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무실 금산분리, 겁주는 척 겁먹는 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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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미국에서 처음으로 만난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도 지난 4일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과 이서현 제일모직 부사장 등 두 딸들과 함께 전용기를 타고 김포공항을 통해 출국했다. 이 회장이 대통령 외국 방문에 동행한 것은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러시아 방문 때 동행한 이후 9년 만이다. 이 회장이 그룹 차원의 투자와 고용 활성화 등 선물 보따리를 준비했다는 소문도 흘러나온다.

이 회장이 풀어놓을 선물 보따리는 대략 예측이 가능하지만 관심이 집중되는 부분은 금산분리 공약의 향방이다. 이 회장 입장에서는 그룹의 경영권이 달려있는 민감한 이슈다. 여러 재벌 회장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이 문제가 직접적으로 거론될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이 두 사람은 이미 상당한 공감대를 이루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최근 공정거래위원회 업무보고에서 그 힌트를 찾을 수 있다.

공정위는 지난달 24일 청와대 업무보고에서 일반 지주회사의 금융 자회사 보유를 허용하기로 했다고 밝힌 바 있다. 공정위가 마련한 공정거래법 개정안에 따르면 보험사를 포함해 금융·보험 계열사가 3개 이상이거나 금융·보험 계열사의 자산규모가 20조원 이상인 대기업은 중간금융지주회사를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한다. 이 경우 에버랜드가 그룹 전체의 지주회사가 되고 삼성생명이 그 밑에 중간금융지주회사로 남게 된다.

금산분리는 산업자본의 금융자본 지배를 막기 위한 원칙이다. 이를 테면 이 회장이 삼성에버랜드의 경영권을 확보하고 에버랜드가 삼성생명을 지배하고 삼성생명이 고객들 보험금으로 삼성전자 지분을 소유해 이 회장이 간적접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식이 옳지 않다는 발상에서 출발한다. 금산분리 원칙을 엄격하게 적용하면 삼성생명과 삼성전자의 연결고리를 끊어야 하는데 이 경우 이 회장의 그룹 지배력이 크게 약화된다.

공정위는 당초 대기업 집단의 금융 계열사가 보유한 비금융 계열사의 의결권을 2017년부터 5%로 제한한다는 입장이었다. 이 회장 입장에서는 당장 삼성생명이 보유하고 있는 삼성전자 지분 7.5% 가운데 2.5%의 의결권을 잃게 된다. 삼성생명이 이 지분을 팔고 이 회장이 사들이면 되는 문제지만 이것만 해도 대략 5조원을 웃돈다. 금산분리는 이 회장 일가의 아킬레스건이다. 강도에 따라 자칫 그룹 전체가 공중분해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중간금융지주회사가 도입되면 삼성은 삼성생명을 계열 분리시키지 않고 그대로 에버랜드의 자회사로 두면서 삼성생명 보험 가입자들의 보험금으로 다른 계열사들을 지배할 수 있게 된다. 삼성생명이 중간금융지주회사가 되려면 삼성생명과 삼성화재가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 각각 7.5%와 1.3%를 에버랜드가 사들이고 삼성전자가 보유한 삼성카드 지분 35.3%를 삼성생명이 사들여야 한다. 이 경우에도 수조원의 자금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삼성 입장에서는 공정위의 제안이 딱히 불편하지도 반갑지도 않을 것으로 관측된다.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과 교수에 따르면 “삼성은 지금 상황이 그럭저럭 만족스럽기 때문에 굳이 중간금융지주회사로 옮겨갈 이유가 없는 상황”이다. 공정위는 금융 계열사들 합산 의결권을 5%로 제한하겠다는 입장인데 어차피 현행 공정거래법에는 금융 계열사들 지분과 특수관계인 지분을 더해 15% 이상 의결권을 행사할 수 없도록 돼 있다.

