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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키보드에 열광하는가.

Written by leejeonghwan

March 5, 2009

“키보드가 다 똑같지 뭐.”
38만원짜리 키보드를 질렀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하는 눈빛으로 쳐다본다. 38만원이면 웬만한 노트북 절반 가격이고 조금 더 보태면 요즘 유행하는 넷북을 한 대 살 수 있는 가격이다. “얼마, 3만원? 5만원?” 하는 어머니에게는 “응, 그냥 좀 비싼 키보드에요”라고만 했다. 어머니께서 이 글을 읽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사람들은 흔히 키보드를 컴퓨터 사면 따라오는 주변기기 정도로 생각한다. 실제로 38만원짜리 키보드나 8천원짜리 키보드나 얼핏 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보통은 101개나 103개의 글쇠가 있고 숫자 자판이 따로 없는 스페이스 세이버 형태라면 86개나 87개가 된다. 그래봐야 자판을 눌러서 글자를 입력하는 건 어느 키보드나 모두 같다.

지름신을 불러들이는 걸로 유명한 이른바 명품 키보드는 토프레 리얼포스와 PFU 해피해킹이 있다. 둘 다 일본 제품인데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꿈의 키보드’로 불린다. 10분만 쳐 보면 나도 모르게 지갑을 열게 된다고 말할 정도다. 환율이 좋을 때는 20만원 안쪽에서 구할 수 있었는데 얼마 전까지 29만원과 27만원에 팔리다가 올해 들어 30만원 후반까지 치솟았다.

한번 빠져들면 다른 키보드는 쓸 수 없다.

리얼포스와 해피해킹은 둘 다 무접점 정전용량 방식의 키보드다. 흔히 쓰는 멤브레인 방식의 키보드는 글쇠 아래 고무가 눌려서 얇은 막으로 된 스위치를 누르는데 바닥을 찍어야만 글자가 입력된다. 무접점 정전용량 방식은 전류의 변화를 감지해서 신호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바닥을 찍지 않아도 어느 정도만 눌리면 글자가 입력된다.

리얼포스의 매력은 무엇보다도 글쇠를 누르는 압력이 매우 가볍다는데 있다. 누르는 듯 마는 듯 스치기만 해도 입력이 된다고 할 정도다. 당연히 자판 입력 속도도 훨씬 빨라지게 된다. 게다가 차등 키압 방식이라 검지와 중지, 약지, 새끼손가락에 걸리는 압력이 모두 다르다. 오랜 시간 자판 입력을 하더라도 피곤함이 훨씬 덜 하다는 걸 느낄 수 있다.

해피해킹은 좀 더 특이한 스타일이다. A4용지 3분의 2 정도 크기의 이 키보드는 글쇠가 모두 60개 밖에 안 된다. 숫자 자판은 물론이고 방향키조차도 없어서 처음 쓰는 사람들은 당황하게 된다. 없는 글쇠들은 펑션 글쇠와 다른 글쇠를 함께 눌러야 하는데 일주일 정도 적응 기간을 거치면 오히려 더 편리하다.

리얼포스나 해피해킹이나 한번 써본 사람들이 이 무지막지하게 비싼 키보드에 열광하는 이유는 자판을 두들겨 컴퓨터에 글자를 입력하는 일이 훨씬 더 즐거워지기 때문이다. 리얼포스의 경우 사각사각, 해피해킹의 경우 또각또각, 한참 열중해서 자판을 두들기다 보면 경쾌한 리듬이 마치 음악 소리처럼 들려올 때도 있다.

리얼포스를 써본 사람들은 해피해킹에도 욕심을 내게 된다. 해피해킹은 효율성을 높인 글쇠 배치가 매력이고 리얼포스는 갓난아기 볼살을 건드리는 듯한 부드러움이 매력이다. 어느 쪽이나 그냥 보통 키보드는 만지고 싶지 않게 된다는 게 치명적인 단점이다. 출퇴근할 때마다 키보드를 들고 다니거나 아예 두 대를 사서 집과 회사 양쪽에 놓고 쓰는 수밖에 없다.

콘트롤과 캡스락 글쇠의 위치를 바꾼 것도 해피해킹의 특징인데 한번 적응하면 다른 키보드를 쓸 수 없게 만든다. 사실 캡스락 글쇠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거의 쓸 일이 없는 반면 콘트롤 글쇠는 단축키와 함께 누르려면 왼쪽 손목을 비틀어야 한다. 리얼포스는 딥 스위치를 조정해 필요에 따라 이 둘의 위치를 바꿀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렇게 한번 눈을 뜨게 되면 8천원짜리 멤브레인 키보드 말고도 세상에 수많은 키보드가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러다가 기계식 키보드를 하나둘씩 써보고 나면 그때부터는 정말 매니악한 세계에 빠져든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주의하시라. 세상의 모든 키보드를 한번씩 두들겨 보고 싶은 욕망을 주체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마니아들 가운데 전설로 꼽히는 키보드는 IBM에서 나온 버클링 방식 키보드, “모델M-1391401″이다. 1984년에 출시된 이 키보드는 아직까지도 이만한 키보드가 없다는 최고의 찬사를 받고 있다. 철컹철컹, 언뜻 타자기 소리를 연상할 정도로 시끄럽지만 확실하게 글쇠를 눌렀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기계식 키보드를 선호하는 사람들에게는 필수 구비 아이템이다.

