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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총제 폐지·순환출자 금지, 이건희는 콧방귀 뀐다.

Written by leejeonghwan

July 8, 2012

요즘은 누구나 경제 민주화를 이야기한다. 새누리당은 아예 대선 공약으로 내걸 태세다. 주도권을 빼앗긴 민주통합당도 강도 높은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출자총액제한제도를 부활해야 한다고 말한다거나 순환출자를 금지해야 한다거나 말로만 떠들기는 쉽다. 문제는 지금 논의되고 있는 그 어느 제도도 근본적인 해법이 될 수 없다는 데 있다. 출총제는 삼성그룹이 해당되지 않고 순환출자 금지는 LG그룹과 SK그룹 등이 해당되지 않는다.

재벌 개혁 논쟁은 역사가 깊다. 이명박 정부 들어 폐지되긴 했지만 출총제는 자산총액 10조원 이상 기업집단 소속의 기업이 순자산의 40%를 초과해 출자할 수 없도록 제한하는 제도다. 여기에 적용돼 추가 출자를 할 수 없는 기업은 금호석유화학과 금호타이어 등 2개 뿐이었다. 출총제가 기업 투자를 막는다는 주장도 억지였지만 출총제를 다시 부활해야 한다는 주장도 실효성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순환출자 금지는 삼성그룹에 해당되지만 금지할 수단이 마땅치 않다. 순환출자 금지는 막연한 구호일 뿐이고 금융·산업 분리가 본질이다. 기업 A가 기업 B에 출자하고 기업 B가 기업 C에 출자하고 기업 C가 기업 A에 출자하는 걸 순환출자라고 부르는데 이 과정에서 금융계열사들의 자산을 동원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이를 테면 이건희 회장이 삼성생명 보험 계약자들의 자산으로 삼성전자 지분을 확보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삼성그룹의 지주회사 역할을 하고 있는 삼성에버랜드는 삼성카드 지분 8.64%를 보유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삼성생명 지분 6.49%와 삼성화재 지분 1.09%를, 삼성물산은 삼성생명 지분 4.65%를 각각 보유하고 있다. 새누리당이나 민주통합당이 정말 재벌개혁의 의지가 있다면 순환출자 금지라는 공허한 구호를 반복할 게 아니라 산업자본의 금융자본 지배를 근본적으로 차단할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최근 경제 민주화 관련 언론 보도는 모두 변죽만 울리고 있다. 정치권에서 쏟아내는 이슈는 전혀 새롭지 않은 재탕 반복일 뿐이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재벌 총수 일가가 1%도 안 되는 지분으로 99%의 기업을 지배하고 있다는 보도자료를 내자 모든 언론이 거품을 물고 재벌을 비난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런 보도는 1년 전, 2년 전에도 있었다. 재벌 개혁이라는 구호는 넘쳐나지만 늘 변죽만 울리고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가 제기한 ‘한국경제 성격논쟁’ 역시 마찬가지다. 장 교수는 베스트셀러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에서 “재벌 경영권과 복지를 맞바꾸자”는 파격적인 제안을 던진 바 있다. 장 교수는 “재벌을 강제로 해체할 경우 외국 투기자본에게 경영권이 넘어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재벌의 경영권이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재벌과 주주자본주의의 결탁을 막기 어렵고 그 결과 고액배당과 투자부진, 성장동력 약화로 이어진다”는 논리다.

장 교수는 주주자본주의의 대안이 재벌 시스템이라는 도식을 전제하고 정부의 개입을 해법으로 제시하고 있다. 장 교수와 공저자로 참여한 정승일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위원은 참여연대를 비롯한 진보적 성향의 학자들을 겨냥해 “진보의 탈을 쓴 신자유주의자들”이라고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내기도 했다. “경제개혁연대를 주축으로 한 경제 민주화 논쟁이 주주자본주의를 심화시키는 결과를 불러왔다”는 게 장 교수 등의 주장이다.

반면 진보진영 학자들은 주주자본주의와 재벌이 배치되는 개념이 아니라고 반박한다. 이병천 강원대 교수는 프레시안 기고에서 “장 교수는 주주자본주의냐, 재벌이냐를 양자택일하라는 이항대립 문제의 처방전을 내면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모두 공멸할 것처럼 몰아가고 있다”고 비판했다. 정태인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원장은 “재벌의 경영권을 보장해주면 장기 모험투자를 할 거라는 건 실로 안이한 생각”이라고 반박하기도 했다.

주주자본주의냐 재벌이냐의 논쟁은 2001년 대안연대회의 발족 이후 벌써 10년이 지났지만 별다른 성과 없이 평행선을 그리고 있다. 장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재벌 시스템에서 떨어져 나간 하이닉스반도체나 대우자동차 등이 투자 부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반면 삼성그룹과 현대기아차그룹 등이 놀라운 실적을 보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주주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재벌을 선택한다고 하더라도 타협의 지점이 모호한 것도 사실이다.

장 교수가 “재벌 해체는 곧 투기자본의 잔칫상”이라는 논리적 비약에 빠져있는 것처럼 장 교수를 비판하는 진보진영 학자들은 주주자본주의의 폐해를 간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진보진영에서는 설비투자 부진과 양극화의 해법을 제시하지 못했다. 고용 없는 성장이 화두였지만 이제는 그나마도 한계를 맞고 있는 상황이다. 재벌 해체가 아니라 재벌 활용론이 필요하다는 장 교수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재벌과 타협이 필요하다는 장 교수의 주장은 도대체 뭘 주고받을 것이냐는 반론에 부딪힌다. 장 교수는 주주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재벌을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이미 재벌과 주주자본주의가 끈끈하게 결탁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당기순이익과 배당이 꾸준히 늘어나는 이상 주주들은 재벌 시스템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 재벌에게 주주자본주의는 오히려 경영권을 보장하는 수단이 된다. 무엇을 타협할 수 있을까.

재벌의 선의를 기대하는 것 말고 성장을 담보할 다른 대안이 없는 것일까. 재벌이냐 주주자본주의냐의 이분법을 벗어나 발전적인 논의를 시작해야 할 때다. 장하준 교수 주장의 핵심은 시장의 탐욕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데 있다. 국가권력이 개입해야 하고 필요하다면 재벌과도 손을 잡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병천 교수의 주장처럼 재벌을 강하게 압박하고 통제할 방법을 고민하는 게 우선이고 그 다음에야 타협을 이야기하는 게 가능할지도 모른다.

정치권이 정말 경제 민주화가 시대적 화두라고 생각한다면 공허한 구호를 반복하는 데 그치지 말고 좀 더 실천적인 해법을 내놓아야 한다. 금산분리를 강화한다고 해서 당장 재벌이 해체되지는 않는다. 정규직 전환을 강제하고 사내하청을 금지한다고 해서 이익이 급감하거나 재벌의 경영권이 위협받는 것도 아니다. 재벌개혁의 대안이 지주회사인 것처럼 호도하는 경제지들의 논리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오래 된 논쟁이지만 핵심은 ‘고용 없는 성장’의 시대에 정부가 어떤 역할을 할 것이냐다. 재벌 해체가 답이 아닌 것처럼 막연하게 재벌의 선의에 기대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없다. 경제 민주화의 함정을 경계하되 주주자본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는 대안을 모색해야 할 때다. 쾌도난마의 해법 같은 건 없다. 분명한 것은 시장의 탐욕을 규제하고 게임의 법칙을 바로잡는 일이 정부의 역할이고 책임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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