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lect Page
더 나은 세상은 가능하다, 이정환닷컴!

두들겨 맞고 쫓겨나는 기자들.

Written by leejeonghwan

June 13, 2012

1987년 봄. 박종철군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 고문을 받다가 숨졌을 때 언론은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더라’는 경찰의 발표를 그대로 받아썼다. 그걸 믿는 사람이 있을까. 6월10일 오후 6시, 전국에서 40만명의 시민들이 쏟아져 나와 박종철군 고문치사 은폐를 규탄하면서 독재타도·호헌철폐를 외쳤다. 이날은 집권 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이 전당대회를 열어 노태우 최고위원을 차기 대통령 후보로 선정, 사실상 차기 대통령으로 확정한 날이었다.

MBC는 이날 민정당 전당대회의 막간 행사를 진행했다. MBC 교향악단까지 동원돼 여흥을 돋웠던 이날 행사에서 MBC 소속의 개그맨 김병조씨가 “민정당은 국민에게 정을 주는 당이고, 통민당(통일민주당)은 국민에게 고통을 주는 당”이라고 발언한 게 알려져 호된 곤혹을 치르기도 했다. 김씨는 준비된 대본을 읽었을 뿐이라고 해명했지만 MBC에 항의전화가 빗발쳤다. 정권의 선전도구로 전락한 공영방송의 씁쓸한 한 단면이었다.

이날 저녁 MBC는 “전국 22개 도시에서 강행하려던 박종철군 고문규탄과 호헌철폐 국민대회는 경찰의 봉쇄조치로 산발적인 시위에 그치고 제대로 열리지 못했다”고 보도했다. “불법과 폭력 그리고 선동으로 우리의 공동체 자체를 파괴하는 사태를 용납할 수 없으며 정치권 밖에서 폭력으로 혼란을 조성하는 일은 평화적 정부교체를 방해하는 행위로 어떠한 희생이 있더라도 단호히 대처할 것”이라는 전두환 대통령의 말을 충실하게 전달하기도 했다.

6월26일 전국 37개 도시에서 140만명의 시민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을 때도 MBC는 “평화대행진이 서울을 비롯한 전국 주요도시에서 일제히 시도됐으나 당국의 원천봉쇄작전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채 일부 지역에서는 격렬한 가두시위가 벌어졌다”고만 보도했다. “시위가 벌어지는 도심지역은 버스 정류장과 일부 지하철역이 폐쇄되기도 해서 서울 시내의 많은 지역은 큰 교통 혼잡을 빚었다”는 지적도 빼놓지 않았다.

MBC 기자들이 시위현장에서 두들겨 맞고 쫓겨난 것도 이런 편파적인 보도 때문이었다. 성난 시위대가 MBC 취재차량을 점거하고 운전기사를 폭행한 사건도 있었다. 그날 저녁 MBC는 “명동성당이 평온을 되찾았다”는 뉴스를 내보냈다. 이에 반발한 기자들이 사장 퇴진과 기관원 출입금지, 해직기자 복직 등을 요구하는 성명을 내고 방송민주화추진위원회를 결성했으나 결국 강제 해체됐다. 그리고 그해 12월 MBC에 방송사 최초로 노조가 결성됐다.

서슬퍼런 권력 앞에 무기력하게 무릎을 꿇었던 언론인들을 일깨운 건 시민들의 거센 분노였다. 기자와 PD들은 취재현장에서 두들겨 맞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시청자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방송은 버틸 수가 없다. 꽃은 열흘을 가지 못하고 권력은 10년을 넘기지 못한다. 진실을 은폐하고 여론을 호도할 수는 있지만 영원히 국민들을 속일 수는 없다. 강물은 굽이굽이 흘러도 바다로 간다. 그게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뜨거웠던 그해 여름, 6월 항쟁 25주년을 맞은 지금 우리는 고통스러운 기시감을 겪고 있다. 정권 말 부정부패 이슈가 쏟아지고 있는데 언론은 축소·은폐하기에 바쁜 모습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이나 민간인 불법사찰, 4대강, 파이시티, 내곡동 사저 논란 같은 이슈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거나 너무나도 쉽게 잊혀진다. 정권의 눈치를 보는 낙하산 사장들이 방송을 점령했고 저항하는 기자와 PD들은 징계를 받거나 쫓겨났다.

