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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 거부에 꼭 거창한 신념이 필요한가.”

Written by leejeonghwan

September 29, 2011

“인권을 말하다” 릴레이 인터뷰 ⑥ 양심적 병역 거부자 현민씨.

양심적 병역 거부라고 하면 흔히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을 생각하게 되지만 종교적 신념이 아닌 정치적 신념에 따른 병역 거부자들도 많다. 병역법 88조에 따르면 현역 입영 또는 소집 통지서를 받고 정당한 사유 없이 불응하면 3년 이하 징역형에 처하도록 돼 있다. 우리나라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양심적 병역 거부자는 1만여명에 육박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도 전국의 교도소에 600여명이 수감 중이다.


병역법 위반으로 1년6개월을 선고 받은 뒤 1년3개월 만에 가석방을 받아 지난 6월31일 출소한 현민씨는 ‘여호와의 증인’ 신도가 아니다. 거창한 정치적 신념이 있는 것도 아니라고 하고 자신을 평화주의자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는 병역 거부를 하기 위해 나의 신념을 증명 받아야 하는 것이냐고 반문한다. 그는 수감 생활을 괴롭게 회고했지만 병역 거부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헌법재판소는 지난 8월 병역법이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린 바 있다. 헌법재판소는 ‘여호와의 증인’ 신도 박아무개씨 등이 낸 위헌제청 심판에서 “양심의 자유가 매우 중요한 기본권이긴 하지만 국가안보라는 대단히 중요한 공익을 저해할 수 있는 무리한 입법적 실험(대체복무제)을 요구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이번 인터뷰에는 인권재단 박래군 이사와 함께 ‘전쟁 없는 세상’의 활동가 여옥씨가 함께 했다.

박래군 : “가장 최근에 출소한 양심적 병역거부자다. 출소하고 나서 제일 먼저 뭘 했나.”
현민 : “2009년 11월에 영장 받고 입영을 거부해서 재판을 받고 2010년 3월부터 복역해서 6월31일에 나왔다. 70일 정도 가석방돼서 조기 출소했다. 출소하고 나서는 그냥 집에 있었다. 동네 산책하고.”

박래군 : “교도소 생활은 어땠나.”
현민 : “‘여호와의 증인’이 아닌 병역 거부자가 처음에는 나 혼자였는데 나올 때는 나까지 4명으로 늘어났다. 영등포교도소에 있었는데 영치창구에서 일했다.”

박래군 : “영치창구에 있었으면 일이 힘들지는 않았겠다.”
현민 : “여호와의 증인들을 영치창구에서 일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더라. 교도관들 일을나눠 맡는 셈인데. 나는 여호와의 증인은 아니지만 병역법 위반이라 묻어갔다고 할까. 병역법 위반의 99%가 여호와의 증인이니까. 나는 스스로 정치범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교도소 관행이라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그게 독특한 경험이라고 할까. 교도소에 오래 있었던 사람들이 볼 수 없는 자리에서 볼 수 있는 게 많았던 것 같다.”

박래군 : “그래서 대체 복무제를 도입하면 교도소 업무가 마비될 거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현민 : “교도소 안에서 여호와의 증인 사람들이 성실하고 착하다는 평가가 있어서 직원들이 잘 챙겨주더라. 종교집회도 갈 수 있고 성당에 가면 큰 소리로 노래도 부를 수 있고 좋았다.”

박래군 : “영등포교도소에는 인쇄‧제본 공장이 있지 않나.”
현민 : “노동 강도가 심하지는 않다. 우리 사회가 노동 강도가 워낙 세서.”

박래군 : “방에 들어와서는 개인 시간을 어떻게 썼나.”
현민 : “재미없게 지냈다. 구석에서 책만 봤다.”

박래군 : “나 같은 경우는 강제 징집을 당해서 이런 게 있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군대에 끌려갔다. 경찰서에서 두둘겨 맞고 조사 받다가 지장만 찍으면 군인이 되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나중에 양심적 병역 거부라는 게 있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뻔한 질문이지만 양심적 병역 거부를 생각하게 된 계기 같은 게 있나.”
현민 : “양심적 병역 거부를 해야겠다, 그런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고. 물에 잉크를 떨어뜨리면 서서히 퍼져나가지만 다시는 투명한 물로 되돌릴 수 없는 것처럼 양심적 병역 거부라는 말을 듣고 난 뒤 시간이 흘러도 잊거나 무덤덤해지거나 하는 게 아니라 좀 더 깊숙해지는 느낌이었다. 2004년부터는 내가 감옥을 견딜 수 있을까 없을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박래군 : “병역 거부라는 말을 듣는 순간, 이건 나의 운명이다, 그런 거였나.”
현민 : “그런 건 아니고 자연스럽게 결정된 것 같다. 다들 계기가 뭐였냐고 물어보는데 살아가면서 가치관이 형성되는 과정인 것 같다. 군대에 가거나 감옥에 가거나. 선택이 둘 밖에 없으니까.”

