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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강탈한 장물을 딸이 처분한다고?

고 김지태씨가 정수장학회의 전신인 부일장학회 소유의 토지 10만여평을 국가에 헌납한 것은 사실이다. 50년 전인 1962년 4월 중앙정보부 부산지부가 김씨를 부정축재 등 9개 혐의로 구속했다. 군 검찰이 징역 7년을 구형했는데 김씨는 구형을 받은 다음날 재산 포기각서를 제출했다. 기부승낙서에 서명된 날짜는 6월30일인데 나중에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감정결과, ‘二十’이라는 날짜 표기에 한 획이 더해져 ‘三十’으로 변조된 사실이 드러난 바 있다.

6월20일이면 김씨가 구속돼 있던 시점이다. 김씨가 구속된 상태에서 강압적으로 기부승낙서를 썼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어 했던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다. 김씨의 아들 김영구씨는 “부산 군수기지 사령부에서 아버지가 수갑을 찬 상태로 운영권 포기각서에 서명하고 도장을 찍었다”며 “내가 장남이라 인감 도장을 가지고 가, 현장을 똑똑히 목격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김씨는 기부승낙서에 도장을 찍고 이틀 뒤 풀려났다. 비극적인 역사의 한 장면이었다.

대통령 선거를 두 달여 앞둔 시점에서 정수장학회의 MBC 지분 매각 추진 의혹이 대선 정국을 뒤흔들고 있다. 최필립 정수장학회 이사장이 이진숙 MBC 기획홍보본부장을 만나 MBC와 부산일보 지분을 매각하는 방안을 논의한 사실이 드러났다. 정수장학회는 MBC 지분 30%와 부산일보 지분 100%를 보유하고 있다. 더욱 놀라운 건 이들이 매각 대금을 부산·경남 지역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으로 지원하자는 방안을 논의하는 대목이다.

한겨레가 공개한 녹취록에 따르면 이진숙 본부장은 “이게 굉장히 정치적 임팩트가 크기 때문에 그림이 괜찮게 보일 필요가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의 아킬레스건인 정수장학회 문제를 털고 가는 동시에 대선 구도에서 박 후보에게 유리한 국면을 조성하려는 의도가 드러났다. 장물을 매각해 대선자금으로 쓰려하는 것 아니냐는 비난이 쏟아지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황당할 뿐만 아니라 상식 이하의 발상이다.

박 후보는 그동안 “정수장학회는 공익재단이기 때문에 이사진이 곧 주인이며 이미 사회에 환원됐기 때문에 더 이상 환원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집해 왔다. 정수장학회와 연관성을 부정해 왔던 박 후보 입장에서는 정수장학회 문제에 개입할 명분이 없다. 최 이사장을 비롯해 이사진 전원을 물러나도록 하고 김지태씨 유족에게 경영권을 넘겨 이사진을 새로 구성하도록 하는 방법이 유일한 해법이지만 기존의 입장을 뒤집는 모양새가 된다.

최필립과 이진숙의 비밀 회동은 역설적으로 박 후보가 왜 온갖 비난을 감수하면서 정수장학회를 포기하지 못했는지를 드러낸다. 정수장학회는 박 후보의 정치적·경제적 기반이다. 정수장학회는 MBC와 부산일보에서 막대한 규모의 후원금을 받으면서 상청회와 청오회를 중심으로 방대한 정치적 네트워크를 구축해 왔다. 최필립과 이진숙의 비밀 회동은 박 후보가 정수장학회를 통해 MBC의 경영권까지 뒤흔들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다.

박 후보가 청산해야 할 것은 정수장학회의 MBC 지분이 아니라 정수장학회 자체다. 정수장학회는 부정하게 강탈한 장물이다. 지난 2월 김지태씨 유족이 낸 지분 반환 소송에서 법원은 정수장학회의 전신인 부일장학회의 헌납 과정에서 강압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공소시효가 소멸됐다는 이유로 각하되긴 했지만 국가의 범죄에 대해서는 공소 시효의 범위를 폭넓게 인정해줘야 한다는 비판이 거세다.

MBC 민영화는 최필립이나 이진숙 같은 사람들이 밀실에서 논의할 문제가 아니다. 가뜩이나 민감한 선거 국면에 특정 후보를 지원할 목적으로 논의될 문제는 더욱 아니다. 국민들이 바라는 건 MBC의 주식이 아니라 MBC가 방기하고 있는 공영방송의 책무다. 박근혜 후보는 지금이라도 정수장학회가 장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 그게 뒤틀린 역사를 바로 잡는 길이다.

(미디어오늘 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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