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세상은 가능하다, 이정환닷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임시조치, 주먹구구식 해법.

Written by leejeonghwan

November 25, 2013

“출산하러 갔는데 아기가 죽어서 나왔어요.” 지난 7월 한 포털 사이트 육아 게시판에 올라왔다가 사라진 글이다. 의료사고일 가능성이 있는데 병원이 제대로 해명을 하지 않고 있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산모의 언니가 올린 이 글은 몇 시간 만에 사라졌다. 사고가 발생한 병원에서 권리침해 신고를 했기 때문이다. 게시물 작성자에게 한 마디 통보도 없이 일방적으로 삭제됐다는 데 가뜩이나 억울한 가족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이런 일도 있었다. 한 누리꾼이 트위터에 올렸던 글을 묶어서 다음의 블로그 서비스, 티스토리에 올렸는데 한 정치인이 그 글이 명예훼손이라며 신고를 해서 차단됐다. 여전히 트위터에는 글이 남아있지만 그 글을 블로그에 올리면 사라질 수도 있다. 내가 쓴 글을 내가 볼 수도 없고 백업도 할 수 없는 어처구니 없는 일도 벌어진다. 트위터는 해외 서비스라 어쩔 수 없지만 국내 포털은 차단 또는 삭제를 지시하는 게 가능하기 때문이다.

임시조치 제도는 포털 업체들에게는 오래된 골칫거리였다. 명예훼손이나 저작권 또는 초상권 침해를 두고 사람들은 포털 탓을 한다. 삭제해 달라는 요구를 무시하고 내버려뒀다가는 포털이 그 책임을 고스란히 뒤집어쓰게 된다. 그래서 일단 신고가 들어오면 차단을 하고 본다. 그게 임시조치다. 만약 그 게시물을 작성한 사람이 복원해 달라고 신청을 하면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심의를 거쳐 복원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문제는 임시조치 제도가 단순히 명예훼손 뿐만 아니라 그냥 불편한 글이나 정당한 비판을 차단하는 용도로 악용된다는 데 있다. 변희재 미디어워치 대표를 ‘변듣보’라고 비꼬았던 진중권 동양대 교수의 글이 차단돼 논란이 됐던 적이 있었다. 진 교수는 결국 해외 블로그 사이트로 사이버 망명을 떠났다. 시멘트 회사들이 건축 폐기물을 연료로 쓴다는 의혹을 제기한 최병성 목사의 글이 무더기로 사라진 것도 대표적인 임시조치의 폐해로 거론된다.

임시조치는 자신들에게 불리하다고 판단되는 내용의 게시물을 차단시키는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 명예훼손 피해를 보호하려고 만든 제도가 표현의 자유를 과도하게 제한하는 부작용을 낳고 있는 셈이다. 단순히 특정 기업이나 제품에 부정적인 내용의 글을 썼다는 이유로 게시물이 접근제한 조치되거나 삭제되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다. 이 때문에 정당한 문제제기나 비판이 차단되고 여론을 왜곡하는 사례도 많다.

최근 방송통신위원회 주최로 열린 토론회에서 최경진 가천대 법대 교수는 “권리침해 신고를 받으면 신속하게 임시조치를 하되 게시물 작성자에게 임시조치 사실과 기간, 이의제기 절차와 방법, 효과, 분쟁조정 절차 등을 통지하고 연락처를 확보하지 못해 통지할 수 없는 경우 게시판에 이를 공시해야 한다”는 대안을 내놓았다. 최 교수는 “독립된 분쟁조정위원회를 설치해 독립성과 중립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현재 임시조치 제도는 신고가 들어올 경우 30일 동안 임시조치 처리하고 30일 안에 이의신청을 받도록 하고 있다. 이의신청이 없으면 관행적으로 30일이 지나면 삭제처리 된다. 최 교수는 “임시조치 기간 만료 이후 명문 규정이 없고 게시물을 삭제할 경우 게시물 작성자에게 책임이 발생할 수 있는데 그 책임을 포털이 부담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면서 “임시조치 기간 만료 이후 60일이 지나야 삭제할 수 있도록 개선하자”고 제안했다.

