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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왜건’보다 ‘언더독’ 전략 먹혔다.

Written by leejeonghwan

April 14, 2012

예상을 뒤엎는 총선 결과에 해석이 분분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명박 심판이라는 야권연대의 구호가 민심을 크게 흔들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100석도 얻기 어려울 수 있다고 호들갑을 떨었던 새누리당은 과반수 의석을 차지했고 일찌감치 승리에 도취됐던 민주통합당은 싸늘한 민심에 큰 충격을 받고 자중지란에 빠진 모습이다. 지난 여러 선거의 경험을 돌아보면 ‘숨은 표’가 야권에 유리하게 나타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선거운동이 시작되기 하루 전날, 민간인 불법사찰 문건이 무더기로 공개됐고 여기에 맞서 조중동 등 보수언론은 문건 가운데 상당 부분이 노무현 정부 때 작성된 것이라고 쟁점을 희석시켰다. 야권은 불법감찰과 합법감찰은 다르다며 반박했지만 파괴력은 급격히 수그러들었다. 야권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폐기와 제주 해군기지 건설 반대 등의 구호를 내걸었지만 큰 울림을 얻지 못했다.

오히려 여론은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 멤버인 김용민 노원갑 후보의 8년 전 막말 파문에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민주통합당은 정봉주 전 의원의 지역구에 김 후보를 전략공천하면서 ‘나꼼수’ 특수를 노렸지만 보수언론의 집중포화에 직면했다. 김 후보의 막말보다 더 치명적이었던 건 민주통합당의 사태수습 방식이었다. 한명숙 대표가 김 후보에게 사퇴를 권고했지만 김 후보는 이를 거부했고 보수언론은 선거 막판까지 네거티브 공세를 펼쳤다.

이번 선거는 결과적으로 밴드왜건 효과 보다는 언더독 효과가 더 컸다.

밴드왜건 효과는 유행에 따라 상품을 구입하거나 지지하는 정당을 바꾸는 걸 말한다. 미국의 경제학자 하비 라이벤스타인이 1950년에 발표한 네트워크효과의 일종으로, 서부 개척시대 금광이 발견됐다는 소식에 사람들이 역마차를 따라 우르르 몰려다니는 현상에서 유래한 개념이다. 기업에서는 충동구매를 유도하는 마케팅 기업으로 활용하고 정치권에서는 후보의 지지율을 높이는 선동 전략으로 활용한다. ‘될 사람 밀어주자’는 전략인 셈이다.

언더독은 밴드왜건 효과의 반대되는 개념으로 투견 경기에서 밑에 깔린 개를 말한다. 게임이나 시합에서 전력이 뒤처지는 사람을 언더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언더독 효과는 강자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약자에게 연민을 느끼며 이들이 강자를 이겨주기 바라는 심리현상을 말한다. 스포츠 경기에서 특별히 응원하는 팀이 없을 때 약자를 응원하거나 선거에서 불리한 후보에게 동정표가 쏠리는 현상을 언더독 효과로 설명할 수 있다.

흔히 사람들은 절대 강자에 대한 견제 심리가 있는 반면 어려운 상황에 놓인 언더독이 자신과 비슷하다고 느낀다. 젊은 층과 화이트칼라 직장인들은 밴드왜건 효과에, 그리고 여성과 자유주의자, 저소득 계층은 언더독 효과에 더 민감하다는 연구 결과도 있었다. 이번 선거에서도 서울과 경기지역 유권자들에게는 이명박 심판이라는 밴드왜건 효과가, 강원과 충청지역 유권자들은 거대 야당의 독주를 막아야 한다는 언더독 효과가 주효한 것으로 분석된다.

여론조사 결과 크게 앞설 것으로 예상됐던 민주통합당의 부진에는 브래들리 효과도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브래들리 효과는 1982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주지사 선거에서 흑인인 토머스 브래들리가 여론조사에서는 상대편 후보를 크게 앞섰는데 실제 선거 결과에서는 패배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전문가들은 일부 백인들이 인종적 편견을 숨기기 위해 투표 전의 각종 조사에서 흑인 후보를 지지한다고 거짓으로 진술한 것으로 분석했다.

주위를 둘러보면 ‘MB 심판’이라는 구호에 반대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치에 관심이 적거나 심판이나 권력 교체 같은 과격한 구호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도 많다.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지만 정작 투표장에 가서는 새누리당을 찍는 ‘숨은 표’가 많았다는 이야기다. ‘MB심판’이 ‘민주통합당 지지’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의미다. 구체적인 대안이나 비전 제시 없이 ‘MB 심판’을 외쳤던 야권연대에 대한 반발도 컸던 것으로 분석된다.

