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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티지 키보드의 세계.

기계식 키보드를 사들이기 시작한 게 1년여 전의 일이다. 하루 종일 키보드를 두둘기는 게 직업이라 키보드에 투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던 건데 막상 하이엔드 키보드의 세계를 들여다 보니 이건 뭐 돈 먹는 블랙홀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사들인 키보드가 거의 50여대, 다시 팔아치운 것도 많지만 지금 남아있는 것만 해도 20여대가 넘는다.

제일 처음 샀던 키보드는 일본 야후 옥션에서 들여온 토프레 해피해킹 프로 2였다. 마침 국내 수입 업체에 단종됐던 제품이었는데 엔화 환율이 한창 뛰던 무렵이라 25만원이던 제품이 38만원까지 치솟았다. 이 키보드는 워낙 뽐뿌가 강렬해서 한번 보면 사지 않을 수가 없다. 구매대행 업체를 통해 신품 같은 중고를 23만원에 들여올 수 있었는데 그게 시작이었다.

그때부터 지난 1년 동안 중고 키보드를 그야말로 미친 듯이 사들였다. 웬만한 빈티지 키보드는 만져 보지 않은 게 없을 정도고 키보드 메이커의 역사와 계보를 줄줄 외울 정도가 됐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다가 타이핑하는 장면이 나오면 키보드에 먼저 눈길이 간다. 편의점에서 물건을 살 때도 계산대의 키보드를 힐끔힐끔 쳐다보게 된다.

38만원짜리 키보드를 질렀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하는 눈빛으로 쳐다본다. 38만원이면 웬만한 노트북 절반 가격이고 조금 더 보태면 요즘 유행하는 넷북을 한 대 살 수 있는 가격이다. “얼마, 3만원? 5만원?” 하는 주변 동료들에게는 “응, 그냥 좀 비싼 키보드야”라고만 했다.

사람들은 흔히 키보드를 컴퓨터 사면 따라오는 주변기기 정도로 생각한다. 실제로 38만원짜리 키보드나 8천원짜리 키보드나 얼핏 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보통은 101개나 103개의 글쇠가 있고 숫자 자판이 따로 없는 스페이스 세이버 형태라면 86개나 87개가 된다. 그래봐야 자판을 눌러서 글자를 입력하는 건 어느 키보드나 모두 같다.

그렇지만 좋은 키보드는 확실히 만져보면 다르다. 내가 좋아하는 알프스 청축 키보드는 스트로크가 가벼워서 손가락에 힘이 거의 들어가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타이핑을 할 때 찰칵찰칵하고 기분 좋은 클릭 소리가 리듬감을 살려준다. 체리 청축이 신경질적인 금속성 소음을 낸다면 알프스 청축은 좀 더 부드러우면서도 상쾌한 느낌을 준다.

가장 애착이 남는 키보드는 IBM의 버클링 키보드, 모델M-1391401이다. 1984년에 출시된 이 키보드는 아직까지도 이만한 키보드가 없다는 최고의 찬사를 받고 있다. 철컹철컹, 언뜻 타자기 소리를 연상할 정도로 시끄럽지만 확실하게 글쇠를 눌렀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빈티지 키보드를 선호하는 사람들에게는 필수 구비 아이템이다.

사실 지금 우리가 쓰는 대부분의 키보드는 이 모델M의 후예들이면서 싸구려 짝퉁이다. 20년이 지나도록 고장이 나지 않으며 집어 던져도 부서지지 않는 탄탄한 케이스, 커피를 엎질러도 닦아내기만 하면 아무 문제가 없는 놀라운 내구성, 무게도 보통 키보드의 서너 배에 이른다. 바닥이 철판으로 돼 있어 총알도 막아낸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

미국 이베이에서는 아직도 모델M이 꽤나 비싼 가격에 거래된다. 1990년대 제품보다 1980년대 후반 제품을 더 높이 쳐주는데 중고는 5만원 수준, 어쩌다 가끔 나오는 포장도 안 뜯은 신품은 10만원을 훌쩍 넘어서고 입찰 마감시간이 되면 주문이 폭주하면서 가격이 치솟기도 한다.

지난 20년을 돌아보면 컴퓨터의 연산속도와 저장용량은 눈부신 속도로 진화했지만 키보드는 오히려 형편없이 퇴보했다. 여러 차례 컴퓨터 세대 교체를 거치면서 초창기의 기계식 키보드들은 사라졌고 요즘은 100만원도 넘는 최고 사양 컴퓨터를 쓰면서 키보드는 8천원짜리 중국산 멤브레인 키보드에 만족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모델M의 향수는 수많은 기계식 키보드의 계보로 이어진다. 기계식 키보드는 클릭과 넌클릭, 리니어 방식으로 나뉘는데 스위치의 색깔에 따라 청축, 갈축, 흑축으로 부르기도 한다. 클릭은 모델M처럼 딸깍딸깍, 스위치의 단락이 그대로 느껴지는 방식이고 리니어는 바닥까지 아무런 걸림 없이 쑥 들어가는 방식이다. 넌클릭은 그 중간 정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나는 지금 모델M-1391401으로 이 글을 적고 있다. 가볍고 저렴한 멤브레인 키보드가 쏟아져 나오면서 시끄럽고 낡은 이 버클링 방식 키보드들은 대부분 고물상으로 팔려가거나 그냥 폐기처분됐다. 이 키보드는 지금 20년의 세월을 건너 뛰어 지금 여기에 와 있다. 묵중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한 글자 한 글자 강한 울림을 만들어 낸다.

