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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 요금과 은행 구조 조정.

딱히 바쁜 건 아닌데 정말 은행 한번 갈 시간도 없었다.

그런데 어제, 퇴근 하고 보니 문 앞에 오늘까지 전기 요금을 안내면 전기를 끊겠다는 살벌한 딱지가 붙어 있었다. 몇일 전에 가스 요금 고지서도 비슷한 딱지가 붙어 날아왔다. 그래서 오늘은 큰 맘 먹고 은행에 갔다. 자동이체를 시키면 편하기야 하겠지만 오래 살 집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니 별로 내키지 않았다.

그런데 왠걸, 요즘 은행에서는 공과금을 안받는다고 한다. 현금 인출기 옆에 공과금을 받는 기계가 있는데 이건 또 자기네 은행 통장이나 카드 밖에 안된다. 꽤나 성가신 일이다. 공과금 한번 내려면 거래하는 은행 지점까지 직접 찾아가야 한다는 이야기다.

나 같은 경우 월급이 들어오는 통장은 조흥은행, 이런 저런 아르바이트 수당이 들어오는 통장은 외환은행이다. 결국 한참을 묻고 헤매고 걸어서 외환은행까지 갔다. 전기와 가스 요금 한번 내는데 그렇게 결국 한시간 반이 훌쩍 흘러갔다.

IMF 이후 여러 은행이 문을 닫거나 합병 됐고 몸집을 키운 은행들은 앞다투어 구조조정과 비용 절감에 나섰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직장을 잃거나 비정규직으로 밀려났다. 이제는 돈 안되는 고객들도 찬밥 신세다. 심지어 이자를 주기는커녕 계좌 유지 수수료를 물리는 데도 있다. 살아남기 위해서 은행들은 직원들의 목을 조르고 고객들의 주머니를 턴다.

이제는 숫제 돈 안되는 공과금 수납 따위는 안해도 좋다는 태도다. 다른 은행으로 가든가 말든가. 그깟 수수료 안받고 사람 하나 자르는게 훨씬 남는다는 계산이 섰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은행 비정규직 노동자들 이야기는 더욱 마음이 아팠다. 우연히 이야기를 듣고 취재와 인터뷰까지 다 했는데 기사는 쓰지 못했다. 딱히 새로운 사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은행 계약직 노동자 126명은 지난 3월 31일 더이상 계약을 연장하지 않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들은 2002년 4월부터 3개월 단위로 계약을 연장해 왔다. 근무 2년을 하루 앞두고 해고를 당한 셈이다. 모두 기혼 여성이었다. 석달째 농성을 계속하고 있지만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들은 지난 2년 동안 공과금 수납 업무를 맡아왔다. 오늘 내가 봤던 공과금 수납 기계가 석달 전 이들의 일자리를 빼앗은 셈이다. 이들의 월 급여는 100여만원에 지나지 않았다. 함께 해고된 노동자들 가운데 몇명은 피크 타이머라는 이름으로 다시 취업됐다. 이들은 업무가 몰리는 월말 무렵에만 출근하면서 한달에 42만원 정도를 받는다고 한다. 이 은행 정규직 노동자들의 평균 연봉은 4800만원, 월 급여로 치면 400만원 꼴이다.

창구에 앉아 있는 직원을 텔러라고 하는데 하나은행의 경우 이미 50% 이상, 국민은행은 100%가 비정규직으로 대체됐다. 우리은행도 전체 직원 1만4039명 가운데 3764명이 비정규직이다. 흔히 알려진 것처럼 정규직 노동자를 해고하고 비정규직으로 다시 채용하는 경우도 많다. 이런 어이 없는 일들이 은행에서는 숱하게 벌어진다.

은행에서 내세우는 변명은 확고하다. 텔러는 단순 업무고 정규직은 좀더 고도의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 업무를 맡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은행에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영역이 확실하게 구분돼 있다. 북새통 같은 창구에 앉은 직원은 거의 모두 비정규직, 뒷쪽의 넓고 한가한 책상에 앉은 직원들은 정규직. 그 영역을 넘으면 급여가 서너배로 뛴다. 당연히 비정규직은 승진도 성과급도 없다. 여차해서 잘리지나 않으면 다행인 상황이다.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직원들을 잘라낸 우리은행은 지난해 1조3355억원의 순이익을 냈다. 지난 2002년 7799억원에서 70% 이상 늘어난 셈이다. 우리은행만큼은 못하지만 국민은행과 하나은행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더 많은 직원을 잘라낸 은행이 더 많은 이익을 내고 그래야 살아남는다. 이런 성장의 한계는 결국 분명하겠지만 도대체 멈출 방법이 없다는게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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