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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견문록.

Written by leejeonghwan

November 6, 2009

야간열차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비좁았다. 쿠셋은 우리나라에는 없는 좌석 형태인데 한 칸에 여섯 좌석이 세 자리씩 마주보도록 돼 있다. 저녁이 되면 선반을 끌어내려 3층 침대를 만든다. 그나마 가운데 침대가 낫고 그 다음이 맨 아래, 그리고 맨 윗 자리가 가장 불편하다고 했다. 내 침대는 맨 위 자리였다. 3층은 오르내리기도 불편하고 떨어질 위험도 있다는데 예약이 다 차서 다른 자리가 없었다.

같은 칸의 이탈리아인 부부가 어마어마하게 큰 가방을 끌고 나타나서 가뜩이나 비좁은 통로를 막아 버리는 바람에 아래 침대에서 잔 사람들은 관 속에 누워있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새벽 2시쯤 마약단속이라도 하는 듯 경찰이 경찰견을 끌고 한번 다녀갔고 도착 1시간을 앞두고 승무원이 여권과 기차표를 돌려주면서 따뜻한 커피와 빵을 주고 갔다. 천정까지 높이가 낮은 탓에 허리를 펴고 앉을 수가 없어서 엎드린 채 먹느라 목이 멨다.

스위스는 안타깝게도 사흘밖에 머무를 여유가 없었는데 루체른에 도착하자 숨통이 확 트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길거리의 분수대에서 꼬마애가 손으로 물을 떠서 마시는 걸 보고 깜짝 놀라기도 했다. 횡단보도 앞에 서 있으면 지나던 차들이 멈춰 섰다. 지도를 펴들고 있으면 지나던 사람들이 도와줄 것 없느냐고 말을 걸어왔다. 고개를 돌리면 깎아지른 듯한 산봉우리의 만년설이 올려다 보였지만 바람은 맑고 부드러웠다.

파리에서 에펠탑 찍고 개선문 찍고 루브르 박물관 찍고 관광명소를 정신없이 돌아다녔던 것과 비교하면 스위스에서는 그냥 발길 닿는대로 걸어다니는 것 말고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그나마도 5시가 좀 넘으니 상점들도 다들 문을 닫아 버렸다. 유레일패스가 있으면 유람선을 공짜로 탈 수 있는데 마침 가을 정비 기간이라 운항을 하지 않았다. 시간 여유가 있었으면 리기산이나 필라투스산에도 올랐을 텐데 이래저래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루체른에 가면 빈사의 사자상을 꼭 봐야 한다고 해서 물어물어 찾아갔다. 지금이야 1인당 국민소득 3만4천달러의 잘 사는 나라지만 스위스는 용병을 수출하던 가난한 나라였다. 1792년 프랑스 혁명 때 루이 14세의 궁전을 마지막까지 지켰던 군인들이 바로 스위스 용병들이었다. 빈사의 사자상은 그때 전사한 786명의 스위스 용병을 기리기 위한 것인데 마크 트웨인은 이를 두고 “세계에서 가장 슬프고도 감동적인 조각”이라고 감탄한 바 있다.

거친 산악지형에 단련된 스위스 용병은 유럽 사람들에게 공포의 상징이었다. 울던 아이도 스위스 용병 이야기를 들으면 울음을 그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 전통이 이어져 로마 교황청을 지키는 근위병들은 아직도 스위스 젊은이들 가운데서 뽑는다고 한다. 그만큼 스위스 용병에 대한 신뢰가 확고하다는 이야기다. 참고로 교황청 근위병들은 아직까지도 15세기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디자인한 제복을 입는다.

루체른에서는 그나마 퐁듀 요리를 실컷 먹었던 게 위안이 된다. 가격도 꽤나 비쌌고 생각보다 짜고 느끼했는데 민속 공연을 같이 하는 곳이라 할 일 없는 저녁시간을 여유롭게 보낼 수 있었다. 나름 유명한 집이었던 듯 온갖 나라에서 온 여행자들이 가득 들어찼다. 나중에 요들송 경연대회가 열렸는데 옆 테이블 사람들이 부추기는 바람에 무대에까지 서게 됐다. 잘 불렀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장 큰 박수를 받았던 듯. 상으로 맥주도 한 잔 받아마셨다.