최근 파업 대열에 합류한 MBC 최일구 앵커가 한 언론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민주화 시위가 한창일 당시 MBC 로고가 새겨진 차에 타고 명동성당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누군가 ‘야, MBC다!’라며 쫓아왔습니다. 차는 파손됐습니다. 그 고초를 겪은 지 25년 만입니다. 최근 FTA 반대 집회에서 후배들이 고초를 겪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고초를 저는 이해합니다. 그래서 앵커 자리에서 내려왔습니다. 우리는 25년 전으로 후퇴했습니다.”

25년이 지난 지금도 언론을 일깨우는 것은 시민들의 분노다. 취재현장에서 쫓겨난 기자와 PD들이 들고 일어나 파업을 시작한 게 벌써 5개월이 다 돼 간다. 훗날 역사는 MBC 언론인들의 파업을 언론자유와 공정방송 사수를 위한 투쟁으로 기록할 것이다. 외롭고 고통스럽겠지만 타협 없이 굳건하게 싸우고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이유다. 분노하는 만큼 독하게 싸워야 한다. 시민들의 지지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이다.

(미디어오늘 사설.)

Related Articles

Related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 광고 중독을 끊어야 저널리즘이 산다.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 광고 중독을 끊어야 저널리즘이 산다.

(민중의소리 창간 20주년 특별 기획으로 기고한 글입니다.) 물이 빠지면 누가 발가벗고 수영을 했는지 알 수 있다. 익숙한 기시감이지만 위기와 재난이 닥칠 때마다 우리는 언론의 바닥을 다시 발견하게 된다. 바야흐로 뉴노멀(new normal)의 시대, 우리가 코로나 바이러스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한 번 무너진 언론의 신뢰도 쉽게 회복하기 어렵다는 걸 깨닫고 있다. 한국 언론은 지금 불가항력적인 변화의 요구에 직면해 있다. 누가 나에게 언론 개혁 방안을 한 줄로...

누가 한국 언론을 지배하는가.

누가 한국 언론을 지배하는가.

때로는 소유가 존재를 규정한다. 한국 언론의 소유지배 구조를 살펴보면 몇 가지 유형을 구분할 수 있다. (아래 수치와 그래프는 모두 한국언론진흥재단 신문산업 실태조사와 언론연감을 기초로 미디어오늘 직접 취재와 금융감독원 전자공시 등을 교차 확인해 보완한 것이다. 특별한 언급이 없으면 모두 2018년 말 기준이지만 최근 상황이 반영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사업보고서 등 후속 자료가 나오는대로 계속 업데이트 할 계획이다.)...

말거나 펴거나 접거나 늘리거나, 완전히 다른 디스플레이의 시대가 온다.

말거나 펴거나 접거나 늘리거나, 완전히 다른 디스플레이의 시대가 온다.

(학교 과제로 쓴 글입니다.) 플렉시블 디스플레이와 나노 기술. 이정환 카이스트 과학저널리즘대학원 석사 과정. 1. 플렉시블 디스플레이의 이상과 현실. 지난해 9월 삼성전자가 야심차게 내놓은 폴더블폰, 갤럭시 폴드는 참담한 실패였다. 239만 원이라는 놀라운 가격에도 내구성이 턱없이 떨어졌고 굳이 스마트폰을 접어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는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올해 2월에 다시 내놓은 갤럭시 플립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격은 297만 원으로 더 뛰었지만 힌지의 치명적인 주름을...

Follow Us

Join

Subscribe For Updates & Offers

Lorem ipsum dolor sit amet, consectetur adipiscing elit. Aenean scelerisque suscipit condimentum. Vestibulum in scelerisque eros. Fusce sed massa vel sem commod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