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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으로 가는 미디어렙법, 최악과 차악 가운데 선택하라고?

Written by leejeonghwan

January 2, 2012

테러와의 전쟁에서 핵심은 원칙을 벗어난 타협을 하지 않는 것이다. 한 번 타협을 하기 시작하면 요구 조건이 계속 늘어나고 또 다른 테러를 부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미디어렙법 입법을 둘러싼 최근 논쟁 역시 비슷한 양상으로 흐르고 있다. 한나라당이 지역·종교방송사들을 볼모로 내세워 종편 특혜를 관철시키라고 압박하고 있고 민주통합당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질질 끌려가는 모양새다. 미디어렙법은 당초 입법 취지를 벗어나 산으로 가고 있다.

여러 언론사들의 생존권이 달려 있는 미디어렙법이 결국 해를 넘겼다. 종합편성채널의 민영 미디어렙 강제 위탁을 승인 시점 기준으로 3년 늦추고 MBC를 공영 미디어렙에 남겨두는 방안에 한나라당과 민주통합당이 합의를 끝낸 상태다. 민영 미디어렙은 1사1렙 형태로 가고 한 방송사의 지분 비율을 40%까지 허용하기로 했다. 미디어렙법의 당초 취지에서 크게 후퇴한 것이라는 원칙론과 최악이 아닌 차악이라도 선택해야 했다는 현실론이 엇갈린다.

전국언론노동조합과 언론개혁시민연대 등은 두어달 전까지만 해도 종편의 미디어렙 강제 위탁을 유예해서는 안 된다는 강경한 입장이었다. 그러나 종편이 출범하고 SBS가 광고 자회사를 설립하는 등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자 민주당이 내놓은 타협안을 받아들이고 연내 입법을 촉구해왔다. 조준상 언론연대 사무총장은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1보 후퇴를 받아들였다”면서 “진정성을 이해해달라”고 말하기도 했다.

다수당인 한나라당이 미디어렙법 처리에 의지를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SBS에 이어 MBC까지 코바코 시스템에서 빠져 나와 직접영업을 시작하면 그동안 코바코 연계 광고에 의존해 왔던 지역방송과 종교방송 등은 생존의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차악이나마 선택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총선과 대선 등 올해 정치 일정을 감안하면 자칫 2년 가까이 입법공백 상태가 계속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깔려있다.

그러나 이런 현실을 감안하더라도 종편의 광고 직접영업을 인정하고 미디어렙 지분을 40%까지 허용하기로 한 것은 방송의 제작·편성과 광고영업의 분리라는 2008년 헌법재판소 결정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시장의 질서를 뒤흔들어 방송산업 전반에 심각한 위기를 불러올 가능성이 크다. 조중동매는 신문의 영향력을 활용해 광고주들에게 터무니없이 높은 광고단가를 요구할 것이고 2년 유예가 끝난 뒤에도 1사1렙 형태로 직접영업을 계속할 수 있게 된다.

MBC를 공영 미디어렙에 묶고 SBS의 광고 직접영업을 금지하기로 한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종편의 조폭적 광고영업이 본격화하면 MBC와 SBS는 물론이고 방송산업 전체가 혼탁 경쟁에 내몰리게 된다. 당장은 지역방송과 종교방송을 살리는 방법이 되겠지만 중장기적으로 방송의 공공성을 심각하게 위축시키는 패착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양쪽이 서로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운다”는 비난을 쏟아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처럼 급박한 상황에 이르기까지는 종편의 눈치를 보면서 시간을 끌어왔던 정치권의 책임이 크지만 언론노조와 MBC도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코바코의 독점을 깨고 경쟁을 활성화하되 방송의 공공성을 지켜야 한다는 게 미디어렙법의 핵심이다. 그러나 MBC는 내심 민영 미디어렙으로 빠져나가기를 바랐고 그건 지난 1년여 동안 MBC 뉴스에서도 잘 드러난다. MBC는 미디어렙 이슈를 거의 다루지 않았고 그건 SBS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MBC와 SBS, 조중동매 종편은 모두 미디어렙법 입법이 지지부진 미뤄지다가 1사1렙 형태로 찢어지기를 바라면서 사실상 암묵적인 담합을 해왔다. 언론노조 역시 MBC·SBS 보다는 종편 규제에 더 많은 힘을 쏟아오다가 뒤늦게 부랴부랴 전략을 바꿨다. 종편을 민영 미디어렙에 묶으려면 1공영 1민영이라는 원칙 아래 MBC가 공영 미디어렙에 남도록 하는 게 선결 과제지만 MBC는 한발 빼는 모습을 보였고 언론노조는 이를 막지 못했다.

최악과 차악 가운데 선택을 해야 한다면 당연히 차악을 선택하는 게 맞다. 2011년 12월 상황만 놓고 보면 반쪽짜리 미디어렙법이나마 서둘러 처리하는 게 최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상황 논리는 문제의 본질을 간과하게 만든다. MBC를 막는 게 급한가, 종편을 막는 게 급한가의 이분법을 넘어서야 한다. 시간이 촉박하다는 이유로 종편에 선뜻 면죄부를 내줘서도 안 되지만 MBC나 SBS의 광고 직접영업 역시 마냥 방치할 수 없는 문제다.

공영과 민영을 막론하고 미디어렙은 특정 방송사가 지배할 수 없도록 지분을 분산해 제작·편성과 광고영업을 분리시켜야 한다는 게 기본 원칙이다. 최선의 해법은 이미 나와 있다. MBC는 KBS와 함께 공영 미디어렙에 남아야 하고 종편은 SBS와 함께 민영 미디어렙에 묶여야 한다. 지역·종교방송사들의 지원 문제도 중요한 변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더욱 방송의 공공성을 확보하고 시장 질서를 지키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일단 미디어렙법은 여야 합의를 이뤘지만 임시회 회기가 끝난 데다 아직 다음 일정조차 확정하지 못한 상태다.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전체회의도 남아있고 다음 달에 임시회가 소집된다고 하더라도 총선을 두 달 앞둔 시점에서 제대로 논의가 이뤄질지 의문이다. 가뜩이나 한나라당이 미디어렙법 입법에 KBS 수신료 인상안까지 연계 처리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여야 대립이 격화될 가능성이 크다.

여야가 합의한 미디어렙법안은 조중동 특혜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MBC와 SBS의 광고 직접영업을 두려워하는 건 지역·종교방송사들 뿐만이 아니다. MBC와 SBS의 고삐가 풀리면 종편도 생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MBC는 공영 미디어렙으로 가야 하지만 종편을 민영 미디어렙에 묶는 것과 병행돼야 한다. 이제 최악이나 차악을 거부하고 최선이 아니라면 차선을 찾는 방안을 모색해야 할 때다.

이제 연내 입법을 하느냐 마느냐의 논쟁을 끝내고 당장의 입법공백 상태를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지를 논의해야 할 때다. 원점으로 돌아가 미디어렙법의 입법 취지를 생각해 보면 해법은 명확하다. 국회는 KBS와 MBC, SBS, 종편 등의 눈치와 압박에서 벗어나 원칙에 맞는 법안을 모색해야 한다. 방송통신위원회는 헌재 결정의 취지에 따라 입법 공백 상태에서 MBC·SBS의 광고 직거래를 막을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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