새누리당이 한나라당이라는 ‘보수꼴통’의 이미지를 벗어나기 위해 새누리당이라는 가치중립적 또는 가치배제적 당명을 선택하고 선명하고 산뜻한 빨간 색 점퍼를 맞춰 입고, 진성호, 전여옥, 주성영, 강용석 등 많은 비판을 받았던 의원들을 과감하게 쳐내면서 변신을 시도한 것도 어느 정도 먹혀들었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새누리당은 이명박 대통령과 거리감을 두고 차별화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부산 사상구에서 유력한 대권 주자인 문재인 후보에 맞섰던 손수조 후보도 결과적으로 한나라당의 보수 이미지를 희석하는 데 기여했다. 카메라가 박근혜 위원장을 비출 때마다 옆 자리에 앉은 이준석 위원의 해맑은 이미지도 이명박 대통령을 잊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마침 KBS와 MBC가 파업 중이라 민간인 불법사찰이라는 대형 악재가 제대로 주목받지 못한 것도 새누리당의 승리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

야권연대가 떠들썩한 밴드왜건 효과를 노렸다면 새누리당은 몸을 낮추고 언더독 효과에 집중했다. 새누리당의 언더독 전략은 우연히 나온 게 아니라 치밀하게 기획된 작품일 가능성이 크다. 새누리당은 일찌감치 이명박 정부와 거리감을 두면서 야당의 공격에 수세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리고 쇄신을 강조하는 한편 여소야대 가능성을 흘리면서 위기감을 확산시키고 전통적인 보수세력의 결집을 호소하는 전략을 펼쳤다.

주목할 부분은 과반의석을 차지한 이상 새누리당의 언더독 전략이 더 이상 먹히지 않게 됐다는 사실이다. 공수교체가 된 상황에서 박근혜 대세론이라는 밴드왜건 전략에 민주통합당은 문재인 또는 안철수 대권도전 카드를 꺼내 맞설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언더독 전략은 선거 막판에 효과가 크다. 한명숙 대표가 물러난 뒤 대선 후보가 조기 등판할 경우 박근혜 위원장과 기세 싸움에서 밀려 중도 낙마할 위험도 크다.

이제 대선까지 8개월 남짓.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은 총선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미디어 전략을 짜야 한다. 새누리당은 대선 국면이 앞당겨져 박근혜 위원장이 전면에 나선 것이 부담스러울 테고 민주통합당은 약발이 떨어진 ‘MB 심판’을 넘어 판을 뒤집을 새로운 구호가 마땅치 않은 상황이다. 레임덕이 본격화한 가운데 뒤로 숨은 이명박 대통령을 끌어내려는 여야의 프레임 전쟁도 치열할 것으로 보인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

미국 로크리지연구소의 조지 레이코프 연구원은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Don’t Think of an Elephant)”란 제목의 책에서 왜 공화당이 미국 사회를 지배하는지를 설명한 바 있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라는 말을 들으면 코끼리를 생각하게 된다. 프레임을 부정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 프레임을 떠올려야 한다. 이 책은 상대편에 반대되는 주장을 펼치려면 상대편의 원칙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전략을 가르쳐줬다.

이를 테면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이 ‘세금 구제(tax relief)’라는 단어를 썼을 때 세금이 있는 곳에 고통이 있으며 고통을 줄여주는 사람이 영웅이고 이를 반대하는 사람이 악당이라는 프레임을 만들어 낸다. 상대방이 세금 구제를 반박하려고 하면 할수록 세금 구제라는 프레임을 강화하게 된다. 공화당은 세금 구제를 넘어 세금 투자라는 용어를 만들어 냈고 2000년 선거에서 압승을 거뒀다.

미국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저는 사기꾼이 아닙니다”라고 말했을 때 사기꾼의 이미지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된 것처럼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라는 프레임과 이명박 대통령의 ‘경제 살리기’라는 프레임, ‘잃어버린 10년’이라는 프레임은 이슈를 독식하고 여론을 지배했다. 지난 2010년 지방선거 때 천안함이 만든 안보 프레임, 지난해 서울시의 무상급식 프레임도 프레임 전략의 좋은 사례가 된다.

민간인 불법사찰이라는 이슈가 터졌을 때 새누리당과 조중동은 노무현 때도 사찰을 했다는 프레임을 만들었고 불법사찰이냐 합법감찰이냐는 논란이 시작되면서 불법사찰=이명박이라는 등식이 깨졌다. 김용민의 막말 파문이 터지고 사퇴 여부가 쟁점으로 떠오르면서 이명박은 완전히 뒤로 숨게 됐다. 코끼리의 이야기를 한 번 시작하면 코끼리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된다. 새누리당은 프레임 전략에서 일찌감치 민주통합당을 지배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것은 진보주의자들이 믿는 흔한 속설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바깥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실들 모두를 대중의 눈앞에 보여준다면, 합리적인 사람들은 모두 올바른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헛된 희망이다. 인간의 두뇌는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프레임이다. 한번 자리 잡은 프레임은 웬만해서는 내쫓기 힘들다.” (‘코끼리를 생각하지마’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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