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회장은 없다? 흔들리는 삼성 3세 승계 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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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외아들인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보다 큰 딸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이나 둘째 딸 이서현 제일모직 부사장에게 마음이 기울었다는 소문은 꽤 오래 전부터 있었다(이하 직책 생략). 이재용이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면서도 아직까지 경영능력을 입증하지 못한 반면 이부진과 이서현은 확고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이건희 역시 위로 두 형을 제치고 그룹을 넘겨받았다. 이재용 후계구도 역시 장담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이건희가 두 딸의 손을 잡고 기자들 앞에 나타나 “우리 딸들 광고 좀 해야겠다”면서 카메라 세례를 받았던 걸 떠올리지 않더라도 삼성 3세 승계구도에 심상치 않은 변화의 조짐이 있다는 건 여러 징후에서 드러난다. 이부진은 2010년 호텔신라 사장으로 승진하면서 삼성에버랜드 사장까지 맡고 있다. 에버랜드는 삼성그룹의 지주회사 역할을 하고 있는 기업이다. 최대주주는 이재용(25.10%)이지만 경영은 이부진(8.37%)이 맡고 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삼성그룹의 핵심은 물론 삼성전자다. 이건희의 삼성전자 지분은 3.38% 밖에 안 된다. 이건희의 부인 홍라희는 0.74%, 이재용은 0.57% 밖에 안 된다. 삼성전자의 최대주주는 7.47%를 보유하고 있는 삼성생명이다. 물론 삼성생명 계약자들의 보험 자산이긴 하지만 그 삼성생명을 이건희(20.76%)와 에버랜드(19.34%)가 나눠서 지배하고 있다. 에버랜드를 지배하면 삼성생명과 삼성전자, 삼성전자의 계열사들을 지배할 수 있는 구조다.

경제전문 프리랜스 기자 박현군씨가 최근 펴낸 ‘이건희의 고민’은 삼성그룹 안팎에서 떠돌고 있는 삼성 3분론을 소개하고 있다. 이재용이 삼성전자그룹을, 이부진이 삼성물산그룹을, 이서현이 제일그룹을 이뤄 각각 독립하면서 삼성그룹이 세 토막으로 쪼개질 거라는 전망이다. 흥미로운 건 이 과정에서 에버랜드와 삼성생명 지분이 어디로 가느냐에 따라 삼성그룹의 헤게모니가 뒤바뀔 가능성이 크다는 데 있다.

지금은 이건희가 삼성생명의 최대주주지만 이건희가 삼성생명 지분을 자식들에게 넘겨주면 2대주주인 에버랜드(19.34%)가 최대주주가 되면서 금융지주회사가 된다. 금융지주회사는 금융 계열사가 아닌 계열사를 소유할 수 없다. 지금까지는 삼성생명 보험 가입자들의 자산으로 삼성전자를 지배했는데 그 연결고리가 끊기게 된다는 이야기다. 다시 말하면 이재용은 삼성생명과 삼성전자를 둘 다 넘겨받을 수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맹희의 소송도 중요한 변수다. 이건희의 형인 이맹희는 최근 이건희가 차명으로 상속한 재산을 나눠달라는 소송을 냈다. 만약 이맹희가 승소할 경우 삼성생명 지분 8.50%를 확보하게 된다. 이건희의 지분은 20.76%에서 15.50%로 줄어들게 된다. 문제는 이 경우에도 19.34%의 지분을 보유한 에버랜드가 최대주주가 되면서 금융지주회사로 분류, 삼성전자 지분을 매각해야 한다.

가능한 시나리오로는 이재용이 에버랜드 지분(25.10%)을 팔고 그 돈으로 삼성생명 지분을 사들이는 방법이 있다. 이 경우 이재용은 삼성생명 지분을 8.71%에서 최대 19.34%까지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건희가 이재용의 에버랜드 지분을 사들여서 이부진에게 증여하고 삼성생명 지분(20.76%)을 이재용에게 증여하는 방법도 있다. 이 경우 이재용은 삼성생명 지분 40.10%를 확보하고 이부진은 에버랜드 지분 33.47%를 확보하게 된다.