짚고 넘어갈 대목은 중간금융지주회사가 의무 사항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금산분리를 엄격히 적용해 지분을 정리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5조원 이상의 비용이 필요할 텐데 중간금융지주회사로 가려고 해도 마찬가지 비용이 든다. 삼성 입장에서는 당장 지주회사로 옮겨갈 이유가 없다. 일단은 버티는 게 최선이고 박근혜 정부가 금산분리 원칙을 강화하지 않는 이상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이은정 경제개혁연구소 연구원은 “삼성이 가장 원하는 방식은 삼성생명이 삼성전자 지분을 계속 보유하면서 지주회사로 전환하는 방식이겠지만 현행 법 체계에서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이 경우 에버랜드가 보험지주회사가 되고 삼성생명이 자회사로 들어가 일반지주회사나 비금융회사를 손자회사로 지배하게 된다. 이 연구원은 “그러려면 금융지주회사법을 개정해 보험사가 비금융회사를 지배할 수 있도록 추가적인 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결국 정치권과 재벌과 언론이 서로 겁주는 척, 겁 먹는 척하면서 여론의 간을 보고 있는 상황이다. 전 교수는 “하루 세끼를 먹던 사람에게 이제부터 다섯 끼 밑으로 먹으라고 으름장을 놓은 뒤 규제를 강화했다고 떠드는 꼴”이라고 비꼬았다. 전 교수는 “지주회사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면서 “공정위가 지주회사 요건을 강화하는 방식이 아니라 금융위원회가 거시건전성 관리 차원에서 계열분리 명령을 내리는 방안을 검토해볼 수 있다”고 제안했다.

이 연구원은 “중간금융지주회사를 허용하더라도 삼성이 지주회사로 전환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에버랜드를 지주회사로 두고 삼성생명을 중간금융지주회사의 손자회사로 둘 경우 삼성생명이 보유하고 있는 삼성전자 지분을 매입할 수 있는 계열사가 없고 에버랜드를 보험지주회사로 만들어 삼성생명이 중간금융지주회사로 들어가는 경우에는 계열 비금융회사의 지분 5% 이상을 보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연구원은 “중간금융지주회사는 지주회사 전환을 쉽게 해준다는 의미일 뿐 금융 계열사들 때문에 지주회사로 전환하지 못하는 기업집단에게 지주회사로 전환할 수 있는 길을 새로 열어주는 것은 아니며 보다 쉽게 지주회사로 갈 수 있게 하는 수준의 규제 완화라고 이해하면 된다”고 말했다. 이 연구원은 “현대자동차그룹 같은 경우는 도움이 되겠지만 대부분 재벌 기업집단에게는 별다른 도움이 안 되는 제도”라고 덧붙였다.

일련의 여러 정황을 종합하면 박근혜 정부는 금산분리 규제를 강화할 의지가 없거나 애초에 금산분리의 의미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 대선 때 민주당 경제민주화 공약을 총괄 지휘했던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 정책대학원 교수는 “박근혜 정부는 금산분리를 금지하는 척 하면서 오히려 금산분리의 원칙을 후퇴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유 교수는 “박 대통령은 금산분리를 오해하고 있거나 국민들을 속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재벌 문제 권위자인 김진방 인하대 경제학과 교수는 “금산분리를 공약에 집어넣은 건 높이 평가하지만 박근혜 정부가 내놓는 정책은 모두 금산분리를 완화하는 방향”이라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금융보험사를 자회사로 두는 걸 허용하거나 삼성전자가 지주회사와 자회사로 분리될 때 지주회사 밑에 삼성생명이나 삼성증권 등을 자회사 또는 손자회사로 가져갈 수 있도록 하겠다면서 그걸 금산분리라고 말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홍헌호 시민경제사회연구소 소장은 “경제민주화 공약 가운데 금산분리가 가장 뜨거운 이슈지만 박근혜 정부는 최대한 뒤로 미룰 가능성이 크다”면서 “재계도 그렇고 언론도 그렇고 이 금산분리 이슈를 거론하는 것 자체를 꺼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적당히 대기업 임원 연봉 공개나 정년 60세 연장 등의 이슈를 다루면서 경제민주화를 시늉만 하다 그칠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다.

물론 금산분리가 경제민주화의 가장 중요한 현안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유종일 교수는 “금융과 산업의 건전한 관계 설정, 그리고 한국 경제의 효율성과 안전성을 위해서 꼭 필요한 선결과제”라고 강조한다. “금산분리는 경제민주화의 작은 한 부분이지만 금산결합이 총수 일가의 지배력 강화 수단으로 활용돼 왔기 때문에 이를 바로 잡는 게 경제민주화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박 대통령이 삼성을 위해 깜짝 선물을 준비할까. 딱히 내놓을 게 없을 거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배적인 반응이다. 공정위가 들고 나온 중간금융지주회사는 금산분리 강화가 아니라 완화에 가깝다. 아마도 박 대통령은 적당히 이런 당근을 건네면서 겁주는 척 겁먹는 척 호흡을 맞추면서 임기 말까지 시간을 끌 가능성이 크다. 이번 미국 방문에서 박 대통령과 이 회장은 이런 암묵적인 사인을 주고받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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