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 850억달러, 돈 풀어 경제 살리기 계속한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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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의 조삼모사 발언이 세계 경제를 뒤흔들고 있다. 양적완화 규모를 축소할 것처럼 하더니 일단 유지하기로 했다고 발표하니까 주가가 급등했다. 지난 7월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올해 하반기 채권 매입 규모를 축소하고 내년 중반에는 완전 중단하겠다.” (6월19일).
“미국 경기에 상당한 수준의 통화정책이 당분간 필요하다.” (7월11일).

6월과 7월의 발언은 사실 다를 게 없다. 6월에도 당장 축소한다고 하지는 않았고 7월에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축소라는 말만 꺼내도 시장이 요동을 친다.

지난 18일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도 마찬가지다. 양적완화 규모를 축소하기로 결정하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나오면서 시장이 얼어붙었다가 일단은 현재 규모로 간다고 하자 주가가 급등했다. 당장은 아니라고 하지만 이르면 다음달, 늦어도 12월에 축소할 거라는 전망은 달라지지 않았다. 버냉키의 말 한 마디에 세계 경제가 일희일비하고 있다.

양적완화(Quantitative Easing). 쉽게 말하면 돈을 풀어 경제를 살린다는 말이다. 돈을 찍어서 뿌리면 다른 나라 같으면 어마어마한 인플레이션으로 난리가 났겠지만 미국은 달러화가 기축통화라서 그 부담을 다른 나라들에 떠넘길 수 있다. FRB가 금융회사들이 보유한 자산을 매입하고 그 대금으로 현금을 내주는 방식인데 말이 좋아 양적완화지 헬리콥터로 돈을 뿌리는 거나 뭐가 다르냐는 이야기도 나온다. 월 850억달러, 1년이면 1조200억달러. 지난해 기준으로 우리나라 1년 국내총생산(GDP), 1272조4595억원에 맞먹는 규모다.

FRB의 양적완화는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 직후인 20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9년 3월부터 1조4500억달러 규모의 채권을 사들였는데 그게 1차 양적완화다. 2차는 2010년 11월부터 추가로 6000억달러어치 채권을 또 사들였다. 이 채권은 아직까지 FRB가 그냥 보유하고 있다. 그래도 경기가 안 살아나니까 2011년 9월부터 오퍼레이션 트위스트를 시작해 단기 국채를 팔고 장기 국채를 사들이는 방식으로 금리를 끌어내렸다. 2012년 6월까지 4000억달러어치를 샀고 그해 연말까지 2670억달러어치를 또 샀다. 그래도 안 되니까 지난해 9월부터 3차 양적완화를 시작해 달마다 400억달러어치 모기지 채권(MBS)를 사들이고 오퍼레이션 트위터스로 월 450억달러어치를 추가로 사들이면서 월 850억달러를 쏟아붓고 있다. 모두 더하면 지난 8월까지 양적완화 규모가 얼추 3조7370억달러 규모에 이른다.

미국이 달러화를 찍어내서 뿌리면 달러화 가치가 낮아지고 상대적으로 다른 나라들 화폐가치가 평가절상된다. 환율이 떨어지면 수출에 타격을 받기 때문에 다른 나라들도 앞 다투어 돈을 뿌리게 된다. 세계적으로 양적완화 경쟁이 확산되면서 인플레이션 우려도 커지고 있고 자산 가격 거품도 위험스러운 상황이다.

버냉키는 18일 FOMC 직후 기자회견에서 “현재 미국의 고용시장이 기대에 못 미친다”면서 “최근 금융시장 위축이 전체 경기 둔화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어 우려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흥미롭게 살펴볼 지점은 시장이 이런 상황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버냉키는 미국 경제가 아직 안 좋다고 그래서 한동안 돈을 더 쏟아 부어야 한다고 말했는데 시장은 이에 열광한다. 비유하자면 의사가 아직 퇴원할 때가 안 됐다고 하니 환자 가족들이 기뻐하는 상황이다.

버냉키가 “연준의 전망대로 경제가 움직인다면 비용과 편익을 고려해 양적완화 축소에 나설 수 있다”면서 “양적완화 정책은 연내 축소될 수 있다”고 말한 대목도 눈길을 끈다. “미국 경제에 대해 어느 정도 낙관한다”면서도 “6월 실업률 7.6%는 여전히 취약한 미국 고용시장의 상황을 과대평가하는 면이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결국 양적완화가 올해를 넘기기 어렵다는 정책 기조는 지난 6월부터 달라진 게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상식적으로 봐도 양적완화는 축소할 수밖에 없다. 축소하지 않겠다고 한 것도 아니다. 다만 이번 달은 아니라는 건데 이 정도에 일희일비할 만큼 세계 경제가 취약하다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미국 경제의 개선 정도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의미”라고 지적했다. 뉴욕타임스도 “FRB의 결정은 월스트리트에 안도감을 주는 동시에 혼란도 준다”면서 “양적완화 축소 연기는 좋은 선택이었지만 FRB와 시장의 소통 전략이 깨졌다”고 말했다. 블룸버그통신은 “낮은 성장률과 높은 실업률, 그리고 너무 낮은 물가상승률 등을 고려할 때 FRB가 경기 부양책에서 빠져나올 특별한 촉매가 없는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첫날 급등했던 주식시장은 세계적으로 혼조 국면에 접어들었다. 미국 다우지수는 19일 146포인트 오른 1만5675.95를 기록해 사상 최고치를 갈아치웠지만 다음날 1만5636.55으로 하락 반전했다. 금융위기 가능성이 돌던 인도네시아와 인도, 태국 등 아시아 신흥국들도 19일 크게 올랐다가 20일 꺾였다. 유럽 주식시장도 사상 최고 기록을 경신했지만 추가 상승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2009년 처음 양적완화 논의가 시작됐을 때만 해도 양적완화가 이렇게 길고 규모도 커질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실제로 몇 차례 출구 전략이 논의되기도 했지만 2010년 남유럽 재정위기에 이어 2011년 미국 신용등급 하락 사태가 이어지면서 세계 경제가 미국 FRB 양적완화라는 몰핀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이다.

차기 FRB 의장으로 거론됐던 래리 서머스 하버드대 교수가 의장 후보에서 사퇴하고 재닛 옐런 부의장이 대안으로 떠오르는 상황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서머스는 양적완화에 부정적인 입장이었으나 옐런은 버냉키보다 더 비둘기파 성향으로 분류된다. 서머스가 내년 1월 임기가 만료되는 버냉키의 뒤를 이어 의장에 오를 경우 양적완화 축소를 최대한 지연시킬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번 FOMC 회의로 분명해진 것은 미국의 경기 회복 속도가 여전히 우려스러운 상황이라는 사실이다. FRB는 미국 경제 성장률 전망을 지난 6월 2.3~2.6%에서 이번에는 2.0~2.3%로 낮춰 잡았다. 내년 성장률 전망도 기존 3.0~3.5%에서 2.9~3.1%로 낮춰 잡았다. 여전히 몰핀을 끊을 수 없을 만큼 미국 경제나 세계 경제가 빈사 상태에 놓여있다는 의미다. 버냉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일희일비할 이유가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양적완화 축소 연기는 호재라기 보다는 악재가 아직 드러나지 않은 정도로 받아들이는 게 맞다. 오히려 중장기적 악재의 가능성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당장 월요일 한국 주식시장에서도 이런 우려가 반영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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