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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검정고시를 어떻게 보는가.

Written by leejeonghwan

October 27, 2001

회의 때 못 다한 이야기를 마저 하겠습니다.

많은 야학들이 아직 검정고시에 대한 입장을 명확하게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청솔야학이 말하는 것처럼 과연 교육적 불평등을 해소하는 게 야학의 목적일까요. 야학의 목적이야 아무렇든 상관 없는 걸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목적이 명확하고 그에 따르는 개념들이 정확하게 정리돼야만 방향이 제대로 설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우리는 어떨까요. 찬숙이 누나도 그렇고 다른 야학 사람들도 그렇고 어쩌다 만나면 ‘성광야학은 다시 검정고시만 하기로 했다면서요?’하고 묻습니다. 검정고시를 하지 않겠다고 한참 떠들더니 결국 포기하고 검정고시로 돌아온 것처럼 보이는 모양입니다. 타협처럼 보이기도 하고 실패처럼 보이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저는 우리 야학이 이런 문제에 어느 정도 합의를 이루고 있다고 봅니다. 앞으로 나아갈 방향도 어느 정도 다들 동의하고 있다고 봅니다.

간단히 정리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수업이라는 방식으로 가르칠 수 있는 건 검정고시 교육 밖에 없다’는 사실을 지난 98년의 실험을 치르면서 아프게 깨달았습니다. 검정고시만 가르치겠다는 건 아니고 검정고시를 넘어서려면 검정고시 교육부터 제대로 마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잠깐 옆길로 샙니다. ^^ 김용옥 선생님이 언젠가 하신 말씀인데 기억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말의 공부(工夫)를 중국에서는 ‘쿵푸’라고 읽습니다. 말의 뿌리를 알면 재미있습니다. ‘쿵푸’는 우리나라에서는 그냥 중국 무술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지만 중국에서 ‘쿵푸’는 실력을 쌓아 자신을 키워나간다는 의미로 널리 쓰입니다. 무술 ‘쿵푸’는 거기서 갈라져 나온 말이죠.

우습게도 공부(study)를 뜻하는 말이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이 다 다릅니다. 일본에서는 공부를 ‘勉强’이라고 쓰고 ‘벵쿄스루’라고 읽습니다. ‘勉强’, 우리말로 면강은 뭔가 억지로 시키거나 한다는 의미죠. 중국에서는 공부를 ‘念書’라고 쓰고 ‘니엔수’라고 읽습니다. ‘念書’, 우리 말로 염서는 말 그대로 책을 생각한다는 의미죠.

왜 이런 차이가 있을까요. 공부의 말 뿌리를 살펴보면 우리나라 옛 할아버지들의 공부론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분들은 공부가 ‘勉强’도 아니고 ‘念書’도 아닌 ‘공부’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겠죠. 우리나라의 ‘공부’는 억지로 시키거나 하는 것도 아니고 멍하니 앉아 책의 내용을 생각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공부는 실력을 쌓아 자신을 키워 나가는 거지요. 하나하나 단계를 밟아나가는 거지요. 쿵푸와 비슷합니다.


태권도와 비슷하겠지만 쿵푸도 기본 자세를 건너뛰고 기왓장 깨기를 먼저 배울 수는 없을 겁니다. 오랜 시간을 걸려 하나하나 단계를 밟아 나가면서 실력을 쌓아나가야 하겠지요. 우리는 혹시 기본 자세를 빼놓고 기왓장 깨기를 먼저 가르치려고 하는 건 아닐까요. 검정고시와 어설프게 타협하고 있으면서 검정고시에 이르기까지 거쳐야 하는 여러 과정들을 건너 뛰고 있지는 않나요. 여러가지를 함께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우리가 다시 검정고시로 돌아온 건 이런 아픈 깨달음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수업 시간에 가르칠 수 있는 건 국어나 영어나 수학이나 과학, 사회, 윤리 따위 우리가 오랜 시간 배웠던 것들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기왓장 깨기를 가르칠 능력도 자격도 안됩니다.

그래서 성광야학은 수업과 세미나를 나누고 있습니다. 수업이 지배이데올로기의 학습이라면 세미나는 대안이데올로기의 학습입니다. 수업은 칠판 앞에서 이루어지지만 세미나는 원탁에서 이루어집니다. 수업에서 강학은 가끔 강압적으로 외우라고 이야기할 수 있지만 세미나에서 강학의 목소리는 다른 강학들이나 학강들과 동등합니다. 수업에서는 한쪽 방향으로만 가르침이 흐르지만 세미나에서는 가르침과 배움이 서로 얽히고 설키게 됩니다.

