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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의 공동체와 의자놀이.

2007년 4월, 미국 버지니아텍 총기 난사 사건의 범인이 한국인 유학생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한국 언론은 패닉에 빠졌다. 인터넷에서는 희생자를 추모하는 게시글이 쏟아졌고 한미동맹과 한미자유무역협정에 차질을 빚을까 우려하는 목소리와 미국 정부에 조문 사절을 보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정작 미국 언론은 한국 사회의 호들갑스러운 반응을 신기해했다. 그들이 보기에 조승희는 미국인이었고 어느 나라 출신인지는 별다른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지난 6월, 프랑스에서 프랑스와 올랑드 대통령 당선과 함께 한국계 입양인으로 각료가 된 플뢰르 펠르랭이 신문 1면을 장식한 적이 있었다. “미모의 한국계 입양아 프랑스 장관”이라는 수식어가 붙었고 “한국명 김종숙”이라는 설명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정작 한국 특파원들과 인터뷰에서 “나는 외모만 한국인일 뿐 모든 것이 프랑스인인데 한국계라는 이유 하나로 관심이 쏟아진 것 같다”고 말했다.

비슷한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한국계 미국인인 골프 선수 미셸 위를 우리 언론은 굳이 괄호까지 쳐서 위성미라고 부른다. 김용 세계은행 총재 역시 한국계 미국인인데 언론은 제2의 반기문으로 평가한다. 민족의 경계는 모호할 뿐만 아니라 다분히 자의적이다. 한국계 미국인인 슈퍼볼 최우수 선수 하인스 워드에 쏟아졌던 떠들썩했던 열광과 필리핀계 한국인인 이자스민 새누리당 의원에게 쏟아졌던 싸늘한 인신공격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인류학자 베네딕트 앤더슨은 “민족이란 근대국가의 울타리 안에서 자신과 운명을 함께하는 집단이 만든 상상의 공동체”라고 규정한 바 있다. 앤더슨의 설명에 따르면 민족국가는 역사적 산물이 아니라 근대 자본주의의 발명품이다. 그리고 이런 상상을 만들어 내고 지탱하는 것이 바로 언론이다. 조승희와 펠르렝의 상반된 언론 보도는 우리의 상상의 공동체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주는 적나라한 사례다.

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은 대형 스포츠 이벤트는 상상의 공동체를 더욱 공고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언론은 신아람 선수의 안타까운 1초에 공분하면서 만도와 SJM에 들이닥친 경비용역업체의 폭력은 침묵한다. 국민들은 국가대표 축구팀의 승부차기를 마음 졸이며 지켜보지만 두들겨 맞고 쫓겨난 노동자들의 소식은 외면한다. 국가와 민족은 선수들 가슴에 붙은 태극마크로 선명하게 빛나지만 그날 그 파업 현장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지난 주말 한상균 쌍용자동차 노조 지부장이 3년 만기 출소했는데 이를 보도하는 언론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 3년 동안 세상을 뜬 쌍용차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22명이나 된다. “신문을 펼쳐보기가 괴로웠다”는 사연도 안타깝지만 파업 철수의 조건으로 내걸었던 무급휴직자 원직복직 약속이 헌신짝처럼 버려졌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언론은 거의 없다. 금메달은 우리의 승리고 우리의 자랑이지만 고통은 그들의 몫이다.

올림픽에 가려진 이슈들이 너무나도 많다. 한강과 영산강, 낙동강 등에서 심각한 녹조 현상이 발생했다. 4대강 사업의 부작용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인데 이명박 대통령은 “폭염으로 인한 불가피한 현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새누리당의 공천뇌물 사건도 정치권의 판도를 뒤흔들 엄청난 사건이지만 올림픽 메달 소식에 파묻혔다. MBC PD수첩 작가들이 전원 해고된 사건도 언론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

상상의 공동체가 주는 쾌락을 평가절하할 이유는 없다. 선수들의 투혼과 인간승리는 그 자체로 감동이다. 다만 상상의 공동체가 보듬지 못하는 진짜 우리와 우리가 딛고 있는 현실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게 진짜 공동체를 복원하는 첫 걸음이다. 신아람의 1초에 분노하는 반의 반 토막의 관심이라도 평택에 쏟았다면 훨씬 더 좋은 세상이 됐을지도 모른다. 스포츠는 구경으로 끝나지만 ‘의자놀이’는 바로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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