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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항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씨네21’에서 가끔 김규항의 칼럼을 읽곤 했다. 그 칼럼이 나중에 ‘B급좌파’라는 책으로 묶여 나왔다는 걸 알았지만 웬만큼 다 읽은 이야기라 딱히 사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다가 지난 5월 독서토론회에서 그 책을 읽게 됐다. 김규항의 칼럼은 한때 새로웠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받아들였던 것들을 그는 부인하고 비판했다.

그러나 책을 다시 읽으면서 김규항의 한계도 보였다. 겸허한 계몽주의자를 자처하는 김규항은 안타깝게도 지난 몇년 사이 그 계몽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것 같다.

김규항이 자신의 블로그에 ‘이진경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글을 썼다. 그는 이진경이 ‘지적 편력’ 혹은 ‘지적 허세’의 방법으로 진리에 접근하고 있다면서 “그런 방법이 지나치게 많은 존중을 얻는 건 우스운 일”이라고 말했다. 아마도 이진경이 활동하고 있는 수유연구실을 가리키는 말이겠지만 “주류 사회에 편입되기엔 자의식이 강하고 기약 없이 풍찬노숙하며 운동하기에도 너무나 유약한 그들”이라고도 말했다.

이 글의 마지막은 마르크스의 인용으로 끝난다. 대학교 때 노트 첫 페이지에 옮겨적곤 했던 말이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해석해 왔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나는 다시 김규항에게 묻고 싶다. 그래서 당신은 세계를 변화시키고 있는가.

김규항이 지적했듯이 지적 편력이나 지적 허세는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그러나 공부는 필요하다. 바다처럼 넓은 식견을 갖춘 김규항에게도 공부는 필요하다. 프랑스 철학이 세상을 바꾸지는 못하겠지만 프랑스 철학이든 뭐든 공부를 계속하지 않으면 그의 계몽은 한계를 맞을 수밖에 없다. 그가 현장에서 싸우는 사람이 아니고 겸허한 계몽주의자로 남을 계획이라면 더욱 그렇다. 내가 보기에 이진경은 지적 편력이든 지적 허세든 끊임없이 공부하는 사람이고 김규항은 그런 이진경을 비난할 자격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마르크스의 인용은 맥락을 한참 벗어났다.

다음 문장은 김규항이 언젠가 자신에 대해 썼던 글의 일부다. 한때 가슴 아프게 읽었던 이 글이 위선이 아니기를 바랄뿐이다. “글만 쓰면 파시스트를 저주하고 중산층을 까고 지식인을 비꼬고 근로 대중을 한없이 지지하지만, 그 글은 방구석에 앉아 세상을 재단하는 부도덕을 깔고 있다.”

참고 : 이진경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김규항의 블로그)
참고 : ‘B급 좌파’를 읽다. (이정환닷컴)
참고 :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를 읽다. (이정환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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