여옥 : “병역거부 운동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엄청난 결심과 결단이 필요했지만 요즘은 오히려 군대 못 가겠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이런 문의가 많이 들어온다. 병역 거부가 더 이상 생소한 개념이 아닌 거다. 논술 시험에도 나오고 다들 들어는 봤을 테니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군대를 못 가겠다면 걱정이 되고 그래서 우리를 찾아오고 하는 경우가 많다.”
현민 : “짧은 시간에 임팩트 있게 설명하기가 힘들다. 내가 왜 군대를 안 갔는지 신념을 증명해야 하기 때문에. 그러면 사람들은 자기 마음에 드는 대답을 들을 때까지 질문을 한다. 너는 다른 존재다, 그런 걸 확인하려고 질문을 하는 것 같다. 사실 나는 너는 군대를 왜 가는데? 그렇게 물어보고 싶기도 하다.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게 나는 오히려 더 어색하니까.”

박래군 : “사회생활에 아직 적응이 잘 안 되겠다.”
현민 : “비슷하게 출소한 친구가 있는데 아직 바지 주머니에 손 넣는 게 어색하다고 하더라.”

박래군 : “감옥 경험한 사람만 아는 이야기다. 죄수복은 원래 주머니가 없으니까. 당신이 쓴 소견서를 읽었다. 신념이 강하거나 의식이 투철하거나 그런 게 아니라 나 같이 평범한 사람도 병역 거부를 할 수 있는 거 아니냐, 그런 내용이었는데. 사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선입견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병역 거부는 거창한 신념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현민 : “군대에 갈까 말까 그런 고민은 일찍 지나갔고 내가 감옥에 갈 수 있을까가 중요한 문제였다. 나는 선배들 모델도 참고할 수 있었고 이제는 병역 거부 운동도 10년쯤 지났고 지금은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편하게 개인에 초점을 맞춰서 풀어낼 수 있었던 거 같다.”

박래군 : “징역 살면서 힘들었던 기억은 없나.”
현민 : “같은 방에 20대를 송두리째 감옥에서 보낸 사람들도 있었다. 잘 설명할 수는 없지만 사람들과 지내는 게 힘들더라. 1년쯤 살아보니까 뭐가 힘들었는지 알겠더라. 한 가지만 간단히 이야기하면 형광등이 24시간 계속 켜 있으니까, 겨울에 형광등을 못 견디겠더라. 빛이나 어둠 이야기할 때 시각적으로 이야기하잖아. 그런데 그게 촉각, 찌르는 느낌이더라. 백열등은 누그러진 느낌인데 형광등은 촉각으로 느껴지더라. 감옥 바깥에서 생활할 때는 잠을 자다가 깨어나면 나른하고 몽롱하고 잠과 깸의 경계에 있는 시간이 있는데, 사람이 낮에 활동하거나 사람들 만나면 의식하고 긴장하고 그러잖아. 잘 때는 그런 게 없이 자는 거잖아. 아, 여기가 집이구나, 그런 느낌이 있잖아. 그런데 감옥은 그런 나른한 시간이 없는 공간이다. 항상 불이 켜 있고 잠에서 깰 때도 번뜩 깨게 된다. 의식이 깨어있지 않을 때조차 누그러지고 풀어지고 자유로운 그런 시간이 없다. 눈을 뜨자마자 몽롱할 틈도 없이 그곳의 질서가 바로 들어오는 건데 그런 게 정말 힘들더라.”

박래군 : “출소하고 나니 불 끄고 자는 게 어색하지 않던가.”
현민 : “어쩐지 외롭더라. 그래서 베개를 끌어안고 잔다.”

