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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포폰 없는 세상이 정말 좋은 세상일까.

Written by leejeonghwan

February 27, 2014

대포폰 없는 세상에 살고 싶은가? 모든 국민들이 실명으로 휴대전화를 개통하고 전화번호만 추적하면 상대방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그런 세상에 살고 싶은가? 대포폰이 범죄의 온상 아니냐고, 떳떳하면 실명을 꺼릴 게 뭐냐고 반문할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정서를 반영해 지금 국회에서는 이동통신 등에 가입할 때 본인 확인을 의무화하는 법안이 논의되고 있다. 여야 합의가 이뤄진 뒤라 통과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상황이다.

조해진 새누리당 의원 등이 발의한 전기통신사업법 개정안에 따르면 휴대전화 등을 개통할 때 본인이 아니거나 본인 확인을 거부하는 경우 계약체결을 거부할 수 있다는 조항이 담겨 있다. 지금도 이동통신 가입 때 본인확인을 하지만 지금까지 법적 근거 없이 관행적으로 하던 걸 법적으로 의무화하겠다는 취지다. 자금을 제공 또는 융통해 주는 조건으로 다른 사람 명의의 이동전화를 개설하거나 권유 또는 알선, 중개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조항도 있다.

전응휘 오픈넷 이사장은 “돈을 받고 대포폰 개설을 권유 또는 알선, 중개하는 행위가 가능한 건 이동통신 서비스에 가입할 때 본인 확인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면서 “본인 확인을 강화할 게 아니라 오히려 특정 단말기가 특정인과 직접 연계되지 않도록 본인 확인이 의무가 아니라 이용자가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 이사장은 “이번 개정안은 그동안 관행적으로 이뤄지던 단말기 실명제를 법제화하는 성격”이라고 설명했다.

이우현 새누리당 의원이 발의한 개정안에는 미래창조과학부가 본인 확인에 필요한 시스템을 구축하고 전기통신 사업자가 이 시스템을 이용해 본인 여부를 확인하도록 허용하는 조항까지 담겨 있다. 통신사가 대법원이나 출입국관리소, 안전행정부 등이 보유한 개인정보에 접근을 허용하는 이 조항은 일단 법안 심사소위 단계에서 빠진 것으로 확인됐다. 민간 기업에 공적 데이터베이스 접근을 허용하는 것도 문제지만 개인정보 보호법과도 충돌된다.

오는 8월 시행될 개정 개인정보보호법에 따르면 법적 근거 없이 불필요하게 주민등록번호 등을 수집하는 행위가 엄격히 제한된다. 지금까지는 통신사들이 관행적으로 가입자의 동의 아래 주민등록번호 등 개인정보를 요구해 왔지만 8월부터는 동의가 있더라도 개인정보 수집이 원칙적으로 금지된다. 그런데 국회에 계류돼 있는 전기통신사업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통신사들이 개인정보를 수집할 법적 근거가 마련된다.

진보네트워크 활동가 장여경씨는 “본인 확인은 지금도 하고 있지만 본인 확인을 아무리 강화해도 대포폰 유통을 막을 수도 없을 뿐더러 당연히 범죄 예방 효과도 없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다”고 지적했다. 장씨는 “오히려 무분별한 개인정보 수집이 개인정보 유출 위험을 높이고 피해를 양산하고 있는데 본인확인을 법제화하는 건 시대착오적이고 퇴행적인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본인 확인을 하지 않으면 대포폰이 늘어나는 것 아닐까. 그러나 전응휘 이사장의 설명에 따르면 “다른 나라들은 모든 핸드폰이 다 대포폰”이다. 우리나라는 실명 가입이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지만 익명으로 가입할 자유도 보장돼야 한다는 게 정보인권을 다루는 시민단체들의 주장이다. 익명으로 가입한다고 해서 범죄가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설령 늘어난다고 하더라도 그런 이유로 실명 가입을 의무화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사소한 것 같지만 법안의 취지를 들여다보면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통신사들이 주민등록번호를 받았던 건 통신 요금을 내지 않을 경우 채권추심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목적에서였다. 그런데 개정안이 통과되면 국가가 부정이용을 방지한다는 명분으로 통신사들에게 실명확인을 강제하게 된다. 지금까지는 통신사들이 영리적 목적으로 개인정보를 요구했지만 이제 범죄 예방의 목적으로 국가가 개인정보 수집을 의무화한다는 이야기다.

채권추심이 목적이라면 단말기를 별도로 구매해서 선불 요금제로 가입할 경우 본인 확인을 해야 할 이유가 없다. 개인정보보호법의 필요최소한의 원칙에 따라 개인정보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개정안이 통과되면 개인정보보호법과 무관하게 선불 폰도 반드시 실명 확인을 해야 한다. 통신사들 입장에서는 필요하지도 않은 개인정보를 수집하게 되고 가입자 역시 개인정보 유출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헌법재판소 판례에 따르면 익명 표현의 자유가 보장돼야 하는 법적 근거는 세 가지다. 첫째, 익명 또는 가명으로 자신의 사상이나 견해를 표명하고 전파할 자유는 헌법에 보장된 권리다. 둘째, 수사 편의에 치우쳐 모든 국민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는 건 과잉금지 원칙에 위배된다. 셋째, 개인정보 유출되고 다른 목적에 활용될 위험이 있다. 정보통신망법에 적용된 헌재 판례는 이번 전기통신사업법 개정안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대포폰 없는 세상이 정말 좋은 세상일까. 분명한 것은 지금도 법적 근거 없이 관행적으로 본인 확인을 하고 있지만 대포폰을 뿌리 뽑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포폰을 없앤다고 해서 범죄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본인 확인을 법제화한다고 해도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다만 국가가 국민들을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면서 사적 영역까지 개입해 실명 가입을 의무화하는 시도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게 진보네트워크 등의 주장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굳이 익명으로 가입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겠지만 실명 가입 문화 때문에 개인정보 유출 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누군가에게는 익명으로 가입된 핸드폰이 절실하게 필요할 수도 있고 애초에 개인정보를 수집하지 않으면 노출될 위험도 없다. 모든 국민들이 대포폰을 쓰는 세상이 더 좋은 세상일 수도 있다.

한편 미방위에 계류돼 있는 법안 가운데는 휴대전화 발신번호 변경을 금지하고 불법행위에 이용된 전화번호를 이용정지 시키는 등의 조항도 포함돼 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과 오픈넷, 진보네트워크 등 시민단체들은 지난 19일 긴급 성명을 내고 “개인정보 유출 방지와 이용자 권리 보호를 위해 입법적 보완이 필요한 부분이 있으나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면서 “조급한 입법을 중지해 달라”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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