최 교수는 “임시조치 기간을 30일로 하되, 이의제기로 인해 분쟁조정이 이뤄지는 경우 조정 절차가 종료되는 날까지 임시조치 기간을 연장하자”고도 제안했다. 최 교수는 “분쟁조정의 효력을 강화하기 위해 명예훼손 분쟁조정위원회를 설치해 독립성과 중립성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개선해야 한다”면서 “신청 받은 날부터 30일 이내에 조정안을 작성하도록 하고 분쟁조정의 내용은 재판상 화해와 동일한 효력을 갖도록 하게 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포털에 임의적 임시조치 권한을 주자는 제안도 나왔지만 포털 관계자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정혜승 다음 정책실장은 “임의적 임시조치는 포털에게는 너무 큰 칼”이라면서 “명백한 19금 게시물이나 초상권 침해 등 불법성이 명확한 경우 곧바로 게시물을 삭제하는 경우는 있지만 포털이 임의적으로 명예훼손 여부를 판단해 차단할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방통위가 주최한 이날 토론회는 뾰족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최 교수가 내놓은 제안들도 지엽적인 해법일 뿐 근본적인 대안이 되기는 어렵다는 지적이 많았다. 장여경 진보네트워크 정책실장은 “분쟁조정위를 설치하는 건 좋지만 조정과정에서는 그대로 차단된 채로 내버려둬야 하느냐”고 반문했다. 진보진영에서는 임시조치 제도가 피해자의 권리보호에 치중해 정작 가해자(게시물 작성자)의 권리를 지나치게 억압하고 있다고 주장해 왔다.

장 실장은 “삭제 시점을 임시조치 기간 만료 60일 이후로 늦춘다고 하는데 차단된 상태로 내버려두면 될 걸 굳이 삭제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라면서 “삭제 시점을 늦추는 건 큰 의미가 없다”고 지적했다. 장 실장은 “권리침해 신고가 들어오면 임시조치를 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복원 요청이 들어오면 곧바로 복원해주고 분쟁조정 절차에 들어가도록 하는 게 최선이라고 본다”면서 “방통심의위가 그런 전문성을 갖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장 실장은 “명예훼손이나 초상권 침해 등 임시조치가 불가피한 상황도 있을 수 있지만 정치적 비판과 상업적 비판을 차단하는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장 실장은 “결국 권리 침해 여부를 누가 판단할 것이냐의 문제가 남는데 피해자와 가해자의 권리가 충돌할 때 일방적으로 차단하기 보다는 객관적이고 공정성이 보장될 수 있는 분쟁조정 기관에 맡겨 빠른 시간 안에 결정을 내리도록 하는 게 맞다”고 덧붙였다.

방통위에 따르면 올해 8월 기준 임시조치에 의한 게시물 접근제한 조치는 모두 22만7105건에 이른다. 연도별로는 2008년 9만2638건에서 2009년 13만5857건, 2010년 14만5112건, 2011년 22만3678건, 2012년 23만167건으로 급격히 늘어나는 추세다. 5년 동안 2.5배 이상 늘어난 셈이다. 이의제기를 받아들여 게시물이 다시 게재된 건수는 지난해 1만2672건, 5.5% 밖에 안 됐다.

.

www.leejeonghwan.com

Related Articles

Related

절벽에서 뛰어내리면서 비행기를 조립한다는 것.

절벽에서 뛰어내리면서 비행기를 조립한다는 것.

오늘 아침 주주총회를 끝으로 미디어오늘에서 제 역할은 끝났습니다. 오후에는 자유언론실천재단에서 “ChatGPT와 저널리즘의 책임”을 주제로 특강이 있는데 이게 제가 미디어오늘 대표로 나서는 마지막 대외 행사가 되겠네요. 끝나고 선배들 저녁 식사 대접을 하기로 했습니다. 다음 주부터 몇 가지 계획이 있는데요. 1. 4월부터 슬로우뉴스 대표를 맡기로 했습니다. 유한회사 슬로우뉴스를 주식회사로 전환하고 제가 100% 지분을 인수하기로 했습니다. 기자들도 뽑고 콘텐츠도...

라즈베리 파이 오디오 만들기.

라즈베리 파이 오디오 만들기.

시간 날 때마다 만들었던 라즈베리파이 오디오. 드디어 완성. 사실 별 거 없는데 여기저기서 부품 조달하고 거기에 맞춰 도면 만드는 게 힘들었습니다. build log는 영어로. This is my new network audio system. All in one Integrated Amplifier. 1. Raspberry Pi 4B. 2. Hifiberry DAC+DSP. 3. 7 inch touch screen for raspberry pi. 4. Chromecast...

미디어오늘을 떠납니다.

미디어오늘을 떠납니다.

미디어오늘에 경력 기자로 입사해 편집국장으로 3년, 사장으로 6년을 지냈습니다. 다행히 월급날을 한 번도 밀리지 않았고요. 열심히 벌어서 금융 부채를 모두 정리했고 만성적인 자본잠식에서 벗어났습니다. 언론사 경영이라는 게 날마다 전쟁 같았지만 한 번도 원칙과 정도를 벗어나지 않았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다. 제가 지속가능한 미디어오늘을 위한 성장 엔진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면 지난 15년이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미디어오늘 지면에 대해서는 자부심과 아쉬움이...

더 나은 세상은 가능하다, 이정환닷컴!

Join

Subscribe For Updates.

이정환닷컴 뉴스레터를 구독하세요.

.

www.leejeonghw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