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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를 보다.

‘사마리아’를 보고 생각했다. 김기덕의 영화에 더이상 의미를 부여하지 말자. 구원이니 화해니 괜한 삽질할 것 없다. 그야말로 꿈보다 해몽이 좋은 꼴이다.

이 영화가 베를린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임권택의 ‘취화선’이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을 때부터 그딴 영화제의 권위와 안목을 인정하지 않기로 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동양적 신비와 철학이 담겨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정말 한심하고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아버지뻘 나이의 남자들에게 몸을 팔아 돈을 모으던 친구가 죽는다. 옆에서 지켜보기만 했던 친구는 그 남자들을 만나 친구를 대신해 다시 그들과 자고 친구가 받았던 돈을 돌려준다. 아버지는 딸이 남자들과 여관에 드나드는 걸 보고 그 남자들을 찾아가 모욕을 주거나 때리거나 죽인다.

해몽을 하려면 제대로 하자. 바수밀다니 사마리아니 그럴싸하게 제목을 갖다 붙이긴 했지만 괜한 과대망상은 버려라.

나이든 남자들은 대개 역겹다. 죽은 친구는 그 나이든 남자들을 모두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린 여자아이가 몸을 팔면서 밝고 즐겁게 웃는 것을 보고 나이든 남자들은 맛이 간다. 어린 여자아이의 품에 안긴 나이든 남자들은 행복해 보인다. 그러나 관객들은 불편하다. 남자들은 죄책감을 나눠갖고 여자들은 수치심을 나눠갖는다. 김기덕의 영화는 여전히 끔찍한 경험이다.

살아남은 친구는 죽은 친구를 더럽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죽은 친구에게 미안하다. 살아남은 친구는 죽은 친구가 그 남자들을 정말 좋아했다는걸 알게 된다. 그래서 남자들에게 친구가 모아놓은 돈을 돌려주기로 한다. 내 친구는 돈 때문에 너희들과 잔게 아니야. 그래서 이를 악물고 죽은 친구처럼 밝고 즐겁게 웃는다. 이 역겨운 남자들을 정말 좋아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죽은 친구의 사랑을 증명하는 것. 그게 무력한 어린 여자아이가 죽은 친구를 대신해 해줄 수 있는 복수의 모든 것이다. 끔찍하지만 그렇다.

김기덕의 이번 영화에서 아버지는 무력하다. 딸의 행동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막지도 못한다. 이 아버지는 무력할뿐만 아니라 무책임하기도 하다. 결국 딸을 놓아두고 혼자 떠난다. 딸을 죽이거나 강간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다른 영화라면 모르겠지만 김기덕은 그런 억지를 부리고도 남을거라고 생각했다.

대신 김기덕은 좀더 말도 안되는 억지를 부린다. 죽은 친구를 대신해 남자들과 자거나 그 남자들을 죽인 아버지가 잡혀가면서 누가 누군가를 용서하고 누가 누군가를 구원했다고 억지를 부리려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억지는 정말 가당찮다.

도대체 왜 김기덕의 영화는 이렇게 해몽이 거창한가. 모두 얼치기 평론가들이 만들어낸 잠꼬대일뿐이다. 드러난 것 이상으로 다른 의미를 두려고 애쓰지 마라. 흔히 비난하는 것처럼 남자들의 판타지가 목적은 아니다. 그러나 ‘사마리아’는 성의 없고 어설픈 영화다. 김기덕은 도발적이기만 하다. 메시지는 거의 없거나 있더라도 의미가 없다. 당연히 구원도 화해도 없다.

영화보다 더 한심한 것은 포스터와 광고 선전문구다. 영화와 아무런 관계도 없을뿐더러 정말 싸구려 발상이다. 도대체 누가 여자아이를 발가벗겨서 수녀 흉내를 내게 했을까. 그리고는 “내가 더러워?”라고 묻는다. 감독조차도 이 영화에서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모르고 있다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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