우리는 수업에 담아낼 수 있는 게 있고 담아낼 수 없는 게 있다는 걸 깨달았던 겁니다. 강학의 역량이 부족한 탓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수업에서 담아낼 수 없는 어떤 종류의 배움과 가르침을 공동학습으로 담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수업과 세미나는 그렇게 상호 보완적입니다. 세미나는 수업의 발전된 단계이기도 하고 수업에서 못다한 목소리들이 오가는 곳이기도 합니다. 다들 느끼고 있는 바겠지만 공동학습(세미나)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학강들을 억지로 세미나에 앉혀놓아봤자 지금은 서로 소통하지 못합니다. 소통의 방법도 문제지만 많은 부분 개념의 차이에서 비롯합니다. 그런 개념의 차이는 수업을 통해 넘어설 수 있습니다. 검정고시 수업도 충분합니다.

학강들과 함께 하는 세미나를 만들기 앞서 우리는 수업에서 학강들에게 생각하는 힘과 자신감을 길러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검정고시 교과과정은 입시 중심의 여러가지 문제점들을 담고 있지만 대체로 이 시대의 지배 이데올로기, 혹은 가장 보편적인 지식들을 체계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학강들은 그것들을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빠른 시간 안에 정확하고 능숙하게 이차방정식을 푸는 방법을 배워야 하고 동사의 수동태를 이해해야 합니다. 삼국시대 한강유역을 점령한 나라의 순서를 외워야 하고 그걸 중심으로 그때 역사를 다시 구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해가 앞서야 하겠지만 가끔은 공식을 외워서 물체의 낙하속도와 낙학 시간을 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랜 시간을 들여 글과 문장에 익숙해져야 하겠지만 자음동화와 구개음화 따위도 가끔은 외워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공부들이 검정고시를 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하는 과정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공부를 해나가는 과정에서 반드시 밟아야 할 과정이라고 봅니다. 단계를 건너뛰고 해답만을 던져줄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우리는 수업을 철저하게 효율적인 방향으로 끌고 나가려고 합니다. 그 가운데 강학들의 목소리를 담아낼 수 있겠지만 우선은 가능하면 빨리 고등학교 졸업생 수준의 ‘지식’을 쌓는데 목표를 두고 있습니다. 지식을 쌓는다는 건 개념들을 이해하고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사고과정을 익힌다는 걸 의미합니다. 언뜻 무의미해 보이는 지식들이 꾸준히 쌓여 생각하는 힘과 자신감을 만들어 줄 겁니다.

많은 야학들이 검정고시를 부정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검정고시를 버리지 못하고 있지요. 우리는 검정고시를 버릴 수 없다면 검정고시를 적절히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과정 가운데 검정고시는 최선은 아니지만 적절한 학습의 동기가 될 수 있습니다. 검정고시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갖고 있으면 검정고시에 휘둘리지 않고 두가지를 한꺼번에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수업을 통해 담아내고 싶은 것들을 담아내는 것과 학강들에게 검정고시 합격증을 주는 것 두가지 말입니다. 어차피 검정고시 교육이 필요하다면 그걸 잘 이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검정고시와 어설프게 타협하지 말고 검정고시를 이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미나에 대한 생각은 옛날 글을 그냥 옮겨오는 걸로 대신하겠습니다. 어제 회의 때 상균이가 쪽지로 물어보던데 우리 야학의 목표라면 저는 ‘학습을 통한 아래로부터의 사회 변화’라고 이야기하겠습니다. 수업과 세미나는 그 과정입니다. 수업과 세미나가 자리 잡혀 가면 사회와 소통하는 방법들을 찾아나갈 계획입니다. 조급하지 않습니다. 하나하나 단계를 밟아나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멀고 아득해 보이지만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동안의 세미나는 왜 실패했을까요.

학강들과 강학들이 한자리에 모였던 세미나를 살펴봅시다. 학강들과 강학들은 언어가 달랐습니다. 언어는 다르지만 문제인식은 같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부딪혀보니 그렇지 못했습니다. 누가 지적한 것처럼 야학의 학강들 가운데는 신문조차도 읽지 않는 분들이 많지요. 학강들은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쉽게 다가갈수 있는 주제를 골랐는데도 학강들은 머뭇거렸고 작은 모임 가운데서도 이내 소외되곤 하셨지요.