박래군 : “나도 작년에 몇 달 들어가 있었는데 나오니까 불이 꺼져있는 게 너무 어색하더라. 이부자리 펴고 자는 것도 적응이 잘 안 되더라.”
현민 : “아직도 적응 중이다. 오늘이 제일 멀리 나온 거야(이 인터뷰는 출소 뒤 2개월이 지난 8월 말에 진행됐다). 사람 많은 공간 가는 것도 힘들고 버스 지하철 타는 것도 힘들더라. 어제는 교보문고에 갔더니 너무 이상하더라. 내가 허깨비가 된 것 같은 느낌이더라. 되게 이상하더라. 책을 골라서 계산대에 서 있는데. 뭔가 세상이 빠르게 돌아가고 사람들은 다들 분주히 뭔가 하는데 내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느낌, 이방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 화가 나고 심술도 나고. 이 사회에 속해 있지 못한 그런 느낌이었다. 심지어는 사람들이 아이스커피를 들고 다니는데 그걸 툭 쳐서 떨어뜨리고 싶은 생각도 들더라. 내가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사람이란 걸 증명하고 싶은데 그걸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까. 아, 이런 게 묻지마 범죄와 비슷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박래군 : “마음 고생이 많았던 것 같다. 큰 대가를 치른 셈인데 군대에 안 간 걸 후회하지는 않나.”
현민 : “안 가봐서 모르겠지만 감옥보다 군대가 육체적으로 더 힘들 거라고 생각한다. 다만 군대는 통과의례잖아. 사회에 진입하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관문이니까. 미흡할지언정 사회적으로 의미 부여는 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감옥에 갔다 온 건 군대와 다른 의미에서 사회의 바깥으로 격리된 거고, 앞으로도 사회의 경계에서 긴장 관계가 유지되는 그런 상황인 것 같다.”

박래군 : “앞으로 겪게 될 불이익이 걱정되지는 않나.”
현민 : “없지는 않겠지. 그래도 마음이 편해졌다는 말을 하고 싶은데 조심스럽다. 공부를 더 하고 싶고 글을 쓰고 싶다. 뭔가 많은 걸 배운 것 같다.”

여옥 : “현민씨는 그래도 많이 배운 사람이니까 말이나 글로 자신의 생각을 설명할 수 있는데 최근 찾아오는 사람들은 설명을 못해 답답해 하는 사람도 많다. 대체 복무제가 도입되더라도 그 사람들은 대체 복무 판정을 받기 어려울 수도 있다. 이 정도는 병역 거부 아니야, 그냥 가기 싫은 거야, 이 정도면 대체 복무 시켜줄게, 그런 경계를 둘러싼 싸움도 있을 수 있을 것 같다.”

박래군 : “부모님과 관계는 어땠나. 걱정 많이 하셨을 텐데.”
현민 : “아버지는 안 계시고 어머니가 마음 고생을 많이 하셨다.”
여옥 : “아버지들과 갈등이 많은 것 같고 보통은 어머니들이 우리에게 연락을 많이 하시더라. 아들이 힘들까봐 걱정을 많이 하신다. 바깥에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람들 시선을 견뎌내는 것도 힘들고 병역 거부를 생각하는 사람들도 그것 때문에 주저하는 경우가 많다. 어떻게 보면 이기적이고 무책임하다고도 할 수 있다. 나는 내가 원해서 감옥에 가는 건데, 어머니 입장에서는 나는 뭔 죄냐, 내 아들이 왜 감옥에 가야 되느냐, 내가 왜 이런 일을 겪어야 되는 거냐고 한탄하는 경우도 많다.”

박래군 : “어떤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수 있는 문제들을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고통 받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병역 거부자들이 느끼는 그런 감각이 있을 텐데 그런 사람들의 고민을 우리 사회가 어떻게 끌어안고 포용하느냐가 중요한 것 같다.”

현민씨는 법원에 제출한 병역 거부 소견서에서 “내게 있어서 병역거부는 사회적으로 주어진 선택 바깥의 선택이란 점에서 가장 자유로운 선택이고 가장 주체적인 선택일지 모르지만, 그것이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치명적인 상처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현민씨는 “가장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내가 실제로 그런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는 사람이 되어버린다는 것도 고통스러웠다”고 덧붙였다.

“”한국사회에서 군대에 간다고 하면 아무도 ‘왜’라고 질문하지 않는다. 총을 들고 군사훈련을 받는 게 예삿일은 아닐텐데. 반면 군대에 안 간다고 하면 해명할 게 너무 많다. 이상하다. 질문에 일일이 답변하고 틀리지 않으려고 애쓰기에 앞서, 상황의 비대칭성을 문제삼고 싶다. 병역거부’운동’의 역사가 십년을 바라보는데, 이제 그래도 될 것 같다. 병역거부와 병역기피 사이의 경계를 슬며시 이동시키고 싶다. 나 같은 사람도 하는 마당에, 뻔뻔한 병역거부자가 조금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나는 병역거부를 하기 위해 자신을 완전무결한 도덕적 주체로 포장하고 싶지 않다. 대의에 기대고 싶지도 않다. 샅샅이 뒤지면, 병역거부에 필요한 이력이 없진 않다. 학생회 활동을 했고, 집회에 자주 나갔다. 화성 매향리, 평택 대추리도 갔었다. 전경한테 맞기도 했다. 월드컵 땐 시큰둥했다. 행렬 앞에서 확신을 찬 목소리로 구호를 외친 적도 있다. 병역관련 시험에 응시한 적이 없다. 엮으면 끼워 맞출 수 있다. 하지만 그런 활동은 단일한 목표의식 하에 행해진 일이 아니었다.”

