 검정고시를 합격했고 그리고 야학을 떠났다. 그들은 야학에 머물 곳을 찾지 못했다.

검정고시를 벗어난 어떤 영역에서도 학강과 강학은 소통하지 못했고 좀더 냉정하게 말하면 베푸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시혜적이고 의존적인 관계 이상의 인간적인 유대관계를 만들지도 못했다. 학강과 강학들의 채무 채권 의식이 그나마 지금 야학을 지탱하는 힘이다. 그 많은 노력에도 야학은 무료 검정고시 학원에 그쳤다.

관성(慣性, inertia).

물체가 현재의 운동상태를 지속하려는 성질.

타성(惰性)이라고도 한다. 물체가 운동상태의 변화에 대해 저항하는 성질을 말한다. 관성의 개념을 처음으로 생각한 사람은 갈릴레이였으나, 그 개념은 뉴턴에 의해서 완성되어, 운동 제1법칙으로 정리되었다. 뉴턴 시대 이전에는 물체가 정지상태로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갈릴레오는 움직이는 물체는 마찰력 때문에 결국은 정지하게 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뉴턴은 운동에 관한 갈릴레오의 생각을 토대로 하였다. 뉴턴은 제1법칙에서 물체가 운동상태를 유지하는 데는 힘이 필요하지 않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러나 물체가 운동상태의 변화에 저항하는 경향은 질량에 따라서 달라진다. 관성은 질량에만 의존하는 양이다. 물체가 질량을 많이 가질수록 운동상태의 변화에 저항하는 경향인 관성을 더 많이 가지게 되는 것이다. (‘두산세계대백과사전’에서.)

성광야학의 관성은 검정고시 수업이다. 지난해에도 지지난해에도 검정고시 수업을 했고 올해도 했고 그래서 내년에도 같은 수업을 한다. 변화를 거부하는 관성 또는 타성이 성광야학의 가장 큰 걸림돌이다. 아무런 문제의식도 없고 흘러온 대로 마냥 흘러간다.

해마다 이맘 때면 되풀이 되는 현상이지만 8월 검정고시 이후로 학강이 없어서 수업을 못하는 날이 계속되고 있다. 가장 직접적인 문제는 학강이 부족하다는데 있다. 한 사람의 학강이라도 있으면 수업이 계속되겠지만 문제는 학강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고 야학의 수업이 이제 새로운 수요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데 있다.

분명한 것은 정규 학력 미필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현재의 수업으로 야학을 계속 끌고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새학기에 더 많은 학강을 끌어모으는 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강학들이 수업을 더 열심히 더 성실히 하는 것으로도 해결되지 않는다.

이대로 가면 야학은 자연도태된다. 짚고 넘어갈 것은 무료 검정고시 수업의 자연도태가 곧 야학의 자연도태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지금 야학의 근간인 검정고시 수업을 부정해야 하는 시점에 왔다. 무엇을 배우고 가르칠 것인가, 야학의 사회적 책임이 무엇인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 시점에 왔다. 좀더 적극적인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배움은 현실을 넘어서는 힘이 될 수 있다. 야학은 그런 믿음을 구현하는 공간이다.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고민하고 함께 대안을 찾아나가는 공간이다. 끊임없이 반성하고 되돌아 볼 것은 우리가 과연 현실을 넘어서고 있는가 하는 부분이다. 관성에 휘말려 현실을 묵인하고 방관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부분이다.

좀 성급한 판단일 수도 있지만 이제 검정고시를 내걸고는 학강을 모을 수도 없고 학강을 모으더라도 그런 수업은 거의 의미가 없다. 야학 말고도 무료 검정고시 수업을 하는 곳은 여러 군데다. 굳이 야학이 나서서 그들과 경쟁할 이유가 없다. 차별화된 수업을 하는 것도 아니고 계획처럼 검정고시를 넘어선 그 어떤 것들을 담아내고 있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두가지 판단이 가능하다. 잘못 짠 틀을 보완할 것인가. 버리고 새로 틀을 짤 것인가.

잘못 짠 틀을 보완하는 문제는 결국 시스템의 문제로 이어진다. 검정고시 졸업생을 주요 구성원으로 보고 가능성을 찾는 이 시스템은 상당부분 수업의 부실 때문에 무너졌고 이제는 검정고시의 수요가 줄어들면서, 더 정확히 말하면 새로운 학강이 들어오지 않으면서 본질적인 한계를 맞게 됐다.

수업의 부실을 넘어서는 문제는 신입강학 교육의 문제와 강학들의 의견 공유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지난 몇년 동안 우리는 이 부분을 방치했거나 노력은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수업은 검정고시를 넘어서지 못했고 당연히 수업을 넘어서는 어떤 시도도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틀을 짜는 문제는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지만 조만간 과제가 아니라 당면한 현실로 떠오를 수도 있다. 도태하거나 직접 부딪혀 이겨내거나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우리는 이제 몇가지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

– 검정고시 말고 다른 무엇을 배우고 가르칠 수 있는가. 더 정확히 말하면 다른 무엇을 내걸고 새로운 구성원을 끌어들일 수 있는가.
– 학강과 강학의 관계를 다시 정립할 필요는 없는가. 검정고시를 넘어선다면 누구를 학강으로 끌어들이고 누구를 강학으로 끌어들일 것인가. 학강과 강학을 넘어선 관계 설정은 가능한가.
– 검정고시를 버렸을 때 야학 구성원들의 학력이 올라가거나 아카데믹하게 흐를 가능성은 없는가.
– 조금 다른 맥락이지만 어떻게 기층 민중을 끌어안을 것인가. 강학과 학강의 구분을 넘어 기층 민중의 범주로 한데 어울리고 공부하고 함께 대안을 찾고 현실을 넘어서는 그런 시스템은 가능한가.

(해마다 구성원이 바뀔 때마다 우리는 같은 시행착오를 되풀이 하고 있다. 시행착오 가운데 새로운 구성원들은 많은 것을 배우겠지만 그런 시스템은 조직 전체에 커다란 손실이다. 조직의 경험이 축적되지 못하고 문제의식이 공유되지 못하고. 새로운 구성원들에게 권한을 넘겨주면서 책임까지 털어버리고 시행착오를 방관하는 그런 무책임이 야학을 제자리에 머물러 있도록 하는 것 같다. 결국 졸업생은 많지만 활동가는 없고 야학은 계속 제자리에 머물고 사회운동이나 교육운동, 토론과 학습의 공간이 아니라 자칫 동아리나 동호회 수준으로 전락하고 있다.)

참고 : 우리는 검정고시를 어떻게 보는가. (이정환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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