사실 지금 우리가 쓰는 대부분의 키보드는 이 모델M의 후예들이면서 싸구려 짝퉁이다. 20년이 지나도록 고장이 나지 않으며 집어 던져도 부서지지 않는 탄탄한 케이스, 커피를 엎질러도 닦아내기만 하면 아무 문제가 없는 놀라운 내구성, 무게도 보통 키보드의 서너 배에 이른다. 바닥이 철판으로 돼 있어 총알도 막아낸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

20년 된 빈티지 키보드가 여전히 비싸게 팔리는 이유.

미국 이베이에서는 아직도 모델M이 꽤나 비싼 가격에 거래된다. 1990년대 제품보다 1980년대 후반 제품을 더 높이 쳐주는데 중고는 5만원 수준, 어쩌다 가끔 나오는 포장도 안 뜯은 신품은 10만원을 훌쩍 넘어서고 입찰 마감시간이 되면 주문이 폭주하면서 가격이 치솟기도 한다. 8천원짜리 싸구려 키보드에 만족하는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독특한 클릭음이 특징인 모델M의 향수는 수많은 기계식 키보드의 계보로 이어진다. 기계식 키보드는 클릭과 넌클릭, 리니어 방식으로 나뉘는데 스위치의 색깔에 따라 청축, 갈축, 흑축으로 부르기도 한다. 클릭은 모델M처럼 딸깍딸깍, 스위치의 단락이 그대로 느껴지는 방식이고 리니어는 바닥까지 아무런 걸림 없이 쑥 들어가는 방식이다. 넌클릭은 그 중간 정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기계식 키보드의 스위치를 만드는 회사로는 일본의 알프스와 독일의 체리가 유명한데 저가형 멤브레인 키보드가 쏟아져 나오면서 알프스는 키보드 스위치 사업을 접었다. 우리나라 업체로는 세진과 아론이 있는데 세진 역시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지금은 저가형 멤브레인 키보드만 만든다. 지금 나와 있는 기계식 키보드들은 대부분 체리 스위치를 쓴다고 보면 된다.

컴퓨터는 하루가 다르게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는데 키보드 산업은 오히려 후퇴하고 위축되고 있다. 결국 중고라도 찾아서 쓰는 수밖에 없는데 알프스 키보드의 경우 10년 이상 된 빈티지 중고도 꽤나 비싸게 거래된다. 이런 골동품을 그대로 쓰기도 하지만 뜯어서 스위치만 뽑아다가 납땜을 하고 새로운 케이스를 씌워 개조하는 고수들도 있다.

직접 알루미늄이나 아크릴을 깎아 케이스를 만들기도 하고 스위치 아래에 철제 보강판을 덧대거나 키캡을 바꾸는 경우도 있다. 보강판이 있느냐 없느냐 그리고 어떤 보강판을 쓰느냐에 따라 터치감이 전혀 달라지기도 한다. 키캡 역시 실크 프린팅이나 레이저 각인, 이색사출, 염료승화 방식 등 천차만별인데 개인 취향에 따라 선호도가 다를 수 있다.

가벼운 느낌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너무 가볍다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깊게 눌리는 느낌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자판을 힘차게 두들기면서 철컹철컹하는 소리를 즐기는 사람도 있다. 비싼 키보드라고 해서 누구에게나 딱 맞는 건 아니고 오히려 3만원짜리 구형 세진 키보드가 최고의 키보드라는 사람도 있다.

키보드 동호회에 가면 한 달 동안 30개의 키보드를 질렀다는 입문자들도 쉽게 만나 볼 수 있다. 이들은 최적의 터치감을 찾을 때까지 계속해서 키보드를 사고판다. 필코 마제스터치 갈축에서 시작해 흑축으로 갔다가 체리 청축에도 관심을 가졌다가 해피해킹이나 리얼포스에 손을 대고 중고 키보드들을 사 모으는 단계까지 가면 키보드 중독이라고 할 만하다.

다행히 중고 키보드를 사려는 사람들의 수요는 얼마든지 있어서 인기 있는 모델이라면 한두달 쓰다가 내놓아도 10분 만에 수십개의 예약 댓글이 달린다. 예약이 취소되면 연락 달라는 문자 메시지도 쏟아진다. 이미 단종된 모델들은 특히 경쟁이 치열하다. 가뜩이나 지난해부터 환율까지 뛰는 바람에 최근에는 장터에 ‘매복’을 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났다.

키보드는 아마도 우리가 하루 종일 가장 많이 만지는 물건이다. 단순히 글자를 입력하는 것을 넘어 키보드는 사람과 기계,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잇는 매개라고 할 수 있다. 더 좋은 키보드에 대한 욕망은 소통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한다. 최고의 키보드는 자판 위를 구르는 손가락이 머릿속의 생각을 따라잡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솟아나게 만드는 그런 키보드다.

300만원짜리 몽블랑 만년필로 쓴다고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키보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장수가 좋은 칼을 욕심내고 화가가 좋은 붓을 욕심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당신이 하루 종일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사는 사람이라면 더 좋은 키보드를 고집하는 것은 결코 사치라고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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