다음날 인터라켄에서는 카지노 구경을 하고 오후에는 자전거를 탔다. 융프라우로 오르는 베이스캠프가 되는 인터라켄은 호수 사이에 있는 작은 시골 마을이다. 인터라켄을 영어로 하면 Between the lakes. 동네 양쪽의 동역과 서역 사이는 걸어서 20분 정도 밖에 안 걸린다. 자전거로 호수 주변을 몇 바퀴 돌았는데 만약 다음에 스위스를 또 가게 된다면 자전거 일주에 도전해 보는 것도 좋을 듯.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들 융프라우요흐를 많이 가는데 해발 3500미터를 기차로 순식간에 오른다는 흥분은 있지만 어두컴컴한 터널을 한참 지나야 하는데다 막상 올라가도 볼 것이 그리 많지 않다. 기차를 3번 갈아타게 되는데 중간 중간 내려서 그린덴발트나 라우텐부르넨 같은 동네를 둘러보는 것도 좋다. 융프라우요흐를 한 번 오르는데 15만원 정도 드는데 가격은 절반 정도지만 쉴트호른이나 클라인마테호른이 전망이 더 좋다고 한다.

시간 여유가 있다면 기차로 휙 다녀오기 보다는 산길을 따라 트래킹을 하는 것도 좋을 듯. 좁은 나라에 하이킹 도로가 6만km가 넘는다는데 처음 찾는 사람도 길을 잃지 않도록 안내 표지가 잘 돼 있다. 3, 4월쯤에 오면 가벼운 차림으로 도시락을 싸들고 나와 거울 같은 호수를 내려다 보면서 하루 종일 산길을 걸어도 좋지 않을까. 늦은 봄이면 천둥소리와 함께 빙하가 녹아내리는 광경도 볼만하다고 한다.

유스호스텔에서 만난 한 남자애는 스카이다이빙을 할 계획이라고 했다. 3000미터 상공 비행기에서 낙하산을 매고 뛰어내리는데 380프랑, 동영상을 찍어 DVD에 담아주는데 추가로 160프랑. 뛰어내리면서 기절을 하는 경우도 있다는데 함께 뛰어내린 조교가 다가와서 깨워줄거라고 했다. 인터라켄 유스호스텔은 스키나 스노우보드는 물론이고 번지점프나 패러글라이딩, 캐녀닝 등을 하러 몰려든 사람들로 북적였다.

스위스에서는 열차만 타도 즐겁다. 산을 깎아내지 않고 산 속에 녹아든 듯 조화를 이룬 철로가 감탄을 자아낸다. 구불구불 산모퉁이를 감아 올라가면서 양쪽에 번갈아 가며 달력 사진 같은 전경이 펼쳐지는데 루체른-인터라켄 구간보다 훨씬 더 멋진 구간도 많다고 한다. 글레시어 익스프레스의 종점에 있는 생모리츠 유스호스텔은 저녁식사가 무료인데 풍성한 만찬 수준이라 세계 여러 나라에서 몰려온 젊은이들로 밤마다 축제 분위기라고 한다.

융프라우요흐에서 내려오니 오후 3시쯤이었는데 점심시간이 지나서 레스토랑은 다들 문을 닫고 밥 먹을 곳이 마땅치 않았다. 그나마 인터라켄에서는 좀 크다 싶은 호텔이 있어서 레스토랑에 들어갔더니 주인과 친구들이 모여서 맥주를 마시고 있다. 아직 점심을 못 먹었는데 뭐 좀 먹을 수 있냐고 그랬더니 간단한 거라면 가능하다고 해서 연어 샐러드에 와인을 시켜 홀짝 홀짝 마셨다. 이곳에 다시 올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참고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행, 에코 투어리즘. (스위스 에코 투어리즘 & 디자인)
참고 : 자전거와 하이킹으로 변화하는 친환경 여행! 스위스 모빌리티. (스위스 에코 투어리즘 & 디자인)

(아래 사진 출처는 스위스 관광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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