철컹철컹 금속성 굉음이 신경이 거슬릴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경쾌하고 청량한 느낌을 준다. 글자를 입력하고 있다는 명확한 구분감과 강한 탄력. 생각하는 대로 곧바로 손가락이 반응하는 느낌이랄까. 그때는 잘 몰랐지만 20년이 다 돼 가는 지금 와서 다시 봐도 훌륭한 키보드다. 지금은 왜 이런 키보드를 못 만드는 것일까.

최고의 키보드를 꼽으라면 단연 알프스 청축, 리딩엣지 DC-2014다. 중고 장터에서는 20만원 정도에 팔리는데 매물이 거의 없다. 모델M이 스트로크 깊이가 얕고 무거워서 답답하다는 느낌이 든다면 알프스 청축은 입력과 동시에 시원시원하게 바닥을 탁 때리고 나온다. 각각 장단점이 있겠지만 알프스 청축이 훨씬 고급스러운 느낌을 주는 것은 분명하다.

안타깝게도 알프스 키보드는 완전히 단종이 됐다. 알프스 스위치는 마모도 잘 된다. 간혹 이베이 같은데서 20년도 더 된 키보드가 매물로 나오곤 하지만 스위치 상태가 좋은 걸 찾기는 쉽지 않다. 최고의 키보드지만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그나마 타이핑을 할 때마다 수명이 줄어들기 때문에 그래서 더욱 매력적인 키보드가 아닐까.

최근에 발견한 빈티지 명품 키보드는 노스게이트 옴니키 키보드다. 롤스로이스 오브 키보드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이쪽 바닥에서는 알아주는 전설의 키보드인데 한번 손에 익으면 다른 키보드는 만질 수가 없을 정도다. 이처럼 구분감이 명확하고 단정한 느낌의 키보드를 나는 쳐본 적이 없다.

얼마 전에는 묶음배송을 할 생각으로 옴니키 키보드를 나오는 대로 사들여서 한꺼번에 배송을 시키려고 보니까, 통관 규정이 바뀌어서 키보드는 1대씩 밖에 들여올 수가 없다고 한다. 덕분에 19.99달러짜리 키보드를 배송료와 대행료 포함, 10만2328원에 들여오게 됐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셈이지만 그래도 국내 중고 시세와 비교하면 싼 편이라고 위안을 삼았다.

시세 보다 싼 가격에 낙찰을 받은 적도 많지만 중고 물품이 다 그렇듯이 받아놓고 보니 전혀 엉뚱한 물건이라 낭패를 봤던 적도 많다. 델에서 나온 알프스 흑축 키보드는 가격 대비 성능이 나쁘지 않은 키보드로 알려져 있다. 이 키보드가 7.95달러에 10대 나왔길래 냉큼 질렀는데 다른 키보드 2대와 함께 국제 배송료가 104달러. 역시 배보다 배꼽이 큰 경우였다.

델 키보드는 생각보다 먼지도 많지 않고 상태도 좋지 않아 결국 국내 중고 장터에 1만8천원씩에 내다 팔았다. 겨우 본전치기 정도 한 셈이다. 같이 들여온 알프스 백축 NTC 키보드는 29.95달러짜리를 2만원에 팔았으니 배송비를 감안하면 손해가 꽤나 컸다. 그동안 비드바이에서 사들인 키보드의 성공 확률을 따지면 50% 정도나 될까.

이베이에서 키보드를 파는 셀러가 몇 사람 있는데 그 가운데 ‘ncbound’라는 셀러는 웬만하면 피하는 게 좋다. 사진은 그럴 듯한데 그야말로 사진 발인 경우가 많고 막상 받아서 보면 전혀 다른 제품이 오는 경우도 많다. 가격 역시 결코 싸지 않아서 국내 키보드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악명이 높다.

올드 델이라고 불리는 초기 델 키보드는 200달러가 넘는 경우도 있다. 흔히 오징어라는 별명으로 부르는 어고노믹 키보드 MX-5000 역시 500달러에 육박한다. 알프스 청축 키보드도 찾기 어렵지만 알프스 핑크축은 상태만 좋다면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일 정도다. 그래도 NIB(New in Box)라는 단어를 볼 때마다 가슴이 설렌다.

그동안 사들인 키보드 가운데 가장 비싼 키보드는 키보드 동호회에서 공동 제작한 커스텀 체리 키보드. 부품 값을 포함, 60만원 가까이 들었던 것 같다. 이런 저런 키보드를 사들이면서 그에 비례해서 통장 잔고는 줄어들었지만 업무 만족도는 그 이상으로 높아졌다. 그래서 요즘도 틈만 나면 이베이를 뒤적거리게 된다.

자식에게 물려줄 키보드를 꼽으라면 앞서 말한 리딩엣지와 노스게이트 옴니키, 모델 M, 그리고 언젠가 알프스 커스텀을 직접 만들어 보고 싶은 생각도 있다. 키보드를 20대 가까이 쌓아두고도 늘 새로운 키보드를 찾아 헤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좋은 키보드는 좋은 글을 쓰게 만든다. 글 쓰는 일을 즐겁게 만든다.

키보드는 아마도 우리가 하루 종일 가장 많이 만지는 물건일 것이다. 단순히 글자를 입력하는 것을 넘어 키보드는 사람과 기계,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잇는 매개라고 할 수 있다. 더 좋은 키보드에 대한 욕망은 소통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한다. 최고의 키보드는 자판 위를 구르는 손가락이 머릿속의 생각을 따라잡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솟아나게 만드는 그런 키보드다.

물론 300만원짜리 몽블랑 만년필로 쓴다고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키보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장수가 좋은 칼을 욕심내고 화가가 좋은 붓을 욕심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당신이 하루 종일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사는 사람이라면 더 좋은 키보드를 고집하는 것은 결코 사치라고 할 수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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