공부라는 건 크고 작은 개념들을 하나하나 익혀가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개념들이 모여서 한사람의 가치관을 만들게 되는 거겠죠. 우리가 중고등학교를 지나오면서 10여년동안 배워왔던 많은 개념들을 우리 학강들은 불과 1년만에 배우려고 합니다. 검정고시를 통과하더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단정짓기 어렵지만 그만큼 사고의 폭이 제한될 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현실을 비판하고 재해석하기보다 지배 이데올로기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데 익숙하게 됩니다. 어쩌면 사회는 밑바닥 민중의 그런 맹목성을 딛고 서있는지도 모릅니다. 이 시대의 지배 이데올로기는 그렇게 다수의 희생에 뿌리를 박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야학운동은 배움을 통해 민중의 힘으로 변화의 움직임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스스로 극복하지 않으면 소외는 계속 되풀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현실을 넘어서려면 우선 현실을 정확히 알아야 하겠죠. 현실을 정확히 알려면 이 시대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이루고 있는 개념들을 정확히 이해해야 하겠죠.
제가 국어수업의 중요성을 매번 강조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우리의 국어수업은 그런 무거운 역할을 제대로 해내고 있을까요.
여러가지로 새로운 학습 방법을 찾아보지만 쉽지는 않습니다. 결국 많은 텍스트를 읽고 해석해보는 방법이 최선이라고 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일년은 너무 짧지요. 국어만 놓고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저는 야학의 많은 수업들이 텍스트 해석을 큰 축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훈련이 결국 사회라는 큰 텍스트를 이해하는 틀을 만들어줄 테니까요.
검정고시 수업은 너무 가볍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검정고시 수업에 우리의 목소리를 담아내야 합니다. 무척이나 어려워 보이지만 딱히 불가능한 일도 아니라고 봅니다. 굳이 해답을 검정고시 바깥에서 찾을 필요도 없다고 봅니다. 자칫 가볍게 흐르기 쉬운 수업 가운데 크고 작은 개념들을 꾸준히 쌓아나가야 합니다. 어떻게든 한 번에 해답에 다다를 수 있는 방법은 없으니까요.

다시 세미나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결국 서로의 언어가 다르다면 동등한 입장으로 함께 세미나를 끌고 나갈 수 없습니다. 샘터야학의 세미나처럼 또 하나의 수업이 되고 말겠지요. 샘터야학에서는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이제는 그런 수업을 할 자신이 없습니다. 토크쇼의 진행자처럼 능수능란하게 회의를 끌고 나갈 자신도 없고 전지전능한 하느님처럼 그럴듯한 결론을 내려줄 자신도 없습니다. 학강들에게 눈높이를 맞추는 세미나라면 영원히 그 높이를 벗어나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가장 이상적인 건 일정 과정의 수업을 마치고 나면 세미나에서 강학들과 어느정도 동등한 입장에서 이야기할 수 있을만큼 인식의 폭이 넓어지는 거죠. 결국 수업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수업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학강들과의 세미나는 계속해서 겉돌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강학들끼리 모여서 세미나를 꾸리기로 했습니다. 학강들과 함께 하려고 했던 세미나가 실패하기도 했고 우선은 강학들부터 서로 소통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강학들이 먼저 공동학습의 틀을 다져놓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신자유주의 세미나도 쉽지는 않았습니다. 재미있는 주제라고 생각했는데 강학들에게 큰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접근 방법도 피상적이고 가벼웠습니다. 사례에 접근하지 못하고 원론에만 머물렀지요. 병수가 지적한 것처럼 매력적인 주제가 아니었기 때문일 겁니다. 너무 큰 주제였을지도 모릅니다.

올해 세미나 계획을 잡을 때가 됐습니다. 올해도 벌써 석달이나 지나버렸지요.
우리는 ‘일년이 지나도 달라진게 없다’는 병수의 지적을 새겨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내년에 성광야학은 어떤 모습일까요. 10년 뒤의 성광야학은 어떤 모습일까요. 지난해 우리가 제자리 걸음을 했다면 그것은 세미나의 부진과 관련이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지난해에는 열번도 채우지 못했지요. 논의는 쌓이지 못하고 모래알처럼 부스러져 버렸지요. 대안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러한 논의들이 구체적인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야학은 계속 제자리 걸음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우리는 다시 세미나에 힘을 쏟아야 합니다.

언젠가 동훈이는 학강들과 지역신문을 만들 수 있게 된다면 그때는 야학을 맘놓고 떠날 수 있다고 말했지요. 그렇게까지 되려면 수업이 그만큼 알차야 하고 논의가 활성화 돼야 하겠지요. 수박 겉핥기에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현실에 참여하고 현실을 바꾸어 나가야 하겠지요. 세미나에서 우리는 야학과 수업의 이론을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대안을 찾아가는 공동학습의 실험은 세미나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 ‘우리나라 민중은 혁명을 이루어본 경험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던데요. 야학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성취의 경험들이 쌓이면 그때는 자신감이 생기겠지요. 더 이야기해봐야겠지만 올해 세미나는 보다 현실적인 주제를 잡을까 합니다. 생활에 뿌리를 두고 구체적인 해답을 찾아나갈 수 있는 세미나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 강학들과 학강들과 이야기를 해보고 방향을 잡겠습니다. 다음주에나 세미나 준비모임을 한번 갖겠습니다. 많은 의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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