에버랜드를 지주회사와 사업회사로 나눠서 지주회사를 이재용이 갖고 사업회사를 이부진이 갖는 방법도 있다. 이 경우 계열이 분리되면서 이재용이 삼성생명을 통해 삼성전자를 지배하고 이부진이 에버랜드를 통해 삼성물산을 지배하는 구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부진은 비상장 회사인 삼성석유화학 지분을 33.19% 보유하고 있는데 이 지분을 이서현에게 팔고 그 돈으로 이재용의 에버랜드 지분을 사들이는 시나리오다.

아직까지는 별다른 조짐이 없지만 이재용과 이부진 사이에 본격적인 헤게모니 경쟁이 시작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박현군 기자는 이 책에서 “에버랜드의 최대주주 이재용이 임시 주주총회를 소집해 이부진의 퇴진을 요구한다면 이부진의 경영능력은 아무 쓸모가 없다”고 지적한다. “경영권 다툼, 적대적 인수합병은 결국 의결권 있는 보통주를 누가 더 많이 확보하느냐의 싸움으로 결론나게 마련”이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다.

지금까지 삼성은 이재용 신화 만들기에 전력을 집중해 왔다. 3세 구도 역시 이재용을 중심으로 재편돼 왔다. 지난 1996년 에버랜드가 헐값에 전환사채를 발행하면서 이재용에게 25.10%를 주고 이부진·이서현에게 각각 8.37%씩을 준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미 후계구도는 상당 부분 이재용에게 넘어간 상태지만 그룹 차원의 추가지원과 교통정리가 없다면 이재용 회장은 섣불리 장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이 더 있다. 에버랜드가 삼성그룹의 지주회사 역할을 하고 있지만 중심은 삼성생명이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에버랜드가 삼성생명의 최대주주였지만 금융산업 분리 논의가 시작되면서 이건희의 지분이 늘어나 현재는 이건희가 최대주주가 돼 있다. 에버랜드가 사용하고 있는 땅 대부분이 이건희의 개인 땅이라는 사실도 주목된다. 이건희 회장의 의중에 따라 에버랜드 지분은 휴지조각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삼성전자가 그룹의 중심에 있는 건 사실이지만 삼성물산은 삼성그룹의 모태다. 이재용이 삼성생명과 삼성전자, 삼성SDS를 물려받는 데 그치고 이부진이 삼성물산과 나머지 계열사들을 물려받을 경우 삼성그룹의 법통이 이부진에게 넘어갔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실제로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은 상황이다. 이재용 입장에서는 삼성전자와 삼성전자를 제외한 나머지 둘 다를 갖기는 어려울 거라는 전망 때문이다.

사실 재벌가의 자녀들이 계열사를 어떻게 나눠 갖느냐 보다 더 중요한 대목은 2세와 3세 승계 과정에서 자산이 계속해서 불어난다는 사실이다. 아직 상속도 하기 전인데 이재용과 이부진·이서현 남매의 자산은 이건희에 맞먹는 수준으로 불어났다. 에버랜드 불법증여 사건에서 보듯이 계열사들이 손해를 보면서 총수의 자녀들에게 기업의 경영권을 밀어줬고 이들은 헐값에 사들인 지분을 사고팔면서 자산을 불려왔다.

이건희의 고민은 세 자녀에게 공평하게 지분을 나눠주고도 지배력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데 있겠지만 순환출자 구조가 끊기면서 그룹의 분리가 불가피한 상황이 됐다. 알려진 대로 이건희의 마음이 이재용에서 이부진으로 넘어갔다면 이부진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대대적인 지분이동과 구조조정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이재용 회장이나 이부진 회장이나 위태로워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이건희의 고민이 깊고도 깊을 수밖에 없다.

이건희의 고민 / 박현군 지음 / 일리 펴냄 / 1만4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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