“동시에 남의 말을 섣불리 가져다 써 후회되는 순간도 있다. 연대라고 했지만 나중에 보니 연민인 적도 있다. 당시에는 강렬했지만 흔적조차 남지 않은 기억, 관계, 사람도 많다. 부족함을 고해성사하는 게 아니다. 내겐 진정성과 속물성, 소심함과 뻔뻔함, ‘귀여움(?)’과 ‘섹시함(?)’이 공존한다. 어떤 사람의 눈에는 병역거부자의 모순처럼 보이겠지만, 실은 모든 삶은 이질성으로 그득하기 마련이다. 내게 완결된 서사는 불가능하며 매력이 없다. 완결된 서사의 이면, 즉 내밀한 일상의 파편은 정치적 올바름을 훼손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정치를 다르게 사고할 수 있는 자원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병역거부를 하면서 내 몸에 얽혀있는 감정을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찌질함조차 자학하지 않고 긍정하는 병역거부운동을 하고 싶다. 운동을 바다에 떠있는 배에 빗대보자. 목적지에 도달하려고 파도를 가르는 쾌속선보다, 정해진 항로도 종착지도 없이, 그때그때 해풍과 물결에 따라 항해하는 범선이 되고 싶다. 대신 외부적 계기에 아주 민감한 돛을 달고 싶다. 나는 개개의 마주침 또한 운동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병역거부는 그렇게 맞닥뜨린 계기이다. 다행히 항해에 참고할만한 별자리가 없진 않다.”

“나는 사회운동에 관심이 많다. 하지만 많은 대학생과 지식인이 그러하듯이, 필요에 따라 소위 민중과 자신을 동일시하거나 적당히 거리를 조절할 수 있었다. 물론 이때도 나름의 진정성과 공감의 시간이 없진 않았다. 하지만 병역거부는 내게 지금까지의 행동과는 달리 실제 그러한 삶의 진입이 어떤 체험인지를 예감하게끔 했다. 아무리 따져봐도 병역거부에는 이득이 없다. 손실은 오래 지속된다. 생의 좌표가 한번 기우뚱할 뿐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강력한 선택이자, 주체적 떠맡음일 수 있다. 가치척도가 뒤바뀌기 때문이다. 전과 같은 눈과 귀를 가질 수 없다. 내가 병역거부를 두고서,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이 병역거부 소견서에는 드라마 같은 인생역정이 없다. 정치적 대의의 담지자도 없다. 소견서 어디를 뒤져봐도 신념을 전달하려고 결연한 눈빛을 보내는 젊은이는 없다. 겁 많고 소심한 젊은이가 웅크리고 앉아 눈치를 보고 있을 따름이다. 병역거부는 내가 처한 상황을 여과 없이 노출시켰다. 나는 권력의 피해자로 자신을 인식하기 힘들었다. 왜냐하면 난 저항자의 포즈는 곧잘 취했지만, 정작 피해자로서 자의식은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나의 고통과 슬픔을 권력과 결부시키기 위해 정말이지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했다.”

“아마도 병역거부는 내가 지닌 안전한 위치와 거리조절 능력, 그 밖의 자원을 상당히 박탈할 것이다. 그리고 이때 생긴 상처는 쉽게 지울 수 없으면서 오랜 세월 감당해야할 것으로 남을지도 모르겠다. 다른 병역거부자들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즉 병역거부는 몰락의 순간이다. 하지만 나는 몰락을 기꺼이 선택함으로써, 내게 부착된 권력을 백일하에 드러내고자 한다. 그것이 찰나에 불과할 지라도. 나는 이를 통해 개별적인 삶에서 벗어나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나의 삶을 다른 이들과 포갤 수 있는 위치에 이르고 싶다. 물론 그것을 낭만적으로 생각해서는 금물이다. 유쾌한 경험이 될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삶은 운명일 수 있다. 나는 이제 병역거부자라고 불리는 전혀 새로운 삶으로 이주한다.” (그린비 출판, ‘부커진R3호 : 맑스를 읽자’에 실린 현민의 ‘병역 거부 소견서’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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